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문재봉(文裁縫)
천문산
천문산(天門山)은 해발 1,517.9미터이고, 산아래의 시가지와는 상대표고차가 1300여미터나 된다. 호남서부 장가계시의 남쪽 교외 8킬로미터에 위치하고, 무릉산의 남쪽지맥에서 높은 봉우리의 하나로, 장가계시의 천연벽화이며, 상서제일신산이라는 별칭을 지니고 있다. 사료의 기록에 따르면, 천문산은 장가계에서 가장 먼저 역사책에 오른 명산중 하나이다. 동한때에는 "숭량산(嵩梁山)"이라고 불리웠다. 삼국시대에 대지진으로 산이 갈라지며, 남북으로 동(洞)이 생기면서 마치 문(門)처럼 보이게 되었다. 오나라 경제(景帝) 손휴(孫休)는 이를 길조라고 여기고, 명을 내려 무릉군을 천문군으로 개칭한다. 천문산이라는 이름은 이렇게 얻어졌다.
이자성이 패배하여 북경성을 떠날 때, 국고의 금은보화를 모조리 가져갔다. 의도는 재기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그의 부하장수인 야불(野拂)은 아홉척의 큰 배로 보물을 옮겼고, 비밀리에 천문산으로 운반한다. 거기에는 분명히 국고에서 약탈한 엄청난 금은보화가 들어있을 것이다. 재기의 희망이 사라지자, 야불은 아예 죽기 직전에, 이 보물을 천문산의 여러 비밀장소에 나누어 숨긴다. 수백년동안, 거대한 이익의 유혹하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보물을 찾아 산으로 들어왔는지 모른다. 그러나 모두 빈 손으로 돌아갔다. 이 보물은 도대체 어디에 묻혀 있을까? 그것은 천문산에서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된다. 관음산(觀音山)에서 가치가 천만위안에 달하는 원,명시대의 문화재가 발굴되고, 이는 다시 한번 수수께끼에 놀라움을 더한다.
이와 동시에, 호남성 망산임구에는 백여년이래로 보물에 관한 신비한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전설에 따르면, 이자성은 '구려십팔담(九驢十八擔, 아홉마리 당나귀에 18개의 보따리)"의 금은보화를 가지고 망산으로 갔다고 한다. 이 사람을 홀리는 전설에 적지 않은 사람들은 보물을 찾아서 여정을 떠나고, 어떤 사람은 심지어 목숨을 잃기도 한다. 지금까지도, 그곳에서 보물을 숨긴 구체적인 장소를 찾을 수 있을 것인가?
1. 관음산에서 찾아낸 2급문화재
호북성 장가계 천문산 풍경지구범위내에 관음산이라는 산이 있다. 2001년전에는 충분히 개발되지 않은 곳인데, 2001년 6월 25일, 장가계 왕가채촌 공산당 지부서기인 이자상(李慈祥)이 회의를 소집하여 말한다: "옛 사람들의 말이 맞다. 산에 있으면 산으로 먹고 살고, 물에 있으면 물로 먹고 살아야 한다. 우리 왕가촌은 무릉산의 가운데 있고 건너편이 저명한 풍경지구인 천문산이다. 우리 왕가채가 하루빨리 가난에서 벗어나려면, 그저 이 관음산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 관음산은 풍경이 수려하고, 기온이 적합하다. 관광레저에 좋은 곳이다. 우리는 천문산의 봄바람을 이용하여 개발하는 것이 좋겠다. 관음산을 이용하여 관광자원을 개발하자."
이서기의 발언은 즉시 참석자들의 옹호를 받는다. 촌주임 조옥(曹玉)은 쇠뿔도 단김에 뺀다는 심정으로, 회의에서 촌위원회가 촌에 경험이 풍부한 청장년을 조직하여, 풍경지구관광자원 고찰팀을 만든다. 촌의 청장년들은 속속 손을 들고 첩첩산골인 관음산을 탐험하여 관광자원을 찾아나서겠다고 자원한다.
7월 20일, 고찰팀은 마른식량과 물을 가지고 길을 떠난다. 일행은 배가 고프면 야생과일을 따먹고, 밤이 되면 동굴에서 잠을 잤다. 5,6일의 고찰로 관음산에는 예전에 말로만 들었지, 직접 가본 사람은 없었던, 남천문(南天門), 장성로(長城路), 관음좌연대(觀音坐蓮臺), 탁자암(桌子巖)등의 경관이 있다는 것을 확인한다. 그러나, 산에는 안개가 너무 많이 끼어서 더 멀리 가면 길을 잃을까 우려하여, 1주일후, 고찰팀은 관음산에서 나오기로 결정한다. 다시 정비한 후에 산으로 들어갔다.
