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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문혁전)

고강(高崗)의 권력은 어떻게 유소기와 주은래보다 커지게 되었는가?

by 중은우시 2015. 5. 30.

글: 중천비홍(中天飛鴻)

 

 


[모택동은 당의 과도시기총노선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일을 중시하고 사람을 중시하지 않았다. 최소한 신세제풍파가 발생한 1953년초에는 모택동이 유소기와 주은래의 일부 언행에 불만을 갖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따라오는 고강은 비교적 좋아한다. 이와 반대로, 고강은 사람을 따지지 일을 따지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모택동이라는 최고지도자의 인정을 받았다고 생각하여 다른 사람은 모조리 눈아래 두지 않았다.]


한반도의 전쟁국면이 안정되고, 국민경제회복임무가 초보적으로 완성되었을 때, 중공중앙은 1953년부터 대규모의 경제건설을 시작한다.


1952년 8월에서 1953년초까지, 서남국 제1서기 등소평, 동북국 서기 고강, 화동국 제1서기 요수석(饒漱石), 중남국 대리서기 등자회(鄧子恢), 서북국 제2서기 습중훈(習仲勛)은 차례로 북경으로 불려와서 당과 국가의 고위직무를 맡게 된다. 그중 고강은 국가계획위원회 주임이 된다. 국가계획위원회는 중앙인민정부의 직속지휘를 받아, 정무원(政務院, 현재 국무원)과 동격이었다. 그러므로 고강의 지위는 특수했다. 그리하여, "오마진경(五馬進京), 일마당선(一馬當先)"(다섯 마리의 말이 북경으로 들어갔는데, 한 마리가 앞서간다)는 말이 돌았다.


이번에 북경으로 들어온 것은 47세의 고강에 있어서 확실히 인생의 중대한 전환점이었다. 고강의 인생경력은 복잡하지 않았다. 황토지에서 흑토지를 오갔다. 서북에서 동북으로, 우연히 화북을 지나갔을 뿐이다. 고강의 중국판도에서의 활동은 거의 "삼북(서북,동북,화북)"을 벗어난 적이 없다. 비록 고강은 신중국이 성립될 때 국가부주석이라는 고위직을 맡지만, 고강은 신중국 6명의 국가부주석중 유일하게 북경에서 일을 하거나 큰지역구에서 일을 한 적이 없는 특수한 부주석이었다.


1952년 12월초, 고강은 동북의 업무를 마치고, 북경으로 와서 국가계획위원회 주임이 된다. 1953년 1월, 국가계획위원회의 설립준비작업은 기본적으로 완성되어 있었다. 이때의 계획위원회는 이미 1225명의 편제인원과 16개의 청국(廳局), 1개의 직속처를 둔 받애한 기구였다. 확실히 병강마장(兵强馬壯)하다고 할 수 있었다. 당시 고강이 거주하던 동교민항 8호는 일시에 북경의 사람들이 주목하는 요지가 된다.


1. 신세제풍파: 신세제로 인한 풍파로 고강의 권한은더욱 커진다.


신중국의 세제는 "잠시 구세법을 연용한다"는 방침이 1950년에 정해진다. 경제의 발전과 더불어, 원래의 세제는 경제발전을 가로막는 폐단이 날로 드러난다. 그리하여, 1952년 12월 31일, 정무원 재경위원회는 <세계의 약간수정 및 실행일시에 관한 통지>와 <상품유통세제시행방법>을 내놓는다. 당시 중앙재정위원회 부주임 겸 재정부장인 박일파(薄一波)는 신세제를 이렇게 설명했다: "공사간에 일률적으로 평등하게 세금을 낸다"


모택동은 신세제에 대하여 엄중한 비판을 한다: "공사간에 일률적으로 평등하게 세금을 낸다"는 구호는 7기2중전회의 결의에 위배된다; 수정세제는 먼저 당중앙에 보고하지 않았으며, 자본가들과 협의했다. 자본가를 당중앙보다 중시하는 것이다; 이 신세제는 자본가들이 좋아하는 '우경기회주의'의 잘못이다.


