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감홍류(闞紅柳)
이자성이 석문협산으로 도망가 선승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호남성의 석문현은 풍양이라고 불렀고, 풍주라고보 불리웠다. 청나라 건륭년간의 <풍주지림>에 수록된 풍주지주의 <이자성전>에 따르면, 이자성은 전투에서 패배하고, 홀로 석문의 협산을 지나 승려가 되었으며 법명을 봉천옥화상(奉天玉和尙)으로 했다고 한다. 글에서 가리키는 협산은 협산사이다. 이 절은 석문현이 동쪽 15킬로미터에 있는 삼판교에 위치하는 당나라때의 고찰이다. 즉 처음에 말한 바로 그 곳이다. 절안에는 이와 관련있는 비기탑명(碑記塔銘), 시문잔판(詩文殘板)이 존재하고, 봉천옥화상의 뼈와 궁정옥기를 포함한 여러 유물이 있다. 1980년의 고고발굴때 발견된 여러가지 문물도 있다. 이것들은 이 설의 유력한 증거가 된다.
위의 <이자성전>은 '틈왕(闖王)' 이자성이 출가하였다는 최초의 기록이다. 작자는 일찌기 협산사로 고찰을 가고, 봉천옥화상을 모신 적이 있고, 말투가 섬서인인 70여세으 노화상을 만났다고 한다. 그 화상은 작자에게 말했다. 봉천옥화상은 순치초년에 절로 왔다고 하였고, 화상(畵像)을 꺼냈다. 그림속의 인물은 사서에 기록된 이자성의 모습과 쏙빼닮았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이자성이 스스로 "봉천창의대원수(奉天倡義大元帥)"라고 칭한 바 있다. 나중에 "신순왕(新順王)"으로 칭하기도 했고, "봉천옥(奉天玉)"과 "봉천왕(奉天王)"보다 점 하나가 많다. 봉천옥화상의 묘장에서 골회와 전각 <탑명>이 발견되었다. 묘장에서, 제자인 야불(野拂)이 쓴 비문 및 관련문물을 보면 모두 작자의 글과 일치한다. 이 설을 취하는 사람들은 추측한다. "야불"이 바로 "이과(李過)"라고. 이과는 바로 이자성의 친조카인 이금(李錦)이다. 이를 통하여 증명할 수 있다. 야불이 정성껏 모신 봉천옥화상은 바로 이자성이다. 협산사에서는 봉천옥화상의 <중수협산영천선원공덕비>(강희비)와 <중수협산영천사비단>(도광비) 및 밀장장동의 <지나찬술>, 영회잔판과 야불이 글을 쓴 잔비, 야불의 묘비, 틈왕영패, 임풍장가전세문물, 6매의 "영창통보"구리동전, 7개의 '서안왕' 동마령, 그리고 협산사의 지도지궁밀실에는 석조귀형칙인(石雕龜形勅印)이 발견되었다. 칙은 조와 마찬가지로, 모두 군왕만이 사용할 수 있다. 칙인과 봉천옥조는 마치 봉천옥화상이 바로 이자성 본인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듯하다.
이 설을 취하는 또 다른 근거는 전략추리로서 도출해낸 것이다. 이자성이 스님이 된 것은 형세로 인해서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남명과 합쳐서 항청하려는 것이다. 당시 이자성이 이끄는 대순군의 주요 적군은 이미 더 이상 명조의 세력이 아니다. 기세등등한 청군으로 이미 바뀌었다. 항청은 이미 급선무로 된다. 국내의 다른 무장세력과 연합하는 것이 더욱 중요했다. 당시에 항청을 위하여 연합할 수 있는 것은 당왕 주율건 수하의 호남 하등교(何騰蛟)이다. 그러나 하등교와 담판을 하지만, 하등교는 반드시 부대를 자신이 지휘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하등교는 당왕의 신하이고, 이자성은 황제이다. 이것은 정리상 받아들일 수가 없다. 하물며 이자성은 숭정제를 자결하도록 했는데, 이것을 당왕이 양해해주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자성은 거짓으로 죽은 척하고 은거하는 방법을 택한다. 교묘하게 갈등을 피하고, 황후 고씨와 이과가 나서서 하등교와 연합하게 하고 공동으로 항청하게 한다.