8월 15일, 고찰팀은 다시 출발한다. 출발전에 이자상 팀장은 대원들에게 말한다. 이번에는 관음산의 중심지에 대하여 추가로 고찰한다. 대원들은 조를 이루어 가급적 분산행동하되, 너무 멀리 떨어져서는 안된다. 산에는 자주 멧돼지, 춘후(春猴), 황후(黃猴)등이 출몰한다. 관음산에 들어간 후 만일 야생짐승을 발견하면, 즉시 호루라기를 불기로 했다. 다른 사람들이 도우러 갈 수 있도록.
산에 들어간 후, 계속 걸어갔다. 장금장(張金長)은 앞에 녹이 끼어있는 물건을 발견하고, 이자상을 부른다. 두 사람은 손에 손을 잡고 그물을 이룬 마른 등나무를 따라 갔다. 이자상은 한 손으로 등나무줄기를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로 장금장을 붙잡았다. 장금장이 몸을 숙여서 그 물건을 집을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장금장이 물건을 들어올려보내 원래 칼이었다. 연대가 오래되어 집어보니 겨우 구리손잡이만 남았다. 두 사람은 즉시 판단한다: 이곳에는 사람이 온 적이 있다.
다섯째 날, 고찰팀은 관음산의 정상까지 올라간다. 1조는 허리에 밧줄을 묶고 절벽을 타고 골짜기로 내려간다. 절벽에, 한 대원이 발을 밟은 곳에 진흙과 같은 물건이 있었다. 그는 마른 가지와 풀을 헤치고 자세히 살펴보니, 이곳은 천연석동과는 달랐다. 인공으로 쌓은 것같았다. 크기는 3장가량이었다. 다시 손으로 진흙과 어지럽게 흩어져있는 돌들을 치우고 나니, 진흙 속에는 석회, 사장(沙漿)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끈적끈적한 물체도 있었다.
그는 절벽에서 즉시 호루라기를 분다. 위에 있던 사람들이 급히 그를 끌어올린다. 그는 채집한 것을 고찰팀원들 앞에 놓았다. 경험있는 대원은 이곳이 막혀져 있는 암동이라고 얘기해서 모두를 놀라게 한다. 고찰팀의 팀장인 이자상은 이 발견에 대하여 친히 내려가서 알아보고자 한다. 그가 내려간 후, 눈앞에 펼쳐진 것은 하늘을 향한 석동이었다. 동굴앞에는 사람이 발을 디딜 수 있는 암석이 있었다. 그러나, 왜 사람들이 막아놓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자세히 살펴보지 않았더라면, 절벽과 구분이 가지 않았을 것이다. 고대인들이 왜 이 동굴을 막아놓았을까? 동굴 안에는 도대체 무엇이 있을까?
오후, 고찰팀은 막아놓은 동굴에 표시를 한 후에 숙영지로 돌아온다. 다음 날, 고찰팀의 구성원들은 왕가채촌으로 되돌아온다. 즉시 촌의 나이많은 어른들에게 물어본다. 그러나 촌의 80세이상된 노인들도 이 동굴을 모르고 있었다. 아마도 동굴을 막은 것은 아주 기밀을 유지하면서 이루어진 것같았다.
10월 12일, 이자상은 대원을 데리고 동굴을 발굴한다. 그러나, 쇠호미로는 팔 수가 없었다. 그래서 폭약을 썼다. 견고한 동굴문은 그래도 별로 손상이 없었다. 대원들은 3일간을 폭약으로 뚫었다. 3일간 계속하니 2,3미터 깊이로 파게 된다. 이때, 동굴의 곁에 하나의 이동(耳洞)이 나타난다. 이 이동은 비어 있었다. 이자상은 성냥불을 켰는데, 이동의 바위 구멍 속에서 풀뿌리같은 물체를 발견한다. 그는 가볍게 손으로 파내서 흙을 털어내니 금빛이 찬란했다. 동굴안에 금이라니. 이자상은 바위구멍에서 금채(金釵), 금잠(金簪), 금고(金箍, 금테)등 모두 14개를 찾아낸다.
