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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분석/중국역사의 분석

삭번(削藩), 조반(造反), 그리고 성세(盛世)

by 중은우시 2019. 3. 20.

글: 육기(陸棄)


중국역사상 두번의 황제의 삭번, 번왕 조반의 전쟁이 있었다. 다만, 전쟁의 결과는 완전히 달랐다. 서한(西漢)왕조의 한경제(漢景帝)의 삭번때는 칠왕지란(七王之亂)을 진압함으로써 끝나고, '문경지치(文景之治)'의 한경제 시대를 이어갔다. 대명왕조의 건문제(建文帝)의 삭번때는 건문제가 쫓겨나고, 반란을 일으킨 번왕 주체(朱棣)가 황제의 자리에 오름으로써 끄이 나고, '영락성세(永樂盛世)'의 명성조시대를 개창한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모두 성세였다. 그러나 황제는 달랐다. 전자는 황제가 여전히 계속 황제로 있었고, 후자는 번왕이 황제가 되어 성세를 이끌었다. 두 조대의 서로 다른 극단적인 결과가 나온 것은 도대체 무슨 이유때문일까?


1. 한경제의 통치수단은 건문제보다 훨씬 뛰어났다.


같은 황제이지만, 한경제는 건문제보다 훨씬 고명했다. 한경제는 '문경지치'를 이끈 황제로서, 웅재대략이라 할 수 있다. 서한의 황제 중에서 한경제 유계(劉啓)는 중요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유계는 쉽게 상대할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가 태자로 있을 때, 바둑을 두다가 싸우게 도자 바둑판을 내리쳐서 오왕(吳王) 유비(劉濞)의 아들 유현(劉賢)을 죽여버린 바 있다. 바둑으로 승부를 겨루다가 결국 사람목숨까지 빼앗은 것이다. 그가 황제에 오른 후에도 역시 수단이 독랄했다. 조착(晁錯)은 충신이고, 그에게 삭번을 건의했었다. 그러나 그는 반란을 평정시키기 위하여, 반란을 일으킨 번왕들의 요구에 따라 조착을 요참(腰斬)해 버린다. 이렇게 악독한 점에서는 그의 할아버지 유방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 이 점에서 보자면, 건문제는 한경제보다 훨씬 연약하다. 그의 숙부인 주체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는 주체에게 악독한 수단을 쓰지 못하고, 전방의 병사들에게 황숙을 죽이지 말라고 명령하여, 나중에 화해할 수 있도록 하는 길을 열어두고자 했다. 그러나, 주체는 조카 황제를 반드시 제거하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유계의 통치는 건문제보다 고명했다. 그는 절약하고 검소했으며, 대형 토목공사를 벌이지 않았다; 그는 농업을 중시하고 상업을 억제했고, 농사와 양잠을 장려했다. 양식으로 술을 빚는 것을 금지했으며, 조를 말에게 먹이는 것도 금지한다. 세금과 요역을 가볍게 해주어서 백성들이 편안히 살게 해준다. 그는 무위이치(無爲以治)의 통치책략을 실행하여 국력을 크게 끌어올리고, '문경지치'의 태평성대를 맞이한다. 반란에 대하여는 국가통치를 위하여 과감하게 결단을 내렸다. 조착을 죽이는 것에서나, 주아부(周亞夫)를 보내어 반란을 평정하는 것에서나 우유부단한 면이 없었다. 이 면에서 건문제는 그렇지 못했다. 제왕의 뛰어난 자질을 보여주지 못했다.


건문제는 서생황제였다. 그는 세 사람의 대유(大儒)를 스승으로 모신다. 만일 학문으로 따지자면, 건문제가 기용한 황자징(黃子澄), 제태(齊泰)와 방효유(方孝孺)를 따를 사람이 없다. 그러나 병법작전을 따지자면, 이 세 사람은 모두 탁상공론식의 인물들이다. 수재가 병사를 이끌면 어떻게 슬이를 만들어낼 것인가? 그래서 건문제의 '건문신정(建文新政)'은 한경제의 '문경지치'와 같은 반열에서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건문제의 치국경험과 반란평정수단은 한경제와 한 단계이상의 차이가 있었다.


2. 주체의 영명웅무(英明雄武)는 유비보다 훨씬 뛰어났다.


