글: 소가노대(蕭家老大)
한환제는 연호도 많이 바꾸고, 궁녀도 많았다. 후궁궁녀가 만여명에 달할 정도였다. 황후도 앞뒤로 3명이나 책봉한다. 비록 그가 광록훈(光祿勛) 진번(陳蕃)의 건의를 받아들여 궁녀 500여명을 내보내기도 했지만, 여전히 남겨둔 궁녀의 수량이 훨씬 많았다.
한환제는 21년간 재위하면서, 귀인으로 봉한 후궁이 십여명, 재녀는 무수히 많았다. 그리고 여러 비빈들 외에 그는 3명의 황후를 책봉한다: 한 명은 양황후(梁皇后)이고, 한 명은 등황후(鄧皇后), 나머지 한 명은 두황후(竇皇后)이다.
양황후는 이름이 양여형(梁女瑩)인데, 양태후(梁太后)의 여동생이다. 한환제 유지(劉志)는 처음에 여오후(蠡吾侯)였는데, 양태후는 유지를 낙양으로 불러서, 양여형을 그에게 시집보내고자 한다. 그런데 혼인을 하기도 전에, 유지는 양기(梁冀)에 의해 황제로 세워진다. 다음 해, 즉 건화원년(147년), 관련부서는 양태후에게 주청을 올린다: 모든 것이 준비되었으니 혼례의 규정에 따라 납채를 하자고. 그리하여 한혜제때 황후 장언(張嫣)을 맞이할 때의 규격으로 황금2만근을 내리고 다른 납채도 종전과 같이 했다. 이렇게 하여, 양여형은 육월이 입궁하고, 팔월에 황후로 책봉된다.
양황후가 책봉된 후, 그녀의 언니인 양태후는 임조칭제하고 있고, 오빠인 양기는 권력을 독점하고 있어서, 한환제는 그녀를 아주 총애했다.
화평원년(150년) 삼월, 양태후가 병사하고, 한환제의 그녀에 대한 태도는 바뀌기 시작한다. 양황후는 비록 한환제로부터 수년간 총애를 받았지만, 아들을 낳지 못했다. 그리고 한환제는 점점 그녀를 멀리하게 된다.
이로 인하여 그녀는 한환제의 다른 비빈들에게 속으로 원한을 품는다. 임신을 한 비빈이 있으면 온갖 방법을 써서 낙태시켰다. 한환제는 양기를 두려워하여, 양황후에 대하여 한동안 질책하지 않았지만, 그녀를 더욱 멀리하게 되고, 그녀를 찾는 일은 더욱 적어진다. 연희2년(159년), 양황후는 결국 우울증에 빠져서 병사한다. 사후에 의릉(懿陵)에 묻힌다. 시호는 "의헌황후(懿獻皇后)"로 한다. 같은 해, 한환제는 양기를 주살하고, 그 후에 조서를 내려 의릉을 귀인총(貴人塚)으로 격하시킨다.
등황후의 이름은 등맹녀(鄧猛女)이다. 화희황후(和熹皇后) 등수(鄧綏)의 당질인 등향(鄧香)의 딸이다. 모친의 이름은 선(宣)인데, 먼저 낭중 등향에게 시집가서 딸 맹녀를 낳는다. 나중에 남편이 일찍 죽으면서, 양기의 처인 손수(孫壽)의 외숙 양기(梁紀)에게 시집간다. 등씨는 어려서 모친과 생활했으며 성을 양씨로 바꾼다. 어른이 된 후에 손수는 그녀의 용모가 예쁜 것을 보고, 영흥연간(153년) 궁으로 보낸다. 당시는 채녀(采女)였는데, 한환제의 총애를 받아, 다음 해 한환제는 그녀의 오빠인 등연(鄧演)을 남돈후(南頓侯)에 봉한다.
등연이 죽은 후, 그의 아들 등강이 후작을 세습한다. 양황후가 병사한 후, 한환제는 양기를 주살하고, 등씨를 황후에 앉힌다. 당시 한환제는 양씨를 싫어하였으므로 그녀로 하여금 성을 박(薄)으로 바꾸게 하고, 그녀의 모친 선을 장안군(長安君)에 봉한다.
연희4년(161년), 누군가 등황후가 원래 등향의 딸이라고 알려주며, 다른 성으로 바꿔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그러자 한환제는 다시 그녀의 성을 등씨로 고치게 한다. 그리고 등향을 거기장군(車騎將軍), 안양후(安陽侯)에 봉하고, 수만금을 하사한다.