동굴안에 금이 있다는 소식은 금방 영정구위에 전해진다 구위 서기는 그 소식을 들은 후, 친히 차를 몰아서 왕가채촌으로 온다. 촌민들이 발굴한 관음산 봉문동에 대하여 구체적인 조치를 취한다. 이 중대한 고적을 보호하기 위하여, 봉문동을 상세히 고찰하도록 촌민들이 행동을 잠시 정지하도록 하고, 원인을 찾은 후, 국가문화재전문가로 하여금 발굴하도록 하였다.
나중에 감정을 거친 결과 전문가들은 만장일치로 이것이 원, 명시기의 궁중악세사리라고 인정했다. 이미 수백년의 역사가 있는 것이다. 이 14건의 주보중에서 십칠화금채(十七花金釵), 오두금잠(烏頭金簪)의 2개는 국가2급보호문화재이고, 엽화금채(葉花金釵), 소금잠(素金簪), 봉두은채(鳳頭銀釵), 봉두은잠(鳳頭銀簪), 연화은잠(蓮花銀簪)등 8건은 국가3급보호문화재이다. 나머지는 일반 악세사리다. 이 문화재의 가치는 약 7천만위안가량이다.
이동의 보물만으로도 이렇게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는데, 동굴내의 보물은 더욱 많을 것이다. 이 금장식물들은 어디서 온 것일까? 설마 전설상의 야불(野拂)이 남긴 보물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봉문동은 비록 연대가 오래 되었지만, 그 안의 문물은 이미 원,명시기의 궁중악세사리로 감정되었다. 이를 보면 동물을 만든 시기는 원,명이전은 아닐 것이다. 이자성의 보물이 천문산에 있다는 것과도 부합하는 것이다.
2. 야불호보천문산(野拂護寶天門山)
천문산에 관하여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명나라말기, 틈왕(闖王) 이자성(李自成)이 농민군을 이끌고 명나라군대를 대파하고 북경성을 함락시킨 후, 황궁을 점령하여, 대량의 궁중보물을 약탈한다. 나중에 이자성이 패퇴하여 북경성에서 물러날 때, 국고의 금은보화를 모조리 가져간다. 수하의 대장인 이과(李過)로 하여금 보물을 숨기게 한다. 의도는 나중에 재기할 밑천으로 쓰기 위함이다. 이과는 삭발하여 승려가 되는데, 법호를 '야불(野拂)'이라 한다. 그는 100여명이 제자를 이끌고, 표국에서 보관시켰던 무거운 나무상자를 찾아서, 배에 싣는다. 그후 닻을 올리고, 야색을 틈타 출발한다. 풍수(澧水)를 따라 거슬러 올라가는데, 양쪽은 깍아지르는 절벽이고, 풍경이 아름다웠다. 야불은 이것들을 감상할 여유는 없었다. 선박은 연도에 암백도, 사도만, 의충교등에서 정박하였다. 배가 위로갈수록 물길은 더욱 거세어 나가기 힘들었다. 며칠이 지난 후, 선단은 고진 계구경내로 들어간다. 야불은 뱃사공들에게 배를 오사채의 아래에 있는 평탄촌에 정박시키게 한다. 그는 양안을 올려다보니, 한쪽은 깍아지른 절벽이고, 다른 한쪽은 물산이 풍부한 개활산지였다.
배에서 내린 후, 야불은 평탄한 강안에 서서, 오사채를 올려다본다. 다섯개의 산꼭대기는 다섯마리의 사자가 강가에 엎드려 있는 것같았다. 기세가 웅혼했고, 살아있는 듯했다. 산 위에는 암자가 하나 있는데 오사채암이라고 불렀다. 하루종일 향불이 올라갔다. 그는 이 곳이 찾기 힘든 풍수길지라고 느끼고, 이곳에서 편안하게 만년을 보낼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자경자족하면서, 병마를 훈련시킬 수도 있었다. 그래서 이곳에 잠시 거주하기로 결정하고, 틈왕 이자성의 명령이 내려오기를 기다린다.
그는 산을 올라가서 오사채암의 주지를 찾아간다. 암자에는 이십여명의 나이많은 비구니들이 있었다. 주지는 야불이 먼 길을 온 것을 보고, 성의있게 그를 암자로 요청하여 불법을 행하게 한다. 선단은 평탄안에 정박시킨 후, 야불은 여러 제자들과 암자로 가서 잠시 휴식을 취한다.