같은 반란인데, 서한왕조의 유비의 그것과 대명왕조 주체의 그것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었다. 유비는 비록 마상왕야(馬上王爺)이고, 일찌기 진나라말기에 유방을 도와 천하를 차지하는데 큰 공을 세우긴 했지만, 주체와 비교하면 차이가 컸다. 유비가 반란을 일으킬 때, 겉으로 보기에는 7왕의 반란이고, 기세가 대단했지만, 이 7명의 왕들은 단결하지 못했다. 유비도 통일적으로 7왕를 지휘할 권위와 능력이 없었다. 그래서 소위 7왕의 난중에서 진정 반란을 일으키기로 굳게 마음먹은 것은 유비 뿐이었다. 나머지 각 왕은 모두 간풍사타(看風使舵)의 인물들이다. 그래서 반란군간의 협력이 부족했다. 유비도 합리적인 건의를 잘 들어주는 명주(明主)가 아니었다. 그는 전녹백(田祿伯)의 병력을 나누자는 건의와 환(桓)장군의 직접 쳐들어가자는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아, 기병(奇兵)작전의 기회를 잃어버린다. 그리하여 주아부가 쉽게 그의 식량조달루트를 차단할 수 있게 했고, 결국 진퇴양난의 위기에 몰려 결국은 패배하고 피살된다.


그러나, 주체는 주원장의 모든 아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황자였다. 오랫동안 몽골인들과 싸웠고, 두번이나 병력을 이끌고 북정한다. 그리고 몽골의 내아불화(乃兒不花)의 항복을 받아내고, 북원(北元)의 대장 삭림첩목아(索林帖木兒)를 생포했으며, 풍부한 전투경험이 있었다. 비록 북평(北平, 지금의 북경)의 성 하나만을 가지고 있지만, 그의 군대는 명나라군대중에서 가장 정예부대였다. 군사력은 여러 번왕들 중에서 가장 뛰어났다고 할 수 있다. 


그뿐만이 아니라, 주체는 사마의(司馬懿)같은 은인교활(隱忍狡猾)한 성격까지 갖추고 있었다. 병을 핑계로 건문제를 속이고, 몰래 병마를 끌어모은다. 그의 뜻은 황제의 자리를 노리는 것이었다. 주체가 반란을 일으키자, 북방의 여러 장수들은 그의 옛 부하들이었고, 그리하여 그에게 투항해 오는 자들이 많았다. 이는 주체의 성공조건이다. 주체의 군대는 한병(漢兵)만이 아니라, 정예 몽골철기도 있었다. 그는 당시의 '흑의승상(黑衣丞相)' 요광효(姚廣孝)를 중용했다. 요광효는 당시 유백온(劉伯溫)에 비견되는 지혜로운 인물이었다. 같은 번왕이지만, 주체가 유비보다 우세한 것은 아주 많았다.


3. 인재를 많이 갖추고 있는 점에서, 한경제는 건문제보다 뛰어났다.


병력을 얘기하자면, 한경제와 건문제의 군대수량은 별 차이가 없었다. 심지어 건문제의 군대수량이 한경제보다 많다고 할 수 있다. 어쨌든 한경제가 상대해야하는 것은 칠왕의 난이고, 건문제가 상대해야 하는 것은 단지 한 왕의 난이었다. 다만 이 두 황제가 직면한 역사적 환경이 서로 달랐다. 한문제가 한경제에게 남겨준 것은 충분히 안정된 강산의 인재들이었다. 예를 들어, 주아부는 한문제가 한경제에게 남겨준 우수한 인재이다. 한경제는 또한 일련의 인재들을 배양한다. 주아부, 두영(竇嬰), 난포(欒布), 역기(酈寄), 유무(劉武), 장우(張羽), 한안국(韓安國)등. 나중에 모두 칠왕지란을 평정하는 대공신이 된다. 특히 주아부는 한문제가 한경제에게 극력 당부한 인재이다. 바로 칠왕지란의 위급한 시기에 크게 써먹게 된다.


한경제와 비교하면, 주원장이 살아 있을 때, 자손의 천추만대를 위하여, 호유용(胡惟庸)사건과 남옥(藍玉)사건을 이용하여, 신하들을 대거 죽여버린다. 명나라의 거의 모든 개국명장들이 죽임을 당한다. 그는 아마도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 자신의 가장 우수한 넷째아들 주체일 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건문제는 황숙의 반란에 직면하여, 쓸만한 장수가 없었다. 그가 조정에서 중용한 것은 탁상공론에 능한 유생들이었다. 황급한 가운데 전투에 내보낸 경병문(耿炳文)은 수비에 능한 장수였다. 주체, 요광효와 비교하면 적수가 되지 못했다. 그들을 만나자 대패하고 만다. 경병문을 이어서 장수로 기용된 인물은 이경륭(李景隆)이다. 그는 더더욱 환고자제(紈絝子弟)였다. 비록 명장의 후손이기는 하지만, 일찌감치 부친의 기풍은 잃었다. 건문제의 군대는 비록 인원이 많았지만, 주체처럼 소수정예는 아니었다. 그래서 전쟁의 승부는 주체로 기울게 되고, 결국 건문제는 온 나라의 병력을 끌어모았지만, 주체의 한 성의 병력을 당해내지 못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