모택동은 신세제에 대하여 엄중한 비판을 하였을 뿐아니라, 비판의 창끝을 주은래가 책임진 정무원으로 향한다. 정무원이 '분산주의'의 잘못을 범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조직상으로 중앙정부에 대하여 개조를 진행한다. 그중 한가지 중요한 내용이 바로 정무원의 20개 부문중 8개 부문 즉, 중공업부, 일기부(一機部), 이기부(二機部), 연료공업부, 건축공정부, 지질부, 경공업부와 방직공업부를 국가계획위원회 주석 고강의 산하로 보내버린다.


이렇게 하여, 고강이 책임진 국가계획위원회는 "경제내각"이라고 불리웠다. 비록 주은래가 정무원총리로서 여전히 정부의 전체 업무에 총책임을 지기는 하지만, 그는 단지 구체적은 섭외관련 몇 개부문을 관장했고, 나머지 각 부문은 모두 직접 당중앙에 책임졌다.


모택동이 왜 이렇게 중대한 조정을 한 것일까? 신세제의 실행에 불만이 있어서일까? 만일 우리가 사회주의과도의 1953년으로 돌아가, 고강이 북경으로 들어오기 전에 유소기와의 사이에 벌인 몇 번의 논쟁과 이에 대한 모택동의 태도를 보면, 발견할 수 있다. 모택동의 한 가지 기본관점은 변하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신중국성립후, 사유재산을 건드려야 한다는 것이고, 점진적으로 신민주주의에서 사회주의로 넘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1953년 6월 15일, 모택동은 중공중앙정치국확대회의에서, 비록 급진적이고 조급한 정서를 비판하기는 했지만, 중점적으로 당의 과도시기노선에서의 우경착오에 대하여 비판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사람은 민주혁명이 성공한 후 여전히 원래의 자리에 머물러 있다. 그들은 혁명성격의 변화를 모르고 여전히 그들의 '신민주주의'를 진행한다. 사회주의개조를 하지 않는다. 이것은 바로 우경의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당과 국가의 최고지도자로서 모택동은 당의 과도시기총노선을 진행하면서, 일을 중시하고 사람을 중시하지 않았다. 최소한 신세제풍파가 발생한 1953년초에는 모택동이 유소기와 주은래의 일부 언행에 불만을 갖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따라오는 고강은 비교적 좋아한다.  


이와 반대로, 고강은 사람을 따지지 일을 따지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모택동이라는 최고지도자의 인정을 받았다고 생각하여 다른 사람은 모조리 눈아래 두지 않았다. 신민주주의사회에서 사회주의사회로의 과도를 실현하는데, 모택동이 고강의 돌격대 역할을 중시하면서도 유소기, 주은래와 같은 양대주력군을 버릴 수는 없었다. 어떤 의미에서, 고강을 발탁하고 중용한 것은, 유소기, 주은래에 대한 비판이었다. 또한 두 사람에 대한 격려였다. 그러나, 막 북경이라는 이 땅을 밟은 고강은 모택동의 깊은 의도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2. 1953년 재경회의: 고강의일생에서 이번 회의는 아주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


1953년 재경회의는 원래 보통의 경제공작회의였다. 다만 이번의 보통의 경제공작회의가 고강의 일생에서 극히 남다른 의미를 지니게 된다. 소위 "고요사건(高饒事件)"은 일반적으로 말해서 이번 회의부터 얘기가 시작된다.


경험부족등의 원인으로, 1953년 상반기의 재정경제공작에서는 여러가지 문제가 나타난다. 상반기 국가예산집행결과, 21.5억위안의 적자가 나타났다. 중공중앙은 재정회의를 열어 이런 문제의 해결방안을 연구한다. 회의는 6월 13일부터 8월 13일까지 이어져서 꼬박 2달간 지속된다.


신세제를 비판하는 것이 점점 토론의 중심이슈가 된다. 비판의견도 자연히 신세제실시를 책임진 중앙재정위와 재정부장 박일파에게 몰린다. 비판의 논조는 계속 거세지고, 공격의 창끝은 점점 유소기를 향한다. 그리고 정교하게 준비를 한 후에 고강은 영도소조확대회의에서 '지상매괴(指桑罵槐)"의 장편의 발언을 한다.


