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기련해(紀連海)
위에서 위리는 강희제가 등극한 이후, 4대신보정의 국면이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사대신이 강희제를 보좌할 때, 상황은 그다지 낙관적이지 않았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오히려 비관적이었다. 이런 곤란한 상황하에서, 보정하는 사대신간에 보정사대신과 황제,황태후간에는 매우 유쾌하게 지냈다. 즉 그들은 한동안 아주 잘 협력했다.
보정을 시작하자, 아오바이등은 선제의 유명을 받든다는 것을 기치로 내걸고, 아래와 같은 세 가지 정책을 집행한다: 하나. 적극적으로 관료사회를 정돈한다. 아오바이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업무효율과 업무능력을 높인다. 둘, 관료사회의 악습을 제거한다. <청세조실록>에 따르면 행정효율을 높이기 위하여, 1660년, 강희제는 모든 관리들이 상소를 올릴 때 반드시 소이정(少而精)하도록 요구한다. 쓸데없는 말을 늘여서 쓰면서 실질적인 내용이 없도록 하지 말라고 한다. 명나라때는 상소에 천자를 넘지 못하게 했는데, 이들은 삼백자를 넘지 못하게 한다. 그 범위내에서 일의 내용을 명확히 기술하라는 것이다. 3백자를 넘기면 일을 제대로 못한다고 판단하여 좌천시키겠다고 한다. 이뿐 아니라, 그는 비복을 할 때 반드시 어떻게 하라고 하면서 기한까지 정해주었다. 그 기한내에 일을 완료하지 못하면 일을 제대로 못한 것이니 처벌을 한다. 관료사회의 악습을 철폐하기 위하여, 그는 1666년초에 다시 뇌물을 받은 지방관리를 엄히 처벌하겠다고 한다. 그는 말만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했다. 1667년의 1년에만 그는 563명의 관리를 부정,부패,혹리연로, 질명,능력부족,경박등을 이유로 관직박탈한다. 그외에 3,489개의 직위를 없애고 다시 설치하지 않는다. 이런 관직을 없애면 그만큼 돈을 아낄 수 있다. 둘. 생산을 발전시키는데 노력한다. 아오바이는 잘 알고 있었다. 농사가 백성의 근본이라는 것을 농업이 통치의 근본이라는 것을. 그래서 보정대신을 맡은 후에 일련의 조치를 취하여 경제를 발전시킨다. 그중 가장 중요한 조치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개간을 장려하는 것이다. 개간을 장려하는 조치는 아주 많았다. 그중 대표적인 것은 바로 '호광전사천"이다. 명말청도, 장헌충의 대서정권과 청왕조가 사천에서 전투를 벌였다. 쌍방 모두에게 책임이 있지만 어쨌든 사천의 사람이 많이 줄었다. 그래서 네가 누구이건 관리이건 백성이건, 사천성 사람이건 외지성 사람이건 30가를 불러서 사천에 안착시키기만 하면 공로를 인정해준다. 60가를 데려가면 두개의 공로를 인정해주고, 100가를 데려가면 직접 관리로 승진시켜준다. 원래 일반백성이지만 이제 관리가 되는 것이다. 원래 관리였으면 바로 승진을 시켜준다. 만일 200가를 데려가면 다시 승진을 시킨다. 이렇게 하여 사천은 다시 사람으로 꽉차게 된다. 다음은 갱명전(更名田)을 실시한다. 무엇이 갱명전인가. 토지의 주인을 바꾸는 것이다. 원래 이 땅이 누구의 것인가. 명나라 번왕의 것이다. 그러면 1669년 봄에 아오바이가 명을 내린다. 명나라의 원래 번왕의 토지는 지금 누가 농사를 지으면 바로 그 땅은 그의 소유이다. 너에게 지계(地契)를 주고 이 땅은 영원히 너의 집안의 것이다. 땅이 번왕의 것이 아니라 주인이 없는데, 네가 개간하면 그 땅도 너의 것이다. 너의 것이 될 뿐아니라 세금도 면제해준다. 3년 5년은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 이런 갱명전이 전국에 얼마나 될 것인가? 모두 20여만경이다. 당시 전국경작지의 20분의 1이다.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본다. 셋. 군사행동을 줄인다. 아오바이는 일생동안 전투에 참가했고, '바투루'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전쟁은 무저동이다. 전쟁은 절제되어야 한다. 그래서 아오바이는 1662년 남명 영력정권을 소멸시키고, 남명 영력황제를 죽인 후, 즉시 선포한다. 이후는 휴식을 취하라고.