얼마후, 야불은 암자가 너무 좁다고 느낀다. 이곳에서 오래 머물 수는 없다고 생각하여, 암자의 주지인 정안사태(靜安師太)에게 자신의 바램을 털어놓는다. 정안사태는 그를 이해했고, 천문산사(天門山寺)의 주지에게 보내는 추천서신을 써준다. 야불에게 그녀의 사형에게 가라고 한다. 야불은 감격하여, 정안사태의 서신을 가슴에 품고, 제자를 데리고 배를 타고는 천문산사로 향한다. 며칠 후, 야불의 선단은 영정 경내로 들어간다. 강안에 정박한 후, 오사채암 정안사태의 서신을 가지고 천문사로 간다. 법원(法圓) 방장은 사매의 친필서신을 보고, 다시 야불이 큰 눈에 짙은 눈썹을 가지고 기품이 비범한 것을 보고는 그를 거두기로 결정한다.
야불화상이 데려온 제자가 너무 많아서, 천문산사는 다시 그들을 위하여 새로운 건물을 짓는다. 야불은 천문산사에서 몇년간 승려로 지낸다. 조사전의 편액에 쓰여진 "천문선산(天門仙山)"이라는 네 글자는 그의 글씨라고 전해진다. 지금도 비문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야불은 천문산사에서 매일 '창을 베고 새벽까지 있었으며, 검을 뽑아들고 단에 올랐다. 언젠가는 중원을 회복하고 천하를 평정하고자 했다."
천문산사의 향불이 날로 흥성해졌다. 명성도 날로 퍼져간다. 원래 신분을 숨기고 있던 야불은 점점 그의 행적을 숨기기 어렵게 된다. 하루는 야불이 절에서 결가부좌를 하고 연공하고 있을 때, 문앞에서 한 사람이 싸우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부르며 만나고 싶다고 하면서 문으로 뛰어들려고 한다. 일찌감치 바람소리를 듣고도 행색을 아는 기술을 익힌 야불은 여전히 눈을 감고 운기한다. 그는 보지 않고도 사납게 생긴 사내들이 거칠게 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사내들은 하나같이 몸집이 크고, 단단했다. 그들이 땅위를 걷는 힘만 보더라도 그들이 만만찬은 실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몇몇 제자가 밖에서 막고 있었다. 그러나 막기 힘들겠다고 여겨지자 야불은 몸을 돌려 나간다. 야불은 웃으면서 이들을 쳐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금방 그들은 조용해진다. 우두머리인 사내는 용기를 내서, 청호만월대도를 들고 입을 연다: 네가 야불이냐?" 야불은 살짝 고개를 끄덕인다. 그 사내는 배짱을 되찾고, 야불을 향하여 소리친다: "좋다. 어르신과 형제들이 너를 찾으러 수천리를 왔다. 먼저 술과 고기부터 내놓아라. 우리가 허기를 면한 후에 다시 얘기하자." 야불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건 문제없다. 너희들에게 밥을 준비해주겠다."
말을 마치고 야불은 제자들로 하여금 집안에서 한가마니의 벼를 가지고 나오게 한다. 그리고 자신의 앞에 놓았다. 야불이 두 손에 진기를 모으고, 다섯 손가락을 모으고, 칭칭칭 하며 벼 속을 수십번 오간다. 공중으로 금황색의 꽃비가 휘날리며 졸지에 껍질이 바닥에 가득 깔린다. 광주리에는 하얀 쌀만이 남았다. 곧이어 야불은 두 제자가 낑낑대며 가져온 가마니를 가볍게 들고는 주방으로 갔다.
주방의 앞에는 몇 개의 큰 차나무그루터기가 있다. 차나무그루터기는 아주 단단하여, 평소에는 도끼로 내려쳐야 쪼갤 수 있다. 야불은 한 손에 두 개의 차나무그루터기를 들고 마당으로 간다. 수직으로 눈앞에 세워둔다. 두 손바닥을 휘두르자, 파파팍 소리가 나면서 차나무그루터기는 이미 작은 나무조각으로 바뀌어 땅 위에 쌓였다. 야불이 소매를 휘두르자 나뭇조각이 한켠에 나란히 쌓인다. 다시 한번 휘두르자 몇 개의 자잘한 나뭇조각들이 날아가고, 그 사내들이 하나하나 땅바닥에 무릎꿇는다. 원래 차수나무조각이 그들의 무릎 혈도를 찍은 것이다. 그들이 신발에 숨겨놓았던 비수가 속속 공중으로 날아가서, 마침 그들의 머리 위로 지나가선 기러기가 맞아서 땅으로 떨어진다.