고강은 발언과정에서 박일파가 농촌정책에서 당중앙과 모주석이 역대이래로 주장해온 '개체가 점진적으로 집단으로 발전한다'는 방침을 저해했다고 본다. 박일파의 주장은 '농촌경제의 발전을 실제로 부농경제의 발전에 희망을 걸었다'고 본다. 고강은 또한 박일파의 잘못은 '개인과 당의 관계에서 위치를 잘못 정하고, 당에 대하여 성실하지 않은 태도를 나타내고, 비민주적인 작풍과 행회주의(行會主義)의 정서가 있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고강의 비서가 기억하는 바에 따르면, 고강은 재경회의에서 준비한 발언원고는 우리 몇 사람이 준비했는데, 고강은 이렇게 말했다. 발언은 강하게 하라. 사상적으로 이론적으로 박일파를 비판하라. 재경회의의 이튿날, 모주석은 보고서에서 과도시기총노선을 얘기하고, 자산계급우경사상을 비판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고강의 발언원고를 초안하면서, 모주석의 말씀과 일치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어떤 말은 확실히 단순하게 박일파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고, 유소기의 우경을 비판하는 것이었다. 이 원고가 나온 다음, 모주석과 주총리도 보고 동의했다. 모주석은 '우경' 앞에 '자산계급'이라는 네 글자를 추가하기도 했다.


고강이 나중에 쓴 <나의 반성>에서도 인정한다: 나의 재경회의에서의 발언은 '박일파동지를 비판하는 외에, 지상매괴로 유소기동지를 말하는 의미도 있다.


모택동이 박일파를 '탁자위의 투쟁'에 올려놓은 것은 원인이 신세제풍파에 있기는 하지만, 심도있게 원인을 따져보면, 여전히 당내에서 당의 과도시기총노선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총노선이라는 큰방향을 관철하는 문제에서, 모택동은 박일파등이 우편향되는 것도 허용할 수 없었고, 고강처럼 좌편향되는 것도 허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회의를 주재하던 주은래가 공개적으로 박일파의 편을 들어주기도 어렵고, 회의국면을 통제하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의 국명에 처한 것을 보자, 모택동은 중공중앙판공청 주임 양상곤에게 지시하여 전화로 북대하에 있던 '인물들'을 소환한다. 그곳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진운, 등소평에게 급히 돌아와서 회의에 참석하라고 한 것이다.


진운(陳雲)은 8월 6일자 재경회의 영도소조에서 중요한 발언을 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신세제의 결과는 분명하다. 사회주의경제에 불리하고, 자본주의경제에 유리하다. 박일파는 중앵재정위원회에서 많은 일을 했다. 비록 많은 것들은 사무적인 것이지만, 만일 아마도 이런 일을 하지 않으면, 중앙재정위원회의 업무는 잘 할 수가 없다. 업무에서 서로 다른 의견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중앙재정위원회 내부에 두 노선의 문제가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등소평은 8월 3일 북경으로 돌아온 후, 회의에서 이렇게 발언한다: 모두 박일파동지의 착오를 비판하는데 나도 찬성한다. 모든 사람은 잘못을 범할 수 있다. 나 자신도 적지 않은 잘못을 범했다. 이 자리에 앉아 있는 다른 동지들도 잘못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박일파 동지의 잘못은 아주 많다. 아마도 한근 두근이 아닐 것이다. 아마도 일톤 이톤일 것이다. 다만 그가 범한 잘못이 아무리 많다도 그것을 노선의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가 요 몇년간 일한 이런 저런 잘못을 모두 노선장의 잘못이라고 하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나는 찬성하지 않는다.


