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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분석/중국역사의 분석

문인들이 기록한 중국역사는 믿지 말라

by 중은우시 2018. 2. 8.

글: 항립강(項立剛)


어떤 친구가 말하기를 중국에는 장인정신이 없고 과학정신이 없다고 한다. 정말 그러한가? 갑자기 전날 식사하면서 친구와 역사문화에 대하여 얘기하면서 적벽대전을 얘기한 것이 생각났다.


적벽대전의 총사령관은 누구인가? 주유이다. 제갈량은 어떤 사람인가? 군사이다. 병력과 장수를 움직이는 것은 총사령관이 결정하는 일이고, 군사는 그저 아이디어를 낼 뿐이다. 사서를 보면, 적벽대전은 제갈량이 싸운 것같다. 주유에 대해서는 별 말이 없다. 왜 그럴까? 그것은 역사를 문인이 썼기 때문이다. 중국의 역사를 보면 아주 강렬한 특징이 있다. 즉 막료(幕僚)로 일하는 한 무리의 문인이 있다. 일반적으로 이미지는 상당히 긍정적이다. 많은 공적을 그들에게 돌린다. 그리고 진정 의사결정을 내린 총사령관은 자주 '용재(庸才, 평범한 인물)'로 묘사된다. 사실은 도대체 어떠할까? 우리가 알 수는 없다. 다만 문인이 쓴 역사는 자연스럽게 문인을 더욱 좋게 묘사한다. 이것은 모두 알고 있는 바이다.


다시 돌아가서 중국에 장인정신이 없고, 과학정신이 없다는 것에 대하여 중국의 사서를 보면, 사회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명인이라는 사람들이 바로 그러하다. 중국역사에서 주로 기록한 것은 권력변동과 살인이다. 이 방면의 영향을 끼친 사건과 사람은 반드시 기록했다. 전해져 내려오는 사람들 중에서 우리는 작가, 시인의 이름은 많이 들어봤지만 과학자, 발명가와 장인은 거의 들어보지 못했다. 황도파(黃道婆), 심괄(沈括), 필승(畢昇), 장형(張衡)등 소수의 사람들 뿐이다. 그들의 명성은 시인, 작가와는 비교할 수조차 없다.


다만, 중국고대에 정말로 과학자나 과학발명이 부족했는가? 중국은 과학발명이 적엇던 것이 아니다. 다만 중국의 문인들이 권력귀족의 변화와 문인묵객에 대하여는 기록하면서, 붓을 들어 과학자, 발명가와 장인에 대하여 써주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중국은 세계에서 최초로 청동기를 주조한 국가이다. 춘추전국시대에 중국은 가장 선진적인 야금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발명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모른다. 문인들이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국인은 음력이라는 달력을 만들었다. 이것은 천년동안 농경생활을 지도해왔다. 이 천문연구수준은 당시로서는 세계일류였다. 우리는 누가 이 위대한 역법을 발명하고 편제했는지 알지 못한다. 문인들이 사서에 기록해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국인은 전국시대부터 강력한 전차를 가졌다. 이들은 각종 야금기술이 필요하고, 각종 도구제작이 필요하다. 그래야 강력한 전차를 만들 수가 있다. 이에 대한 사서의 기록은 없다. 누가 이런 중요한 것들을 발명했는지도 모른다. 문인들이 이 분야를 기록하는데는 흥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중국인은 최초로 두부를 발명한다. 이는 식품화학과 공예에서 혁명적인 발명이다. 이 위대한 발명은 오늘날에까지도 중국인의 음식, 건강과 문화에 영향을 미친다. 발명인이 누구인지도 모른다. 역사에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은 각양각색의 도자기를 만들었다. 많은 뛰어난 작품도 있다. 도기제작과 자기제작의 기술은 천년을 이어왔다. 많은 뛰어난 장인들도 배출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들 장인의 이름을 모른다. 심지어 일부 뛰어난 작품에 관(款)이 있지만, 중국의 문인은 그들을 기록하는데 정력을 낭비하지 않았다.


많은 중국농민들이 벼, 보리와 여러 야채를 재배하였다. 그리고 대표적인 돼지, 소, 양의 품종도 개량했다. 양식수준도 장기간동안 세계에서 최선진적이었다. 그러나 중국문인은 이에 대하여 기록하는데 흥미가 없었다.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먼저 차를 마신 국가이다. 여러 차의 품종도 있다. 그러나 문인들이 이런 여러 품종의 차의 발명자를 기록해놓지 않았다.


중국의 건축수준은 오랫동안 세계일류였다. 진시황의 아방궁이건 명나라때의 고궁이건, 아니면 정원건축이건, 모두 오랫동안 세계건축의 최고수준을 보여주었다. 다만 우리는 이들 건축가, 설계사의 이름도 알지 못한다. 우리는 건축과정에서 장부(사개)와 같은 창의적인 공법을 발명했지만 문인들은 누가 발명했는지 기록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언절구 한 수나 연애시 한편보다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중국의 조선기술은 오랫동안 세계의 최고수준이었다. 삼국시대에 이미 각종 전선이 나타나고, 정화하서양때는 당시 세계최대의 함대를 데려간다. 배의 배수량, 구조는 원양항해까지 가능한 수준이었다. 우리는 이들 배를 누가 만들었는지, 누가 설계했는지 알지 못한다. 문인에 있어서 이것보다는 문인이 여자를 안은 이야기가 더 중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정화하서양을 얘기하자면 조선외에 천문학, 항해학등 아주 여러 분야의 학문이 관련된다. 그래야 정화가 떠날 수 있고 돌아올 수 있다. 이런 것들에 대하여 기본적으로 전혀 기록이 없다.


중국인들은 일찌감치 자신의 방직기술이 있었다. 마, 면같은 방직재료를 사용하였을 뿐아니라, 비단과 같은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인 기술도 가지고 있었다. 비단이 방직, 인염(印染)은 오랫동안 세계방직기술의 최고봉을 자랑했다. 이것도 문인들이 기록해놓지 않았다.


사례를 열거하자면 끝도 없다. 중국에 장인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공법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더더구나 발명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오랫동안 중국의 과학기술수준은 전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이었다. 다만 중국문인은 이것들이 문인이 여자를 안은 한 수의 시보다 중요하지 않다고 보았다. 그래서 아무도 기록해놓지 않고 연구하지 않은 것이다. 오늘날에도 우리의 교과서, 사회분위기는 과학기술, 발명의 성취를 소개하고 추천하고, 이에 공헌을 세운 사람을 추천하는 경우가 드물다. 대신 문인에 대하여는 인색하지 않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수십명 수백명의 작가, 시인은 기억하고, 수백명의 황제와 관리는 기억하지만, 보통사람들에게 중국과학기술에 공헌을 한 사람을 열명만 얘기하라고 해도 어려워할 것이다.


중국인에게 과학기술의 공헌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그저 문인들이 그들을 잊어버렸을 뿐이다. 문인들은 술을 마시고, 여자를 안고, 시를 읊는 것이 인류의 생활방식에 영향을 미친 위대한 발명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중국은 과학기술이 부족하지도 않았고, 발명이 부족하지도 않았고, 장인이 부족하지도 않았찌만, 중국은 이들 발명과 과학기술을 기록할 사학자는 부족했다. 그리고 그런 발명을 치켜세워주는 분위기도 부족했다.


그래서 중국은 과학정신도 있고, 발명정신도 있고, 장인정신도 있지만, 문인들이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