야불은 가볍게 손바닥을 치면서 웃으며 말한다: "출가인들은 고기를 먹지 않는다. 여러분들이 스스로 요리하라." 그들 사내들은 이미 입을 멍하니 벌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모두 머리를 마늘찧는 것처럼 아래위로 움직이며 살려달라고 빈다. 원래 그들은 조정에서 소문을 듣고 야불을 해치도록 보낸 밀정들이었다. 조정은 참초제근을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그들은 야불의 신공에 놀라서 '부인도 잃고 병사도 잃는' 꼴이 된다.
그러나, 형세는 급전직하한다. 농민군은 모조리 와해되고, 청나라조정이 건립된다. 야불은 우울증에 빠진다. 청나라 순치17년(1661년) 사망한다. 자리현의 고봉모암에 장사지낸다. 배에 실어왔던 금은보화는 야불화상이 죽은 후, 행방이 묘연해진다. 전설에 따르면, 야불이 죽기 전에, 가져온 보물을 모조리 천문산에 있는 몇 군데 비밀장소에 숨겼다고 한다. 그리고 독주로 보물을 숨긴 일꾼들을 모조리 독살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확인될 수 없는 이야기이다.
관음산의 출토문화재가 야불이 숨긴 금은보화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거리가 멀지 않은 망산지역에도 틈왕보물의 전설이 전해지고 있으며, 백여년동안 보물츨 찾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3. 짙은 안개에 쌓인 망산틈왕보물
호남남부의 변방에 있는 망산(莽山)에 있는 천당촌(天塘村)은 이백년전의 역사적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오래된 촌락이다. 이 신비한 마을에는 수백년동안 신비로운 비결이 하나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석암충(石巖沖), 삼좌교(三座橋), 만행백보주(慢行百步走), 삼요금(三窯金)" 전해지는 바로는 이 비결에 숨은 비밀을 파해하면, 거액의 부를 가질 수 있다고 한다. 이 부는 바로 명나라말기 농민군 지도자 이자성이 패배한 후, 망산에 가져온 "구려십팔담"의 금은보화이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이 신비한 비결은 무수한 사람들이 보물찾기에 나서도록 만들었다. 1970년대말기, 망산의 보물찾기는 최고조에 달한다. 이 보물을 얻기 위하여, 천당촌의 다섯 장정은 한 바람불고 어두운 밤에 비밀리에 맹세를 한다. 그들은 조상의 신위 앞에서 맹세를 하는데, 누가 먼저 보물을 찾든지 간에 좋은 일도 함께 나누고 슬픈 일도 함께 하기로 한다. 그들은 많은 곳을 파헤친다. 그러나 보물을 발견하지 못한다. 얼마 후, 공포가 다가온다. 보물을 찾아나선 촌민이 병석에 누워 일어나지 못하게 되고, 얼마후에는 세상을 떠난다. 소문에 따르면, 그들은 보물을 지키는 망령의 저주를 받았다고 한다. 촌민이 죽은 후, 공포는 끝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저녁에 전율할 일막을 목격하기도 한다.
촌민중 많은 사람들은 봉두난발을 한 사람의 모습을 보기도 하고, 저녁에 산 위에서 불덩이가 이리저리 오가는 것도 본다. 마치 귀화(鬼火) 같았다. 마을의 어린아이들은 감히 바깥으로 나가지를 못했다. 장발을 한 궤이한 사람모습, 모골이 송연한 무명귀화. 이 모든 것은 마치 무슨 일이 발생할 것을 예시하는 듯했다. 이번 보물찾기에 참가한 촌민들은 불안해진다. 그러나 세심한 촌민들은 발견했다. 마을 뒤의 산 속에 몇 개의 흙무더기가 파헤쳐지고, 곁에는 도기와 자기의 부서진 조각들이 흩어져 있다는 것을.
