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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청 초기)

아오바이(鰲拜)(3): 권력의 정점에 오르다.

by 중은우시 2018. 2. 27.

글: 기련해(紀連海)


소년강희와 성년아오바이간에는 약간의 문제가 발생한다. 이들 문제는 아오바이의 원인도 있을 것이고, 강희제의 원인도 있을 것이다. 강희제의 원인은 여기서 잠시 분석을 하지 않도록 한다. 여기서는 그저 아오바이측의 원인만을 분석해보도록 한다: 문제는 왜 4대 이성대신의 보정 국면이 나타났느냐는 것이다. 주로 순치제와 그의 모친인 효장황태후가 역사의 경험과 교훈에서 나온 것이다. 주로 교훈은 바로 도르곤섭정의 교훈이다. 4대신보정이라는 체제를 통해서만이 도르곤섭정이라는 체제와 비교했을 떄 4대신보정체제의 장점이 드러난다. 이 문제를 가볍게 보아서는 안된다. 바로 이 문제에 있어서 아오바이가 잘못을 범했기 때문이다. 보정대신의 권한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강희제와 그의 할머니인 효장황태후는 예전 섭정왕 도르곤이 황권에 큰 위협이 되었다는 것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보정체제와 섭정체재를 비교하면 3가지 방면의 장점이 있다. 첫째, 양자의 지위가 다르다. 전혀 다르다. 이전에 나타난 섭정왕은 대청왕조의 섭정왕은 도르곤이다. 그는 황제와의 관계가 아주 가깝다. 모두 황실의 종친이다. 그리고 섭정왕은 황제의 손윗사람이다. 그리고 이 손윗사람은 자신이 황제에 오를 수도 있었는데, 그리고 자신의 가족이 팔기중 두 기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권세가 컸다. 청나라 이외에 이전의 역대왕조에서 나타난 것을 봐도 모두 이런 국면이다. 섭정왕의 지위는 아주 강하다. 심지어 당시 양황기의 대신도 도르곤에게 아부해야 했다. 보정대신은 전혀 다르다. 아무리 전공이 혁혁하더라도, 그는 어쨌든 신하이다. 그들과 태후, 황제의 사이에는 정상적인 군신의 구분이외에, 따 다른 의미가 있다. 즉 주인과 종의 관계라는 것이다. 설사 군신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너희 두 기는 내 것이다. 너는 원래 나의 종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사대신이 공개적으로 승인하였듯이 효장황태후와 강희제는 그들의 여주인과 어린주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두번째 문제가 파생된다. 양자와 황제의 이해관계이다.


섭정왕은 자신의 기를 가지고 있다. 자신의 힘이 있다. 그들은 더 많은 역량 더 많은 정력을 자신의 세력을 키우는데 쓴다. 조정에도 관심을 가지고, 대국에도 관심을 가지지만 전부의 정력을 투입하는 것은 아니다. 보정대신은 다르다. 우리가 앞에서 말한 것처럼, 군신이면서 주종이다. 그들은 알고 있다. 그들과 황제와의 관계는 일영구영(一榮俱榮), 일손구손(一損俱損)의 관계라는 것을. 만일 황제가 양황기에서 나오지 않았다면 그들이 보정할 차례가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그들의 지위도 없었을 것이다. 황위를 지켜내지 않으면 그들의 모든 것도 따라서 사라진다. 그래서 비록 그들이 이성신하이지만, 충성심의 정도를 본다면 섭정왕보다 훨씬 강하게 된다.  


셋째는 직권이다. 보정, 섭정 두 글자는 완전히 다르다. 섭(攝)은 '대리'의 뜻이다. '섭정'은 임금을 대신하여 정무를 본다는 것이다. 황권을 대행하는 것이다. 섭정왕은 자신의 뜻으로 국가대사를 관리할 수 있고, 황제 혹은 태후에게 보고하고 비준받을 필요가 없다. 섭정왕 시기의 소위 황제의 성지는 기본적으로 모두 섭정왕 본인의 뜻을 반영한다. 황제나 태후와는 관계가 없다. 그러나 보정대신은 다르다. 그렇다면, 그들의 직권은 단지 보좌, 보조, 협조의 뜻이다. 그리고 이 협조는 개인의 전권을 방지하기 위해서 4명간에 이런 묵계가 이루어졌다. 그것은 무엇인가? 이 네 명은 여하한 상황하에서도 1사람이라도 빠지면 황제나 황태후를 알현하지 않는다. 가려면 4명이 함께 가고, 가지 않으려면 모두 가지 않는다. 4명은 상삼기(上三旗)에서 나왔다. 그래서 그들 간에도 모순이 있고, 의견일치를 이루기가 쉽지는 않다. 다시 함께 황상을 만나게 되니 그들간에 상호제약이 이루어지고, 효과적으로 전권국면이 발생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사대신보정체제는 섭정왕체제와 비교하여, 더욱 황태후와 황제의 뜻에 맞는 제도이다.