원래 모택동이 데려온 '원군'들이 역할을 해서 회의의 분위기는 바뀐다. 고강도 이제는 멈추어야 했다. 그러나 8월 9일에 개최된 중공중앙정치국회의에서 고강은 여전히 박일파에 대하여 잘못을 지적한다. 이번 정치국회의의 의제는 주은래의 회의결론원고를 토론하는 자리였다. 회의에서 모택동은 참석자들에게 의견이 있는지를 묻는다. 박일파는 그가 잘못했다고 하며, 다만 어떤 구체적인 사정은 아직 분명히 말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때 고강이 일어나서 박일파의 태도가 좋지 않다고 비판한다. 그러자 모택동이 고강의 말을 가로막고 말한다: 너의 태도도 좋지 않다.


3. '3월명단'사건: 고강은 모택동의 금령을 어기고 여러번 임의로 '삼월명단'을 뿌린다.


신비한 '3월명단'사건의 유래에 관하여 서로 다른 전설과 판본이 있다. 고강의 비서 조가량은 <반절묘비아래의 옛이야기: 북경의 고강>이라는 책에는 이렇게 쓰고 있다: "고강은 반성하면서 말한 바 있다. 개략 1954년 4월 상순의 어느 정오였다. 모택동의 기요비서가 문건을 하나 보내오는데, 그가 친히 받았다. 그리고 즉시 읽어본 후 회수해갔다. 일반적인 상황하에서라면, 중앙에서 전달한 문건은 설사 기밀이고 아주 중요한 문건이라고 하더라도, 모두 중앙기요국에서 전문요원이 보내오고, 비서가 받는다. 유일하게 이번은 예외였다. 모택동의 기요비서가 직접 고강 본인에게 전달한 것이다. 그리고 읽은 후에는 바로 회수해 갔다. 이를 보면 모택동이 이 문건을 얼마나 중시하는지 알 수 있다. 또한 문건이 특별히 기밀이며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당시 중앙조직부 부부장 안자문(安子文)이 초안한 '8대'정치국위원과 각부위원회 업무분장명단이었다고 한다. 고강은 놀란다. 정치국위원 명단에 박일파는 있고, 임표는 없었다. 이 명단을 그는 이전에 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안자문이 이 명단을 마음대로 만든 것일까 아니면 누군가가 안자문에게 만들게 한 것일까? 지금도 여전히 수수께끼이다. 다만 고강은 확실히 유소기가 안자분에게 지시하여 만든 명단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나의 반성>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주관적으로 생각했다. 안자문이 어찌 자기 마음대로 중앙정치국위원의 명단을 만들겠는가? 안자문의 뒤에 분명 누군가 있다. 그것은 바로 유소기이다. 그리고 그도 임표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고 인정한다: 내 기억에 명단에 너는 없다.


그러나, 명단이 어떻게 만들어졌던, 고강은 확실히 이 명단을 보았다. 그리고 어느 정도 전파한다. 그리하여, 재경회의에서, 당시 중앙조직부 부장을 맡고 있던 요수석이 돌연 질문한 것이다: '3월명단'은 도대체 어찌된 일이냐?


유소기, 주은래는 모두 사전에 이런 명단이 있는줄 몰랐다고 하고 깜짝 놀라서 그 자리에서 안자문에게 이 일을 캐묻는다. 안자문은 회의상에서 그런 일이 확실히 있었다고 인정한다. 회의우 중앙에 서면반성문을 내고, 중앙에서 중앙조직부 부부장의 직무를 면직시키는 처분을 해달라고 요청한다. 중앙은 안자문이 명단을 초안한 것은 확실히 당의 기율을 위배했다고 인정하고, 7월말 당내당면경고처분을 내린다. 모택동도 선포한다: 이 일은 여기까지 하고, 더 이상 확대하지 말라.


원래 일은 여기서 끝날 수 있었다. 그러나 고강은 여전히 모택동의' 더 이상 확대하지 말라'는 금지령을 어기고, 재경회의와 나중의 남하휴가기간에 일부 지방과 군대의 지도자간부들과 접촉하면서 이 명단을 전파했다. 고강의 이런 행위는 어느 정도 당내의 혼란을 조성했을 뿐아니라, 모택동에게 극도의 불만과 고도의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4. 모택동이 고요문제를 해결하기로 결심하다: 이것은 고강의 예측을 훨씬 벗어난 것이고, 고강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고강은 1953년 10월 3일부터 11월 2일까지 남방을 순회한다. 이 때가 그의 인생에서 마지막 잘나가던 시점이었다.


