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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분석/중국역사의 분석

역사상 현무문(玄武門)에서 사건이 가장 많이 일어난 이유는...?

by 중은우시 2018. 2. 28.

글: 고건중국(古建中國)


오늘 소개할 내용은 중국역사상 사고빈도가 가장 높은 성문이다. 아주 많은 인물들이 여기서 쓰러졌다. 이 성문은 바로 현무문(玄武門)이라 부른다.


먼저, 우리는 왜 현무문이라고 부르는지를 알아야 한다. 중국은 동청룡, 서백호, 남주작, 북현무를 숭상했다. 대응하는 황궁의 문도 이렇게 부르게 된 것이다.


황궁은 원래 좌북조남(坐北朝南)한다. 즉 앞이 남문이고 뒤가 북문이다.



당나라황궁의 남문은 주작문(朱雀門)이다. 앞에는 곧게 뻗은 대도가 있는데 주작가(朱雀街)이다.


그 후면의 북문을 얘기하기 전에 먼저 좌문과 우문을 얘기해보자. 좌문은 이치대로라면 청룡문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용은 황제의 토템이고 상징이다. 청룡문이라고 부르는 것은 금기를 어기는 것이다 그래서 그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다. 당시 과거에 합격하면 방을 붙이는데 일반적으로 좌문에 붙였다. 그 뜻은 어약용문(魚躍龍門)이라는 의미이다. 오른쪽은 백호이니 백호문이라고 불러야할텐데, 백호는 형살(刑殺)을 의미했다. 그래서 직접 그렇게 부르는 것은 불길하다. 그래서 그렇게 명명하지 않는다. 다만 사형범은 일반적으로 이 문으로 나간다.


좋다. 현무문으로 돌아오자. 현무문은 북문이고 후문이다. 바로 황제 후화원(後花園)의 문이다.


황제가 낮에는 조정에서 근무한다. 황제에 가까운 문은 주작문이다. 그 뒤는 태극문 등등일 것이다. 이곳은 경비가 매우 삼엄하다. 일반적으로 별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황제를 죽이려고 하더라도, 대전으로 뛰어 들어가서 죽이는 일은 드물 것이다.


궁중정변은 일반적으로 업무가 끝난 후의 시간에 발생한다. 조회를 마친 황제는 후원에 거주한다. 뒤쪽이 북문으로 진입하는 것이 가장 가깝다. 이곳도 황제의 안위와 관련되므로 중요하게 지키는 곳이다.


저명한 이세민의 현무문사변을 예로 들어보자. 이세민은 이건성과 서로 싸우고, 밀고했다. 한편은 다른 편이 야심이 있다고 했고, 한편은 다른 편이 후궁과 관계가 애매하다고 했다. 이연은 골치가 아파서 다음 날 너희들이 와서 회의를 해서 일을 확실하게 알아보자고 한다.


장소는 바로 후화원 안에 있는 소전(小殿)이다. 당연히 현무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가장 가깝다.


이세민은 원래 이건성의 편이던 현무문의 수비장수를 매수한다. 아마도 여기에도 무간도가 펼쳐졌던 것같다. 그리고 현무문에 복병을 숨기고, 아침에 회의에 참석하러 온 이건성과 이원길을 죽여버린다.


역사상, 여러번의 현무문사변이 있다. 당나라에면 3건이 있다. 당중종시대, 황제가 황후 위씨를 신임하고, 태자 이중준은 위후 소생이 아니었다. 이중준은 자신이 제거될 것이 두려워 거병하여 황궁을 포위공격한다.


그의 수법은 조상 이세민처럼 깔끔하지 못했다. 직접 황궁으로 쳐들어가지 않고, 먼저 위후일당인 무삼사(武三思)의 저택부터 쳐들어간다. 무삼사를 죽인 다음에, 다시 황궁으로 갔다. 그러나 위후는 이미 황제를 데리고 현무문에 올라가 있었다. 현무문은 황궁의 가장 중요한 문이므로 아주 견고하다. 


이중준의 병마가 뚫고 들어가지 못한다. 게다가 당중종이 위에서 소리를 지르자, 병사들은 바로 도망친다. 이렇게 하여 이중준은 거사에 실패하고 죽임을 당한다.


이것은 바로 현무문을 장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시 4년이 흐른 다음에, 다시 한번 현무문사변이 일어난다. 이번에 거병한 인물은 이융기이다. 이융지는 총명하고 과감했다. 가장 중요한 것이 현무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왜냐하면 이곳은 위치가 중요할 뿐아니라, 부근에는 황궁금위군의 우림군이 주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융기의 첫번째 조치는 바로 현무문으로 쳐들어가는 것이었다. 이렇게 현무문을 장악한 다음에 위씨를 죽이고 우림군을 장악한다. 이렇게 현무문을 차지해서 천하를 얻은 것이다.


당연히 이 현무문은 이세민의 그 현무문과 같은 문이 아니다. 이세민의 현무문은 태극궁의 북문이고, 뒤의 두 건의 현무문은 대명궁의 북문이다. 


역사상 현무문으로 진입하지 않은 사례도 있는가? 있다. 예를 들어, 명나라의 황제 주기진(朱祁鎭)이 복위한 정변이다. 주기진은 와라(瓦剌)를 정벌하려다가 토목보의 변으로 포로가 된다. 나중에 귀국하지만 황제에 다시 오르지는 못한다. 그의 동생인 주기옥(朱祁鈺)이 이미 황제에 앉아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남궁(南宮)에 유폐된다.


8년후, 주기옥이 중병에 걸리고, 공을 세워서 부귀영화를 꿈꾸던 대신들은 다시 주기진을 황제로 모셔온다. 이것이 '탈문지변(奪門之變)'이다. 그


그렇다면 이 탈문지변의 문은 어느 문일까?


먼저 주기진을 연금한 남궁의 궁문이다. 당시에 이 문은 잠겨 있었다. 열쇠구멍도 납으로 막아놓았다. 그래서 대신들은 아예 문을 부숴버린다. 


이 남궁은 홍경궁(洪慶宮)이다 자금성의 동남쪽에 있었는데, 나중에 이자성이 불질러 버린다.


두번째 문은 자금성의 문이다. 그런데 이때의 문은 현무문이 아니라 동화문(東華門)이다.


왜 현무문으로 가지 않았을까?


왜냐하면 이들 대신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주기진을 봉천전(奉天殿)으로 모셔가서 등극시키고, 백관의 조배(朝拜)를 받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황제 주기옥은 이미 병이 깊어서, 모두 그를 이미 죽은 사람으로 여기고 있었다. 죽이든 말든 의미가 크지 않았다. 그리고 현무문은 많은 병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이들 대신이 데리고 간 것은 모두 가노(家奴)들로 기껏해야 천명이 넘지 않았다. 그리고 모두 싸움을 잘하는 자들도 아니었다. 만일 직접 현무문을 뚫고 들어가려고 하면 아마도 황궁의 금위군과 직접 충돌할 수도 있다. 그러면 그 결과는 상상하기 어렵다. 그래서 그들은 총명하게 현무문이라는 통상적인 문을 피하고, 동화문으로 간 것이다. 이 문은 평소에 대신과 태자가 드나드는 문이다.


간 다음에 문을 열 수 없자. 주기진이 한 마디 한다. "나는 태상황이다." 그러자 문이 바로 열린다.


그래서 이번 탈문행동은 다른 정변과는 달랐다. 문제는 누구를 용상에 앉히느냐에 있었지, 누구를 죽이느냐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가까운 동화문으로 들어가고, 현무문을 택하지 않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