그렇다면 먼저, 우리는 소니에 대하여 얘기해보자. 소니는 앞에서 소개한 바 있다. 그는 1600년에 태어났다. 그는 일생동안 4명의 황제를 모신다. 청태조 누르하치, 청태종 홍타이시, 순치제 푸린, 그리고 강희제 쉔예, 그는 일생동안 이 네 명의 황제를 모셨다. 그는 대청의 개국공신이라 할 만하다. 소니라는 사람은 태조 누르하치 시기에 계속 누르하치 수하의 일등시위였다. 그 당시 젊은 그는 전투에 참가한 바 있는데, 누르하치가 그를 좋게 보아서, 자신의 조카딸 즉 동생 슈르하치(舒爾哈赤)의 딸과 결혼시킨다. 홍타이시가 즉위한 이후인 1631년, 소니는 공을 세워 이부(吏部)의 계심랑(啓心郞)이 된다. 이 관명은 들어본 적이 없지 않은가? 홍타이시는 재미있는 사람이다. 그가 칸의 지위를 승계한 후, 명나라의 육부를 본떠서 육부를 둔다. 그도 이,호,예,병,형,공의 육부를 둔 것이다. 그럼 이 육부에 사람을 몇 명이나 두었는가. 모두 이렇게 몇 명이 일을 했다. 하나는 바로 장관이다 명나라에서는 상서(尙書)라고 불렸다. 다만 청나라에서는 상서라고 부르지 않았다. 총리부무(總理部務)라고 부르며 패륵을 보내서 맡게 했다. 총리부무는 이렇게 1명이다. 그 아래에 4명이 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차관인데, 승정(承政)이라고 불렀다. 두명은 만주인, 1명은 몽골인, 1명은 한인이다. 그리고, 그 아래에 8명의 공무원이 있다. 참정(參政)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총리부무와 동급의 관직을 하나 두었다. 바로 계심랑이다. 관직은 삼품이다. 계심랑의 직책은 바로 간언하는 것이다. 각부를 관장하는 패륵이 무슨 부당한 행위를 저지르면 그를 교육하고 일깨워주어서 나라를 위하여 충성스럽게 일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직책은 이부상서를 감독하고 교육을 책임지는 역할이다. 소니는 어떤 사람에게 어떤 장점이 있고, 어떤 사람에게 어떤 결점이 있고, 어떤 사람에게 무슨 약점이 있는지 모두 알고 있었다. 그는 총명재지는 여기서 발휘된다.


그래서 하오거를 옹립하는 문제에서, 그의 주요직책은 바로 총명재지이다. 바로 <청세조실록>에 기록된 바와 같이 순치제가 즉위한 후, 이때의 소니는 족지다모(足智多謀)했다. 대사를 상의하는데 소니보다 뛰어난 자가 없었다. 모든 군국대사는 그가 뛰어다니며 아이디어를 냈고, 그가 얘기하는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강희제가 즉위하기 전에, 순치제는 소니에게 사대보정대신중 우두머리가 되도록 명한다. 왜 그랬을까? 금방 얘기한 것처럼 세 가지가 있다: 하나. 소니가 사대보정대신의 으뜸이 된 것은 그의 재모때문이다. 그의 공로때문은 아니다. 공로로 따지면 그는 아오바이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바꾸어 말해서, 당시의 명망으로 보더라도 그는 아오바이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 아오바이는 온몸이 상처로 뒤덥히면서 공을 세웠다. 아오바이는 전쟁터에서 목숨을 걸고 얻은 공로이다.


