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장계합(張繼合)
<명사>혹은 <청사고>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아마도 요설은(姚雪垠) 선생이 창작한 장편역사소설 <이자성>은 읽어보았을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틈왐(闖王)"이라 불리는 이자성은 일을 계속하여 벌이는 반란군의 우두머리로 나온다. 만일 그의 곁에 있는 부인을 얘기하더라도, 절대로 수신여옥(守身如玉)의 순정파는 아닐 것이다.
장편역사소설 <이자성>은 이자성의 부인을 아주 치켜세운다. 바로 고부인(高夫人). 그녀는 재주가 있을 뿜아니라, 교양도 있다. 게다가 무공도 뛰어나다. 그렇지만 이 여중호걸도 친구집에서 "얻은" 것이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이자성이 반란에 참여하기 전에 "뇌옥지재" 즉 감옥에 갇힌 바 있다. 교묘하게도, 이때 옥졸이 바로 고립공(高立功)이다. 그는 이자성과 원래 친한 친구였다. 고립공은 이자성은 감옥에서 구해준다. 그리고 직접 데리고 자기 집으로 가서, 잘 치료해 준다. 바로 이때 이자성은 고부인을 만난다. 그녀의 원래 이름은 고계영(高桂英)이고, 고립공의 친여동생이다. 집안에는 형제자매 3명이 있었는데, 모두 무예를 배웠고, 모두 협의를 행했다.
이자성은 고계영의 보살핌으로 점점 애정이 생긴다. 당시 고계영도 이자성을 앙모했다. 결국 고립공이 중간에서 연결해줘서 두 사람은 같이 살게 된다. 성혼후, 고계영과 이자성은 부창부수로 동감공고했다. 고계영은 이자성을 따라 전쟁터를 누볐고, 이자성이 명나라를 뒤엎는 것을 도운다. 바꾸어 말하면 이자성은 '내조'를 잘하는 부인을 얻은 것이다.
이자성이 북경에서 칭제할 때, 고계영은 황후가 된다. 확실히 이자성은 고부인의 인품을 상당히 높이 평가했다.
재미있는 것은, 이자성이 죽은 후에도, 고계영은 그냥 가만히 있지 않고 자신의 형제들과 함께 계속 '항청'한다. 아쉽게도 내전에서 고일공은 손가망의 습격을 받아 전사하고, 고씨의 기록은 이때부터 사라진다. 세상 사람들은 고부인의 최후를 알지 못한다.
이자성은 명나라말기에 살았고, 곁에는 자연히 여러 명의 여인이 있었다. 일부다처제가 당시의 습속이었다.
관련기록에 따르면, 이자성이 고부인과 혼인하기 전에, 한금아(韓金兒)라는 처가 있었다. 이저성과 한금아가 결혼할 때 이자성의 나이는 겨우 18살이었다. 이자성이 당시 은천역(銀川驛)이 역졸이었으므로, 자주 바깥을 돌아다녔다. 한번은 이자성이 공문을 보내는데 분실하게 된다. 동시에 한림아는 아역인 개군록(蓋君祿)과 사통하다가 이자성에게 발견된다. 결국 이자성은 한금아를 자기 손으로 죽인다.
그외에, 야사의 기록에 따르면, 이자성에게는 또 다른 형씨(刑氏) 부인이 있었다. 바로 "형부인"이다. 유감스럽게도 그녀도 한금아와 마찬가지로 여자의 본분을 지키지 않았다. 얼마 되지 않아 이자성의 부하인 고걸(高傑)과 사통한다. 발견된 후에 형부인은 고걸과 함께 대청왕조에 투항한다.
그리고 또 다른 기록에 따르면, 순치2년, 청군이 '구궁산'에서 이자성의 금인과 처첩 2인을 거두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시간적으로만 본다면, 이 처는 분명 고계영이 아니다. 한금아도 이미 죽었고, 형부인은 이미 도망쳤다. 그러므로, 이자성에게는 분명 다른 부인이 최소 2명 더 있었다. 즉, 이자성의 부인은 최소 5명이다.
"틈왕" 이자성은 평생 말을 타고 무기를 들고 전쟁터를 누볐다. 그래서 여자와의 인연은 그다지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 중에서는 고계영만이 이자성과 애정이 깊었던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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