고강이 항주로 가서 휴가를 보낼 때, 임표가 마침 서호의 한 조용한 2층양옥에서 요양하고 있었다. 고강은 임표와 여러번 얘기를 나눈다. 임표는 고강의 옛날 상사였다. 동북해방전쟁때 두 사람은 잘 협력했고, 관계도 긴밀했다. 신중국이 성립된 후, 고강은 동북에 있고, 임표는 중남에 있었다. 둘은 계속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다.


나중에 개최된 고강문제좌담회에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고강은 1개월의 휴가기간동안 "현지의 당정군 고급지도자간부들에게 소위 '군당론(軍黨論)'을 퍼트렸다. 중국공산당내에는 '근거지와 군대의 당' 및 '백구(白區)의 당' 두 부분이 있다. 그리고 '근거지와 군대의 당'의 대표로 자처했다. 또한 현재 당중앙과 국가기관은 '백구의 당'에 장악되어 있으니 철저히 개조해야 한다고 했다. 그가 당중앙부주석 혹은 총서기를 캍고, 부장회의 부주석도 맡아야 한다고 말했다."


고강의 언행은 모택동으로 하여금 고강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더 이상 늦출 수 없다고 느끼게 만든다. <진운연보>에 따르면, 1953년 12월 19일, 모택동, 주은래는 진운을 고강이 외출한 노선을 따라, 당중앙을 대표하여 고강이 설득한 간부들과 인사를 한다. 모택동은 진운에게 항주에서 요양중인 임표에게 말을 전하게 한다: 고강에게 속지 말라. 만일 임표가 의견을 바꾸지 않으면 그와 분리하라. 바꾸기를 기다려서 다시 그와 연합하라. 진운은 임표에게 모택동의 말을 그대로 전달한다. 그리고 그에게 고강이 '사야(四野)' 기치를 이용한 것과, 전국재경회의에서 각 대구의 책임자들을 부추겨서 중앙재정위원회의 각종문제를 공격하도록 선동한 것을 말해준다. 임표는 고강을 더 이상 지지하지 않겠다고 표시한다.


12월 24일, 중공중앙은 정치국확대회의를 소집한다. 이번 회의에서,모택동은 이름을 거명하지 않으면서 참석자들에게 고강문제의 심각성을 지적한다. 그는 평소와 다르게 이렇게 말한다: "북경에는 두 개의 사령부가 있다. 하나는 나를 우두머리로 하는 사령부이고, 바로 양풍(陽風)을 일으키고 양화(陽火)를 피운다;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을 우두머리로 하는 사령부이고 음풍(陰風)을 일으키고, 음화(陰火)를 피운다. 하나의 지하수이다. 정출일문(政出一門)이나 정출다문(政出多門)이냐?"

모택동의 말은 고강의 예측을 훨씬 벗어났다. 그래서 고강은 머리가 어질어질해져서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된다. 다만 모택동이 자신에게 극도의 불만을 가졌다는 것을 마침내 알게 된다. 일은 자신이 생각한 것처럼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1980년 3월 19일, 등소평은 당의 11기 6중전회 <건국이래 당의 약간역사문제에 관한 결의> 기초소조에게 '고요사건'을 먜기하면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이 일은 내가 아주 잘 알고 있다. 모택동 동지가 1953년말 중앙을 1선, 2선으로 나누자고 얘기한 후, 고강은 아주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그는 먼저 임표의 지지를 받아냈고, 비로소 마음 놓고 일을 벌였다. 그때 동북은 그의 것이었다. 중남은 임표의 것이다. 화동은 요수석의 것이다. 서남에 대하여도 그는 회유하려 했다. 정식으로 나와 얘기했다....그리고 진운동지를 찾아가서 얘기도 했다....고강은 유소기 동지를 쓰러뜨리고자 했다. 그래서 뒷거래, 음모궤계의 방법을 썼다. 이것은 비정상적인 것이다. 그래서 고강에 반대하는 투쟁은 긍정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