둘, 그는 나이가 아오바이보다 많았다. 1661년때, 그는 만61세이다. 그때의 60여세는 완전히 노인이다. 그래서 역사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소니는 늙어서 병이 많았다고 


셋, 그는 사대보정대신중의 수커사하를 아주 좋아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는 자연히 아오바이를 지지하게 된다. 이것이  소니이다.


그렇다면 둘째인물은 누구인가? 바로 수커사하이다. 수커사하는 바로 소니가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다. 수커사하를 얘기하자면 그의 신분은 소니보다 고귀하다. 왜 그런가? 소니의 처가 누구인가? 바로 누르하치의 조카딸이다. 수커사하의 부친인 수나(蘇納)의 처는 누구인가? 바로 누르하치의 여섯째 딸이다. 혈연관계로 보더라도 소니보다 가깝다. 다만 소니의 배분이 수커사하보다 하나 높을 뿐이다.


그러나, 수커사하가 순치나 강희와의 관계가 더 가깝지만 그가 순치제의 환심을 산 것은 이런 혈연관계 때문이 아니다. 무엇때문인가? 매주구영(賣主求榮)했기 때문이다. 수커사하는 계속하여 정백기(正白旗)였다. 바꾸어 말하면, 정백기의 우두머리는 누구였는가? 바로 도르곤이다. 수커사하는 계속하여 도르곤의 부하였다. 그뿐아니라, 그는 원래 도르곤 수하의 가장 가까운 심복이었다. 그런데 도르곤이 죽은 후, 수커사하는 발견한다. 세상이 바뀐 것이다. 그래서 바로 순치제의 앞으로 달려와서, 이것저것 고발한다. 적극적으로 도르곤의 문제를 까발린다. 그렇게 하여 순치제의 환심을 산 것이다.


다만, 눈이 밝은 사람에게는 다 보이는 법이다. 도르곤이 너에게 각박하게 대하지 않았는데, 너는 이렇게 낙정하석하는가. 내일은 네가 또 어떤 짓을 할 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그는 당시의 이 사대보정대신 중에서 인맥이 가장 없는 편이었다.


셋째는 어비롱이다. 기실 어비롱의 신분은 수커사하와 아오바이의 중간에 끼어 있다. 그들 두 사람 모두와 닮았다. 그가 수커사하와 닮았다는 것은 그를 무시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의 부친은 어이두(額亦都)이고, 그의 모친은 누르하치의 딸이다. 이 신분과 혈연관계로 보자면 그의 신분은 수커사하와 같다. 다만, 어이두가 어떤 사람인가. 어이두는 아오바이의 백부와 나란히 이름을 날린 인물이다. 즉, 누르하치 수하의 개국오대신(開國五大臣) 중 하나이다. 그래서 이 점에서 보자는 그는 아오바이와 가깝다. 그러나, 비록 어비롱이 명장의 후예이지만, 관계에서 그는 비교적 늦게 두각을 나타낸다. 그에게는 부친의 모습을 찾아볼 수 ㅇ벗엇다. 그래서 그는 셋째로 밀린 것이다. 그 본인은 주관이 없고, 생각이 없었다. 자주 같은 명문의 후손인 아오바이의 의견을 따랐다. 그는 왜 수커사하와 함께하지 않았는가? 하물며 그는 아오바이보다 어렷다. 그래서 아마도 나이가 비슷한 아오바이와 어울리고 자기보다 10살이상 많은 소니를 따르지 않은 것이다. 


양황기와 양백기의 갈등이외에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대외적으로 그들의 처지는 기본적으로 같았다. 그래서 쉽게 우리는 아래와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아오바이의 의견은 쉽게 나머지 세 사람의 의견을 대표했다. 이렇게 하여 1661년부터 1669년까지의 아오바이 보정시기가 도래한다. 


만일 영원히 이렇게 갈 수 있었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의 국면이 왜 팔년이나 유지될 수 있었을까? 이 팔년은 가장 힘든 팔년이었다. 대청왕조는 낙관할 수 없었다. 사대신에게 있어서도, 황제에게 있어서도, 황태후에 있어서도 모두 아주 비관적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알고 있었다. 힘을 합쳐야먄 난관을 같이 넘길 수 있다. 그래야 대청왕조가 존재할 수 있다. 대청왕조가 존재해야 그들에게 아름다운 미래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알고 있다. 실제로 순치제가 아들 강희제에게 넘겨준 것은 엉망진창인 나라였다. 거기에는 시급히 처리해야할 일들이 많았다. 