그러나, "도선설(逃禪說, 도망쳐 승려가 되었다는 설)"에 반대하는 학자들은 이 설이 근거없다고 말한다. 봉천옥화상은 비록 확실히 있던 사람이지만, 탑명의 기재에 따르면, 봉천옥은 일찌기 청요(淸要)를 지냈다. 청요가 무엇인가? <조야류요>권2에 따르면, "직만위현(職慢位顯)을 청(淸)이라 하고, 직긴위현(職緊位顯)을 요(要)라 한다. 두 개를 합쳐서 '청요'라 한다." 즉 할 일은 없고 지위는 두드러진 관직을 청직이라 하고, 할일이 중요하고 지위가 두드러진 관직을 요직이라 한다. 그런데, 이자성은 청직이든 요직이든 관련이 없다. 탑명의 작자인 유훤은 명나라의 유신인데 그는 대명조에 충성했다. 어찌 농민지도자 이자성의 공을 기리는 글을 쓰겠는가. 이것은 이해할 수 없다. 하물며 1982년 겨울 호남 자리현에서 새로 발견된 <야불묘비>에 따르면, "오랫동안 권세가와 태감을 미워하여....도적을 몰아내고....중원을 회복하기를 기대했다."는 등의 문구가 있다. 이것은 야불이 환관의 명나라관리를 미워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야불이 봉천옥화상을 조심스럽게 모셨다는 것을 보면, 그들의 관계는 밀접하다. 동시에 봉천옥은 아마도 명왕조의 유신일 것이다. 어떤 기록에 따르면, 봉천옥은 바로 순치연간에 사천에서 석문현 협산사로 온 운유화상이며 그가 처음 협산으로 왔을 때 고찰이 황폐한 것을 보고 그는 앞장서서 탁발하여 지원을 구걸했고, 사묘를 수복했다고 한다. 만일 이자성이 도망쳐서 은거한 것이라면 어찌 이렇게 자신을 드러낼 수 있겠는가. 기밀을 유지할 줄 모르고..
기실 사월하순, 대순군의 주력은 강서 구강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청군에 다시 한번 추격당한다. 혼전을 거친 후 청군은 대순군의 본영을 공격해 들어간다. 여후 유종민, 군사 송헌책, 이자성의 두 숙부(조후, 양남후) 및 일련의 장수들의 가족이 포로로 잡힌다. 이 돌연한 사건은 대순군장병의 사기를 꺽어버린다. 청군은 이미 구강일대까지 추적하였으므로, 대순군이 동쪽으로 도망치는 길은 아마도 장강하류에서 저지되었을 것이다. 이때 청군의 동로는 예왕 도도의 부대가 하남귀덕부, 안휘사주를 취하고 남경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수시로 부대를 돌려 대순군을 포위할 수도 있었다. 이자성은 민감하게 이를 알아차렸고, 전략을 바꾸어 머리를 돌려 강서북부를 가로질러 호남으로 들어가려고 준비한다. 그래서 도중에 호북 통산현과 강서 녕주(지금의 수수현)의 경계지에 있는 구궁산 아래에 이르렀을 때, 이자성 본인에게 사고가 발생한다. 이 일막은 분명 경심동백할 광경이었을 것이다. 명,청 양측의 문서에 모두 기록이 있다. 남명의 오성총독 하등교는 융무원년에 쓴 <역틈복주소>에서 이자성이 호북 통산현 구궁산에서 사망했다고 적었다: 그리고 몇달 후 그는 이자성의 부장을 받아들여 지휘하게 된다. 그는 대순군 장수 및 사병의 입에서 이자성의 희생당한 경위를 충분히 들었을 수 있다.
청군에서 이자성 추격을 책임지고 있던 아지거도 청나라조정에 이자성의 죽음을 보고한다. 그는 대순군이 구강지역에서 패배한 후, 남은 힘을 다하여 구궁산으로 숨어들었다. 그들은 산에서 수색하였는데 이자성을 찾지 못했다. 투항한 병졸과 체포된 대순군사병은 모두 말하기를 이자성이 도주할 때 초민들이 포위하여 도망칠 수 없어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그래서 이자성을 아는 사람을 보내어 시신을 확인시켰지만, 시신이 썩어서 확인할 수가 없었다. 이자성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계속 조사해야할 사항이 된 것이다. 아지거의 보고서는 주요 내용(시간, 장소 및 희생경과)는 하등교의 보고와 일치한다. 그의 소식도 당시 원래 대순군의 병졸에게 들은 것이기 때문에 상당한 정확성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청나라초기의 사학자인 비밀이 쓴 <황서>에서 이자성의 희생경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대청은 이자성을 호광까지 추격한다. 이자성은 적병 삼만명을 여전히 보유하고 있었고, 지휘하고 있었다. 흥국주가 강서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자성은 친히 십팔기를 이끌고 통산현에서 구궁산 즉 강서경계를 넘었다. 산에 사는 주민은 도적이 왔다는 말을 듣고, 모두 산으로 올라가서 돌을 던진다. 그렇게 하여 18기를 때려서 흩어지게 한다. 이자성은 혼나서 소월산 우척령에 이르렀다. 거기서 큰 비를 만난다. 이자성은 말을 끌고 언덕을 넘었다. 산에 사는 주민 정구백이라는 자가 내려와서 이자성과 맨몸으로 싸웠다. 둘은 진흙밭에 같이 굴렀다. 이자성은 정구백이 엉덩이를 깔고 앉아 칼을 뽑아 그를 죽이고자 했다. 칼에 피가 묻었고 진흙 속에 있어서 칼을 뽑을 수가 없었다. 정구백은 급히 구조를 청하고, 조카인 김씨성의 인물이 삽으로 이자성을 죽인다. 그가 이자성인줄은 몰랐다. 무창은 이미 대청총독이 통치하고 있었다. 이자성을 따른 18기중 무청으로 가서 자수한 자가 현으로 찾으러 오나 정구백은 감히 나서서 인정하지 않는다. 현관이 친히 산으로 들어가서 죽인 자가 도적 이자성이니 큰 공을 세운 것이라고 하였다. 정구백이 그제서야 총독을 만나러 가고, 정구백은 덕안부경력이 된다."