금방 이런 아름다운 시절이 지나간다. 아오바이와 강희제의 사이에 아오바이와 4대보정대신의 사이에 모순이 점점 나타나기 시작한다. 모순이 시작된 것은 또 다른 측면이었다. 즉, 강희제가 점점 자라서 청년이 된다. 그렇게 되면서 쌍방의 모순은 아주 많아진다. 처음 나타나는 모순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만주통치자가 선진문화를 배워야하느냐 말아야 하느냐이다. 여기서 말하는 선진문화는 기실 두 가지 층면이 있다. 하나는 중원의 선진문화이고 다른 하나는 서방의 선진문화이다. 청군이 입관한 후에 처음에는 두 소년천자가 있었고, 그들은 중원문화, 서방문화를 아주 숭배한다. 그들은 이 문화가 박대정심하다고 보고 단순히 숭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깊이 연구한다. 그리하여 심득을 얻는다. 그들은 알게 된다. 한 나라, 한 정권이 오래 가려면, 반드시 이민족이 선진문화를 흡수하여야 한다. 한나라 한 민족이 문을 걸어닫고 스스로를 지키기만 해서는 안된다. 다만 그의 이런 사상을 아오바이가 이해했을까? 효장황태후가 이해했을까? 1661년, 아오바이를 위시한 사대보정대신의 보정이 시작된다. 그들은 한편으로 한족 지주계층과 지식인들에게 고압적인 정책을 취했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나쁜 것은 지식인들이다. 수많은 백성들은 그들의 말을 듣고 반란에 참가하는 것이다. 한편 지식인은 살륙한다. 다른 한편으로 중국에서 생활한지 오래된 외국선교사들을 향한다. 보정을 시작하자마자, 아오바이는 선언한다. 조상의 법도를 따르겠고, 옛 법을 복구시키겠다. 이것이 선제의 유명이다. 그리고 순치제의 유조를 수정하여, 순치제가 점점 한족의 습속에 빠져들고 만주관리를 불신한 것등 14개의 죄상을 자책하는 것으로 만든다. 이런 아오바이등이 보정대신이 된 후에 가장 먼처 취한 조치는 바로 '수숭만주(首崇滿州)'이다. 기실 수숭만주는 아오바이의 생각이 아니다. 아오바이는 무인이고 그런 것까지 생각해내지 못한다. 이 생각이 처음 나온 것은 효장황태후를 비롯한 만주, 몽골의 구세력이다. 효장황태후가 아들 순치제가 하루하루 중원문화에 심취하는 것을 보면서, 그녀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고,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아들을 미워했다. 아들과 말도 하지 않고 말을 하면 말싸움이 되었다. 아오바이는 자주 그들 둘이 싸우는 것을 말렸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팔이 안으로 굽는다. 순치제가 죽기 전에 사람이 죽을 때는 좋은 말을 한다. 어쩔 수 없이 인정한다. 됐다. 다 내 잘못이다. 순치제가 죽은 후, 일찌기 십년동안 효장태후는 자신의 아들의 능묘에 가보지도 않는다. 누가 권해도 듣지 않았다. 이를 보면 쌍방의 의견대립이 아주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효장황태후를 위시한 수구세력은 그런 상황하에서 중원의 것을 배우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효장황태후는 중원문화에 대하여 모조리 배척하는 태도를 취한다. 그러나 아오바이는 보정대신으로서 이런 수숭만주 정책의 적극적인 집행자였다. 그는 주도적으로 실행한다. 생각해보라 당시의 만주인들이 모두 몇 명이나 되는가? 수숭을 어떻게 할 것인가? 예를 들어 순치연간에 그리고 아오바이의 보정기간에 지방의 총독중에서 만주,몽골관리는 거의 없었다. 모두 한군팔기의 사람들이 80%를 점했다. 소위 한군팔기는 입관전에 만주에 투항한 한족군인이다. 한군팔기라고 부른다. 입관이후에 투항한 한족은 한인이다. 한인이 20%를 점한다. 순무 중에는 한군팔기가 50%, 한인이 50%를 점한다. 만주, 몽골인은 없었다. 부, 주, 현의 각급관리에서는 만주, 몽골인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수숭만주를 하는 것은 너무나 어렵고, 할 방법이 없었다.