얼마후 모친 선이 사망하니, 한환제는 더욱 우대하여, 장례를 황후의 모친의 규격으로 거행하게 한다. 그리고 등강의 동생 등통을 곤양후에 봉하고, 등통의 당형 등회로 하여금 종양후를 승계하도록 한다. 등통의 동생 등병은 청양후가 되고, 다른 등씨종족들도 교위, 낭장등이 된다.
등황후는 아들을 낳지 못하여 한환제의 그녀에 대한 총애도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나중에 한환제는 곽귀인(郭貴人)을 총애하는데, 등황후는 자신의 지위가 높다는 것을 가지고 투기한다. 그리하여 곽귀인과 함께 한환제의 앞에서 서로를 고발하기도 했다. 이로 인하여 한환제는 등황후를 싫어하게 된다.
연희8년(165년), 한환제는 조서를 내려 등황후를 폐출시키고, 연금한다. 등씨는 황후로 7년을 지냈는데 결국 울분 속에 죽는다. 죽은 후에는 북망산에 묻히고, 그녀의 형제들도 모두 제재를 받는다.
두황후는 이름이 두묘(竇妙)이다. 장덕황후(章德皇后) 종조부(從祖父)의 손녀이다. 부친은 낭중 두무(竇武)이다. 연희8년, 한환제는 등황후를 폐위시키고, 두황후를 궁으로 들여서 귀인으로 삼는다. 당시, 한환제는 채녀 전성(田聖)을 아주 총애했고, 그녀를 황후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전성의 출신이 미천하다고 하여 강력하게 반대한다. 한환제는 어쩔 수 없이, 두묘를 황후로 책봉한다. 그리고 두무를 괴리후(槐里侯)에 봉하고 성문교위를 맡긴다. 그렇기는 하지만 한황제는 두황후를 그다지 총애하지 않았고, 모든 총애는 채녀 전성이 받는다.
영강원년(167년) 한환제의 병이 위중해진다. 그리고 전성 등 9명을 귀인으로 삼는다.
영강원년 십이월 이십팔일, 한환제는 덕양전전에서 사망하니, 당시 나이 36살이다. 건녕원년(168년) 이월 십삼일, 선릉에 묻히고 시호는 효환황제(孝桓皇帝)가 된다.
한환제의 박정함으로, 두황후는 전성 등에 대하여 항상 미워하는 마음이 있었다. 한환제가 죽자, 두황후는 황태후가 되고, 부친 두무가 전권을 장악한다. 그리고 두정후 유굉(劉宏)을 모셔와서 황제로 앉히니 그가 한영제이다.
두태후는 임조칭제후, 즉시 성격을 드러낸다. 한환재의 관이 아직 전전에 있을 때, 사람을 보내어 전성을 죽인다. 그리고 한환제의 다른 귀인들도 모조리 죽여버리려 한다. 중상시 관패, 소강이 극력 만류하여 그만두게 된다.
얼마후, 두무와 진번등이 환관을 주살하려고 모의한 일이 발각되고, 중상시 조절등이 조서를 위조하여 두무를 죽인 후, 두태후를 남궁 운대로 보내버린다. 두무의 일가족들은 비경(比景, 지금의 월남 남부)으로 보내어진다.
한영제는 두태후가 일찌기 자신을 황제에 앉혀준 고마움을 생각하여, 두태후는 비교적 잘 보살펴주었다. 건녕4년(171년) 십월 초하루에는 신하들을 데리고 두태후를 조견하고, 친히 그녀를 위해 축하주를 따라주었다. 그후 다시 황문령 등맹의 권고를 들어 두태후에 대한 공양을 늘인다.
그러나 두태후의 마음 속 울분은 가라앉지 않았다. 희평원년(172년), 모친이 비경에서 죽자, 두태후도 슬퍼하다가 죽는다. 그녀가 죽은 후, 두태후와 한환제는 선릉에 합장되고, 시호는 "환사황후(桓思皇后)"라 한다.
한환제는 아들이 없었다. 딸만 셋을 낳았다. 장녀 유화(劉華)는 연희원년(158년) 양안장공주에 봉해지고, 불기후 보국장군 복완에게 시집간다; 둘째딸 유견은 연희7년(164년) 영양장공주에 봉해진다; 막내딸 유수(劉修)는 연희9년(166년) 양적장공주에 봉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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