비밀의 이 기재는 아주 상세하다. 글에서 우척령은 확실히 현지의 지명이다. 정구백도 존재하는 사람이다. 강희4년 <통산현지>에 그의 소전이 있다: "정구백, 육도 사람, 순치2년 오월 틈적(이자성) 만여명이 현에 이르다. 유린소살이 극심하여 백성들이 평안히 살 수가 없었다. 구백은 무리를 모아서, 적의 우두머리를 소원구에서 포위하여 죽이낟." 다시 <덕안부지>를 찾아보면 "국조경력"에 제1인이 바로 "진구백(陳九伯), 통산 사람. 순치2년 부임". 성명이 약간 잘못되었지만, 정구백이 확실히 청나라정부의 상을 받았음은 알 수 있다.
이상에 열거한 사료에 따르면, 기본적으로 이자성이 이미 죽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청나라조정이나 남명조정이나 당시에 이자성이 죽었다는 것을 의심했을까?
기실 도르곤이 아지거로부터 이자성이 구궁산에서 죽었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는 믿었다. 그는 일찌기 정중하게 이를 천지,태묘에 제사지내고 국내외에 고했다. 지방관리들도 속속 글을 올려 경하했다. 그러나, 아지거가 회군하는 도중에 대순군이 강서에 다시 나타났다는 정보를 얻는다. 아지거는 이자성의 수급을 취하지 못하였기 대문에, 도르곤은 이로 인하여 이자성이 죽었다는 말을 믿기 어렵다고 여긴다. 칠월 이십일, 그는 사람을 보내어 경성으로 들어온 아지거를 크게 질책한다. 왜냐하면 이자성의 희생이후 그가 직접 통솔하는 그 대순군 주력군이 확실히 강서 영주, 서창일대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명청문헌의 '틈적'이라는 단어는 이자성 본인을 가리키기도 하고, 이자성의 농민군을 가리키기도 한다. 대순군은 강서에서 나타났으므로, 이자성이 강서에 숨었다는 얘기가 전해지는 것은 이상할 것도 없다. 그래서 소위 '이자성의 생사는 실질적인 증거가 없다'는 말이 나온 것이다. 실질적 증거는 기실 이자성의 수급을 말한다. 청나라조정이 이자성의 수급을 끝까지 얻지 못하므로, 의문을 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청나라조정의 상황과 유사하게, 이자성이 죽었다는 소식은 남명의 융무조정에도 파란을 일으킨다. 하등교가 이자성이 죽었음을 보고한 후, 남명의 융무제 주율건은 "크게 기뻐하며, 동각대학사 겸 병부상서를 내리고 정흥백에 봉하며, 여전히 군대를 지휘하게 했다" 비록 하등교는 이자성이 구궁산 단련의 손에 죽었다는 소식을 직접 이자성의 부하들로부터 들었고, 그중에는 심지어 이자성이 희생될 때 곁에 있었던 양자 장내(張鼐)까지 포함되어 있었으므로 당연히 믿을만한 소식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하등교도 이자성의 수급을 바치지 못했기 때문에, 융무조정의 내부에는 여전히 의문을 품는 사람들이 많았다. 우부도어사 곽유경은 상소를 올려 이자성이 구궁산에서 오월에 죽었다는 것은 모두 소문일 뿐이며 7월에 그의 부하가 하등교에 투항하였을 때 비로소 알았다는 것이며, 다시 해를 넘겨 보고한 것이다. 이럼에도 큰 상을 내리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하물며 이자성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누구의 손에 죽었는지도 모르고 있다. 만일 어느 날인가 이자성을 죽인 사람이 이자성의 수급을 들고 나타나면, 하등교는 어떻게 해명할 것인가. 그리고 만일 이자성이 죽지 않았다면, 이후 어느 곳에선가 나타난다면, 그때 황상은 또 어떻게 할 것인가. 이렇게 말하자, 주율건도 의심이 들기 시작한다. 하등교에게 다시 보고하라고 한다. 그후 다시 이 첩보를 선포하겠다고 한다. 하등교는 제2차 보고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자성이 죽은 것은 확실히 실제 증거가 있다. 이자성의 수급은 찾을 수가 없다. 삼가 사실대로 보고한다."