가장 주요한 문제는 첫째, 잔존저항세력이다. 이들 저항세력은 주로 아래의 몇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분은 중국운남, 귀주와 버마지구에 있는 남명 영력(永歷)정권과 장헌충의 대서정권 잔존세력이다. 제2부분은 중국의 가장 유명한 장강삼협지구에 있는 이자성의 대순군 잔존세력이다. 이들은 기동십삼가(夔東十三家)라고 불리웠다. 제3부분, 복건지구에서 대만을 수복하려고 준비하는 정성공(鄭成功)이다. 문제가 더욱 심각한 것은 이 3갈래의 항청역량이 연합항청의 국면을 형성하는 것이다. 남명 영력정권은 장헌충의 대서정권 잔존세력의 우두머리인 손가망(孫可望)의 권력욕을 존중하여, 그 혼자서 언제든지 남명의 모든 군대와 그 자신의 군대를 지휘하도록 권한을 넘겨준 것이다. 그리고 그를 주(主)로 칭하게 하였다. 남명 연력정권은 황제가 있다. 그가 주인이다. 그러면 도대체 주(主)가 높은지 제(帝)가 높은지도 불분명하다. 충분한 존중과 충분한 권력으로 이자성의 대순정권 잔여세력인 기동십삼가도 완전히 손가망의 지휘를 받게 된다. 정성공도 남명 영력정권에 복종하겠다고 선언하다. 생각해보라. 그들이 장악한 것은 중국남방의 대부분 영토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 세 갈래의 항청정권만이 아니라. 3명의 저명한 사상가인 황종희(黃宗羲), 고염무(顧炎武), 왕부지(王夫之)는 한족 지주계층과 지식인을 대표하는데, 투항하지 않고 고국을 그리워하며 청왕조와 협력하는 것을 거절했다. 이 몇몇 지식인들을 가볍게 봐서는 안된다. 그들의 영향력은 위의 군사역량에 못지 않았다. 그들은 수천수만의 사람을 동원하여 반항하게 할 수 있었다. 이것이 첫재이다. 


둘째, 제정러시아의 동북지역에 대한 침략이다. 역대 중국의 중앙정권은 동북지방에 기구를 설치하였다. 대청왕조만 얘기하자면, 청나라 만주인은 동북에서 일어났고, 1644년 청군이 입관한 이후 이곳에 성경장경을 설치해서 전체 동북지구를 관할했다. 1653년, 다시 오늘의 요녕, 길림이외의 기타지구에 영고탑(寧古塔) 건군할구를 설치한다. 역사상 영고탑 앙방장경 할구, 즉 영고탑장군의 관할지역이다. 흑룡강, 송화강, 우수리강에서 사할린섬을 포함한 광대한 지역을 관할했고, 니부추(네르친스크(의 광대한 지구도 있었다. 그러나 명청교체기에 제정러시아가 밀려온다.


모스크바라는 마을은 1147년에 형성된다. 1146년이전에 역사상 모스크바라는 마을이 없었다. 1147년에 모스크바라는 마을이 형성되고, 1480년에 모스크바공국이 출현한다. 당시 모스크바대공국은 수백평방킬로미터는 보유했다. 1582년, 제정러시아 모스크바대공국은 이미 제정러시아아가 된다. 제정러시아는 우랄산맥을 넘어 아시아영토로 진입한다. 1632년, 제정러시아는 야쿠츠크성을 건립한다. 이렇게 하여 중국과 러시아는 국경을 맞대게 된다. 1643년, 제정러시아는 명청이 교전하는 틈을 타서, 대군을 동북지역으로 보내어 영토를 잠식한다. 이리하여 중국과 러시아간의 영토분쟁이 시작된다. 당연히 이번에 그들의 침략은 실패한다. 용맹한 달한이(達翰爾)족이 그들을 몰아냈다. 다만 1650년, 제정러시아는 다시 흑룡강지역을 침입한다. 현지 인민들이 2년간 완강히 저항했지만 막아내지 못한다. 제정러시아는 계속 밀고 들어왔다. 1654년에는 바이칼호수 동쪽지역을 점령하고, 니부추 주위의 백만평방킬로미터의 영토를 점령한다. 그후에 제정러시아는 더욱 속도를 냈고, 청군과 여러번 전투를 벌인다. 쌍방은 서로 손상이 있었다. 강희제가 즉위한 후, 제정러시아는 흑룡강 전역을 점령한다. 이곳은 만주족이 탄생한 곳이다. 서남과 동북이 모두 시끄러운데 정부는 돈이 없었다.