원래, 마음사람들이 발견한 사람모습은 도굴범이 사람 눈을 속이기 위하여 한 짓이었다. 그러나 기괴한 일은 많은 가치있는 문화재들을 도굴범들이 그냥 버리고 갔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 도굴범들은 도대체 무엇을 찾는단 말인가? 이 일은 금방 천당촌의 담상길(譚相吉) 노인의 주의를 끈다. 그는 도굴범들이 버리고간 문물을 자세히 살펴본 후, 대담한 추측을 내놓는다. 이들 도굴범들은 분명히 전설상의 이자성이 남긴 "구려십팔담" 보물을 찾는 것이다. 망산주변지구의 많은 지명, 예를 들어, 봉천평(奉天坪), 영창촌(永昌村), 미지요(米脂坳), 마안산(馬鞍山)등은 모두 이자성의 봉호 및 그의 고향지명과 관련있다. 그외에, <의장현지>에는 이자성과 관련된 대목이 나온다. "순치6년 정월, 틈적(闖賊, 이자성을 가리킴)의 잔당인 일지호가 패배하여 침주(郴州)을 지난다. 살륙이 아주 참혹했다."
이자성의 군대는 확실히 망산을 온 적이 있다. 그렇다면 이자성 보물의 전설도 성립될 것인가? 만일 성립된다면, 그 전설의 거액보물은 도대체 어느 곳에 묻혀 있을까? 이자성이 망산으로 들어온 노선을 살펴보면서, 망산림구안에서 촌민은 "황장암(皇藏巖)"이라는 이름을 가진 산동(山洞)을 발견한다. 이것은 이자성보물을 푸는 계기가 된다.
촌민들은 이 암동을 발견하는데, 동굴입구는 잘 숨겨져 있다. 동굴안에는 괴이한 돌들이 있고, 푸른 연기가 감싸고 있으며, 차가운 기운이 뿜어져 나온다. 동굴입구의 편평한 곳에, 물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한 삼합토 모래층이 있다. 확실히 이 곳은 사람들이 활동한 적이 있는 곳이다. 황실의 분위기가 넘치는 이 동굴의 이름에 따라, 이자성이 가져온 보물이 이 암동에 묻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세히 발굴해보니 전혀 달랐다. 동전이 약간 나온 외에 더 이상 보물은 나오지 않았다.
설마 이자성이 휴대한 "구려십팔담"의 금은보화전설은 그저 헛소문이란 말인가? 혹은 이 엄청난 보물은 아직도 비밀스러운 장소에 묻혀 있단 말인가? 이때 새로운 발견이 이루어진다. 망산과 80리정도 떨어져 있는 백사우향에서 촌민들은 이틈왕지묘(李闖王之墓)라는 석비를 발견한다. 석비의 높이는 2.5척, 너비는 1척, 두께는 0.5척이다. 비문은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이것은 이자성이 망산에 묻혀 있다는 것을 더욱 증명하게 된다.
이틈왕묘비의 발견은 비록 보물의 발굴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지는 않지만, 사람들은 이것이 아마 전설에서 언급한 보물에 새로운 방향을 알려주는 것이 아닌지 생각한다. 보물이 묻힌 지점이 이자성의 군대가 활동한 망산핵심지역이 아니라, 그와 반대되는 방향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역방향으로 찾아보다가, 마침내 놀라운 발견을 한다. 길가의 산언덕에 인공으로 쌓은 석벽을 발견한다. 자세히 관찰해보니 이것은 간단한 공사가 아니었다. 설마 그 전설상의 보물이 바로 이 석벽의 안에 묻혀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깊은 산의 숲 속에 인적도 드문 곳에 왜 이렇게 거대한 공사를 벌였단 말인가?
일반 백성이라면 이런 공사를 벌일 리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길이가 100여미터에 너비가 10여미터이고 3층이나 된다. 고증을 거쳐, 이 석벽에서 1킬로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원래 거대한 산동이 있었다는 것을 찾아낸다. 이름은 용가동(溶家洞)이다. 용가동은 망산의 뒷면에 있다. 암동은 아주 큰데, 수동(水洞) 하나와 한동(旱洞) 하나가 있다. 이 곳에는 1만명이 숨을 수 있다고 전해진다. 현지 촌민들은 청나라군의 계속된 추격에 이자성군은 막다른 골목에 몰려 이 동굴로 들어가 숨었다고 한다. 그런데, 동굴입구에 벼락이 치는 바람에 용가동의 입구는 매몰되었다고 한다.
이자성이 남겼다는 거액의 보물을 찾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용가동을 발굴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아무도 전설 속의 보물을 찾지는 못했다.
일대영웅 이자성은 마지막에 어디에 묻혔을까? 전설상의 보물은 어디에 묻혔을까? 역사가 남긴 흔적에서 사람들은 계속하여 찾는다. 그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전설의 신비로운 면사를 벗기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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