이렇게 하여, 명청 쌍방은 각각 이자성이 죽었다는 확실한 소식은 듣지만, 서로 다른 정도로 의심을 한다. 그 근본원인은 바로 아무도 이자성의 유체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확정할 수가 없었다.
이자성의 수급은 왜 피차 쌍방의 손에 들어가지 못했을까? 원인은 아주 간단하다. 남명에 있어서 대순군이 이자성의 유체를 안장한 후 강서와 호남으로 들어갔다. 통산현은 이미 청군의 세력범위에 속했다. 하등교는 당시에 호남 장사에 있었고, 사람을 청나라군이 통제하는 곳까지 보내어 이자성의 유체를 발굴하게 할 수는 없었다. 다음으로, 하등교는 오성군무총독이지만, 실력은 약했다. 그저 대순군 장수가 스스로 찾아와서 연합항청전선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일시에 병력이 십여만으로 늘었다." 설사 군대를 통산현으로 진입시킨다고 하더라도, 하등교는 실력이 자신의 적계부대보다 강한 대순군 잔여군을 분노할 일을 할 수는 없었다. 이자성의 유체를 파내어 효시를 할 수는 없었다. 이런 이치는 아주 명백하다. 그러나 그는 보고서에서 이를 명확히 언급할 수는 없었다. 그저 모호한 단어로 갈 수가 없기 때문에 그의 수급을 가져올 수 없다고 말한다.
아지거가 이자성의 수급을 취하지 못한 원인은 개략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났다는 것에 연유한다. 음력오월이후 남방의 날씨는 아주 덥다. '시신이 썩어서 확인할 수 없었다'는 것이 가능하다. 위에서 인용한 강희대의 <통산현지>는 대순군이 지도자의 희생후 현지의 지주무장세력에 보복성 타격을 가하여 수천명을 죽였다고 되어 있다. 청나라정부가 이자성의 죽음을 확실하게 안 것은 순치2년(1645년) 칠월 십오일 강서호광등 팔성총독 퉁양화가 부임한 이후이다. "무창으로 와서 자수한 사람이 현으로 가서" 비로소 이자성을 살해한 정구백을 찾는다. 아지거가 청나라조정에 보고할 때는 이 단서를 찾지 못하였다. 그가 현지에 보내어 검사한 사람은 수천구의 썩은 시신들 속에서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다.
결론적으로 "틈왕" 이자성은 중국역사상 천고에 보기 드문 전설적인 영웅이다. 그는 대규모의 농민전쟁을 일으키고 장기간 견지했다. 그리고 한때 흥성했던 명왕조를 무너뜨린다. 다만 그는 관외의 신흥세력인 북방소수민족 만주족이 건립한 청나라조정에 패배한다. 실수도 좋고 천성적인 결함도 좋다. 당시와 이후에 이루어진 이자성의 난 및 이자성의 난과 관련된 역사사료를 없애버림으모서 우리는 오늘날 이자성의 일생중 많은 문제에 관하여 이미 충분히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자성이 실패한 후, 마지막 최후에 관한 의문은 지금도 진상을 확인하기 어렵다. 비록 각자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있지만, 여러 기록과 전설은 아직도 더 확인되고 발견되어야 한다.
이자성은 여러 세력의 다툼가운데 명나라로서나 청나라로서나 그는 죽어야할 사람이다. 그래야 자신의 황제에게 보고할 거리가 생기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각자의 주군에게 대순은 이미 끝났고 반란은 진압되었다는 것을 보고할 수가 없다. 그러나, 바로 이런 상황하에서, 그는 여전히 죽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명청양측이 보낸 대군은 모두 주군에게 이를 급히 보고하고자 했고, 이자성의 군대를 없앤 것은 가장 큰 전적이었다. 그리고 이자성이 동산재기하지 못했다는 것은 그가 이미 죽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았다. 이렇게 하여 이자성은 출가할 기회가 생기는 것이다. 사실상 출가만이 정리에 부합한다. 기실 피살도 좋고, 출가도 좋고, 이자성은 일개 평민출신으로, 반명의 기치를 들고, 북경으로 들어가 황제에 올랐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탄복할만하다. 아쉽게도 그는 겨우 14일간 황제로 있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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