셋째, 재정이 심각하게 곤란했다. 명말청초 수십년에 이르는 할거전란으로 1627년 섬서의 왕이(王二)의 농민반란으로 농민전쟁이 서막이 열렸고, 1661년 강희제가 즉위할 때까지 전후로 34년간 계속 시끄러웠다. 만일 우리가 1618년 누르하치가 칠대신과 맹세한 때로부터 명나라와 결렬하여 정식교전을 시작한 때로부터 1661년 강희제가 즉위할 때까지의 전후로 43년간 장기간의 전란으로 경제가 피폐해지고 백성의 생활은 도탄에 빠진다. 정부의 세수는 제대로 걷히지 않았다. 정부의 세수를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는 아주 심각한 문제였다.


넷째, 부패한 관료사회. 명청교체기에 청군이 대거 들어오면서 도르곤은 어떤 상황에 부닥쳤을까? 많은 명나라의 정부관리들이 속속 투항해 올 때, 섭정왕 도르곤은 이렇게 결정하다. 신속히 전국강산을 빼앗아오기 위하여, 그리고 정권을 신속히 안정시키기 위하여, 이런 조치를 취한다. 투항해오는 장수와 투항해오는 관리는 원래의 관직을 그대로 부여한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대명왕조가 왜 멸망하였는가?  바로 이런 관리들 때문에 망한 것이다. 부정부패가 기승을 부렸다. 그 결과 그들은 망한 것이다. 그런데 관리를 원직에 그대로 두었다. 원래 만주에서 들어온 군대는 무엇이 부정부패인지도 몰랐다. 그런데 이들 한족관리들이 가르치기 시작한다. 이렇게 이렇게 하면 이 돈이 네 개인의 것이 된다. 황제에게는 이렇게 이렇게 말하면 된다. 섭정왕을 이렇게 속이면 된다.


그래서, 중국강산을 막 빼앗은 대청왕조는 증증일상(蒸蒸日上)의 분위기가 형성되지 못하고, 오히려 동북에서 온 만주관리들까지 신속히 부패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그 과정에서 당쟁도 끊이지 ㅇ낳았다. 이 모든 것은 대청왕조에 치명적인 위협이었다.


우리가 앞에서 얘기한 바와 같이 예친왕 도르곤이 입관한 이후,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육대폐병, 즉 6가지 잘못된 정책을 취한ㄴ다. 이 6가지 잘못된 정책은 권지령(圈地令), 체발령(剃髮令), 금관령(禁關令), 도성령(屠城令), 투충법(投沖法), 도인법(逃人法)이다. 이 6가지 잘못된 정책으로 여러 한족은 큰 고통을 겪는다. 그리하여 중원지구 인민들의 불만이 널리 퍼진다. 만일 위의 문제가 효과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면, 반드시 새로 건립된 청왕조의 통치가 불안정해지고 심지어 언제든지 실패하고 멸망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하에서 역사가 강희제에게, 아오바이에게 준 임무는 아주 어렵고 컸다. 강희초기에 이렇게 곤란한 국면에서 보정사대신간에는 보정사대신과 황제간에는 어떻게 갈등이 일어났을까? 그들은 알고 있다. 우리는 반드시 힘을 합쳐야 한다. 만일 대청왕조의 통치가 공고히 되지 못하면, 아름다운 내일은 없을 것이다.


다만, 문제는 여기에 있다. 일단 위기가 지나가면, 그들간의 모순이 바로 드러날 것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보정사대신의 사이에, 보정사대신과 강희제 및 효장태후와의 사이에, 그들은 도대체 어떤 모순이 있었을까? 그런 모순은 어떻게 생겨나고 어떻게 발전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