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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이자성)

이자성 행방의 수수께끼.

by 중은우시 2018. 6. 26.

글: 역사변연(歷史邊緣)


이자성은 섬서(陝西) 미지(米脂) 사람이다. 그의 집안은 아주 가난했고, 역졸(驛卒)을 지낸 바 있고 변방의 병사로도 있었다. 나중에 그는 농민반란군에 참가하여 명나라에 대항한다. 그리고 반란군의 우두머리가 된다. 그때 명나라는 이미 정치가 부패하고, 경제가 붕괴되어 위태로운 지경이었다. 반란군은 파죽지세로 결국 명왕조를 무너뜨리고 대순(大順)왕조를 세운다. 그러나 산해관을 지키던 명나라장수 오삼계(吳三桂)가 청나라군대를 산해관 안으로 끌어들이고, 틈왕 이자성은 부득이 병력을 이끌고 북경에서 물러난다. 하남, 섬서, 호북등지에서 전투를 벌이지만, 그 후의 일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비록 일대의 영웅이었지만, 최후가 어떠했는지는 후인들이 그저 추측할 뿐이고, 의론이 분분하다. 어떤 사람은 그가 피살당했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은거했다고 한다.


우선 이자성이 구궁산(九宮山)에서 사망했다는 설이 있다. <명사>의 결론이 이러하다: "이자성은 이미 죽었다. 시체가 썩어서 알아볼 수 없었다." 근거는 바로 당시 청나라의 정원대장군 아지거(阿濟格)이 이자성을 추격했는데, 그가 조정에 올린 보고서에 이렇게 썼기 때문이다. 이자성의 병력을 이미 몰살당해 겨우 20여명의 심복을 데리고 구궁산 안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촌민들에게 둘러싸여 도망칠 수 없게 되자 목을 매어 자결했다. 이지거가 사람을 보내어 검시했을 때는 시체가 이미 썩어서 알아볼 수가 없었다.


또 다른 근거는 하등교(何騰蛟)의 보고이다. 그는 남명왕조 호남주둔장수이자 병부상서이다. 그가 당왕(唐王)에 올린 보고서에서 그의 부하가 이미 구궁산에서 이자성을 참수했는데, 수급을 잃어버렸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사망설은 믿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이자성은 용맹하기 그지없었고, 웅재대력의 인물이다. 그때까지 관청의 사적(死敵)이다. 남명왕조와 청왕조통치자의 마음 속에 큰 우환거리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그의 생사는 아주 중요한 사건이다. 아지거의 보고에서 "시신이 썩어서 알아볼 수가 없다"고 했는데, 분명히 사실이 아닐 것이다. 하등교의 보고서는 그저 거짓으로 전공을 인정받으려는 것일 뿐일 것이다. 이것들은 모두 소문이고 정말 그런 일이 있었을 수는 없다.


그리고 또 한가지 언급해야할 것은 호남으로 물러날 때, 이자성의 수하는 여전히 40여만명이었다. 최소한 수만명은 구궁산 일대에 있었다. 그가 겨우 20명의 심복을 데리고 있었다는 것은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하물며 만일 이자성이 정말 피살되었다면, 그의 수십만대군이 어찌 그냥 가만히 있었을 것인가. 구궁산이 어찌 그렇게 조용할 수 있었을까? 그러나 실제로 그 수십만 대군은 당시에 아주 조용했고, 구궁산도 아주 조용했다. 이것은 이자성이 죽지 않았다는 반증이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왜 사망설이 나온 것일까? 그리고 사망설이 민간에 널리 유포되었을까? 이것은 아마도 이자성과 그의 부하들이 고의로 장안법(障眼法)을 쓴 것일 것이다. 즉 완병지계(緩兵之計)인 것이다. 이자성이 이미 죽었다고 소문을 냄으로써 한편으로 남명왕조의 반란군에 대한 경계심을 완화시키고, 다른 한편으로, 청왕조의 경계심도 느슨하게 만든다. 그러다가 시기가 성숙되면, 반란군은 동산재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은거설'도 있다. 이자성이 협산사(夾山寺)에 은거했다는 것이다.


청나라초기, 장경백(張瓊伯)이 운남동지(雲南同知)로 부임하려고 가는 도중에, 석문의 협산사를 들르게 된다. 절안의 방장(方丈)과 담고론금(談古論今)하는데 말이 잘 통해서 지기로 생각한다. 그가 몇년 후에 다시 협산사를 방문하는데, 절안의 방장은 이미 죽었다. 그를 추모할 때, 방장의 제자가 그에게 말해준다. 그 방장이 바로 천하를 떨게 만들었던 틈왕 이자성이라고. 구궁산에서는 그의 부하인 손씨가 대신 죽었다고.


풍주지주(澧州知州) 하씨가 건륭초기 친하 협산사로 가서 이자성의 행방을 조사한다. 그는 절안에서 친히 이자성의 화상(畵像)을 목격한다. '봉천옥화상(奉天玉和尙)'이라고 쓰여 있었다.


청나라말기이래, 석문등지에서 단비(斷碑), 시사(詩詞), 출토문물이 나오는데, 이자성의 흔적을 찾는 사람들은 이자성과 관련된 흔적들을 발견한다. 예를 들어, "황치융마성락우구천(況値戎馬星落雨舊天)", "금안옥등마여룡(金鞍玉鐙馬如龍)", "서청삼공화정유(徐聽三公話政猷), 자문도이수천지중흥(子門徒已數千指中興)"...이런 것들은 모두 화상의 말투나 심경이 아니라. 오히려 장군출신 제왕의 마음과 목소리이다


석문 협산사 안에, 1981년 봉천옥화상묘가 발견된다. 자단(瓷壇)에 담긴 유골은 이자성의 몸매와 비슷했다. 묘안의 부장품은 이자성의 고향인 섬서 미지현의 습속과 같았다. 저명한 학자이자 역사학자인 곽말약(郭沫若) 선생도 이자성이 협산사에 은거했다는 주장을 부인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견해에 대해 사람들의 의견은 서로 다르다. 봉천옥화상의 무덤을 발견한 것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단지 석문 협산사에 봉천옥화상이라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만 증명할 뿐이라고 말한다. 어찌 봉천옥화상이 바로 이자성이겠는가.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왼쪽눈에 화살을 맞아 부상을 입어 실명한 이자성화상은 절안의 화상처럼 두 눈이 형형할 수는 없다고 한다. 그래서 봉천옥화상은 이자성이 아니라고 본다.


어떤 사람은 고증을 통하여, 석문 협산사는 오래되고 낡은 옛절을 수리한 것이라고 한다. 상당한 규모를 갖추고, 향화객이 끊이지 않는 절이다. 이렇게 된 것은 봉천옥화상이 불문에 귀의하면서 그 동안 쌓아두었던 자금은 모조리 수리하는데 썼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현지 사람들도 절의 건설에 지원을 했다. 대세가 이미 기운 이자성은 관청의 추격을 받으면서 어찌 이렇게 드러내놓고, 얼굴을 드러내서 절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이자성이 협산사에 은거했다는 것은 그래서 정설이 되지 못하고 있다.


그외에 이자성이 검양(黔陽) 나공산(羅公山)에서 죽었다든지, 진주(辰州) 구궁산에서 죽었다든지, 광서 협산(峽山)에서 죽었다든지, 평양(平陽)에서 죽었다든지 하는 설도 있고, 그외에도 많은 설이 있다. 도대체 어느 것이 진짜인지에 대하여 결론을 내리기는 정말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