어떻게 해야 수숭만주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비교적 어려운 문제이다. 그래서, 만일 정말 수숭만주를 하려고 한다면 다른 방법을 고안해야 했다. 그래서 중원의 지식인들의 사기를 꺽어놓는다. 살일경백(殺一儆百)하여 본보기로 죽여서 겁을 준다. 이것으로 수숭만주를 한 셈이다. 그래서 이 방면에서 아오바이는 한 가지 방안을 생각해낸다. 문자옥(文字獄)이다. 아오바이는 문자옥을 생각해내고, 문자옥은 강희제때 시작된다. 강희제가 집권한 61년동안 전후로 10여건의 문자옥을 만들어 낸다. 그중 가장 비참했던 몇 건은 모두 아오바이의 보정시기에 일어났다. 그래서 우리는 아오바이가 청나라초기 문자옥의 시작용자라고 말하지는 않더라도 다만, 그가 문자옥을 확대시킨 책임은 있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명사안(明史案). 명사안을 얘기하자면 아주 골치아프다. 명나라 천계년간에 숭정제의 앞의 그 황제이다. 천계연간에 재상이 있었다. 황상과 같은 성씨이다. 황상과 같은 일족이다. 주국정(朱國楨)이 물러난 후에 <명사>라는 책을 쓴다. <명사>라는 책을 쓸 때 비교적 재미있다. 그가 쓴 것은 <명사>이니까 사용한 것은 모두 명홍무제부터 숭정제에 이르기까지 대명의 연호를 쓰다. 문제는 명나라가 1644년 멸망한 이후의 일이다. 그는 계속 썼다. 그가 무슨 연호를 썼는가? 남명황제의 연호를 썼다. 홍광, 융무, 영력, 그가 죽을 때까지. 그래서 이 책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청나라의 연호는 등장하지 않는다. 나중에 주국정은 이 책을 쓰고나서 자기만 봤고, 인쇄할 생각은 없었다. 나중에 명청이 교체되고 그들 집안이 가난해지고, 땅은 백성들이 점거했다. 자신이 빈곤해져서 살아갈 수가 없게 되니, 돈이 필요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주국정이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낸다. 이 책을 팔겠다. 그래서 팔았다. 누가 샀는가 이웃의 장정룡이라는 사람이다. 그는 집에 돈이 많았다. 이 책을 산 후에 여기저기 약간의 수정과 교정을 거친 후에 장정룡이 작자라고 썼다. 그는 이 책을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다. 죽은 해가 1654년이다. 그가 죽자 이 책은 그의 집에 그냥 남아 있었다. 그는 젊어서 죽었다. 그러다보니 그의 부친은 마음이 아파서 아들이 다 마치지 못한 일을 완성하고 싶었다. 그 후에 남명 홍광정권에서 예부상서를 지낸 이영석(李令晳)에게 부탁하여 자기 아들의 책, 기실은 자기 아들이 쓴 책도 아닌데, 서문을 써달라고 한다. 그리고 당시 강남의 명사 십팔명에게 돈을 주고 부탁하여 교정을 보게 한다. 그 후에 누구누구가 주석을 달고, 누구누구가 서문을 쓰고, 누구누구가 교정을 봤다고 썼다. 그런에 여기서 끝이 아니다. 장정룡에게는 장인이 있는데, 자신의 사위가 죽자 자신이 이 책을 출판하겠다고 나선다. 그의 이름은 주우명(朱佑明)이다. 우명은 명나라를 보우한다는 의미가 된다. 우연하게도 이 주우명도 부호였고, 1660년 이 책을 인쇄하여 세상에 내놓는다. 이름도 고친다. <명사>가 아니라 <명사집략(明史輯略)>이라고 한다. 인쇄된 후에 사람들이 읽어보니 모조리 명나라연호이다. 명나라 연호를 계속 쓴다는 것은 청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랑캐로 보는 것이다. 이때 아오바이는 남방의 지식인들을 수습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마침 기회가 온 것이다. 조사를 해보자. 역시 이 책에믄 팔대죄상이 있었다. 주요 죄상은 당연히 명을 치켜세우고 청을 폄하한 것이다. 다른 것은 얘기할 것도 없다. 수사를 해서 결국 70여명을 죽인다. 장정룡은 이미 죽었는데 묘를 파헤쳐서 뼈를 가루로 만들어 뿌린다. 장정룡의 동생은 24살인데 죽여버린다. 그리고 서문을 쓴 이영석도 죽인다. 그의 네 아들도 처형한다. 장정룡의 네명의 손아래처남, 손위처남 모두 5명도 죽인다. 그 후에 교정에 참가한 18명중 15명은 죽인다. 나머지 3명은? 예전에 한 거지를 구해준 바 있는데, 그 거지가 장군이 되었다. 이 장군이 바로 오육기(吳六奇)이다. 이 오육기가 자기 얼굴을 봐서 구해준다. 그외에 연루된 사람을 모두 합쳐서 220여명이 된다. 아오바이는 이 일을 크게 확대한 것이다.
아오바이는 이런 일을 통하여 무슨 목적을 달성하려 했을까? 한족지식인을 타격하려 한 것이다. 머리를 내미는 몇몇 지식인을 쳐서 기세를 꺾으려 한 것이다. 그 목적은 달성하다. 그러면 외국선교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떻게 외국선교사의 기세를 꺾을 것인가? 이때 아오바이는 한 사람을 생각해낸다. 거의 그와 동등한 신분과 지위를 지닌 인물이다. 그는 바로 탕약망(湯若望, 본명은 요한 아담 샬 폰 벨)이다. 탕약망이 어떤 사람인가? 아오바이는 왜 그를 겨냥했을까? 탕약망은 원래 독일 쾰른에서 태어난다. 벨은 그의 성이다. 폰은 귀족임을 나타낸다. 샬은 조상이 받은 존호이다. 그 뜻은 충용(忠勇)이라는 뜻이다. '바투루'와 같은 의미이다. 그는 집안을 자랑하지 않으려고 다른 사람과 얘기할 때는 요한 아담이라고만 말한다. 마치 요한이 이름이고 성이 아담인 것처럼 그러나 기실 그렇지 않다. 요한 아담은 그가 어려서부터 기독교도이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나중에 중국에 오면서 중국이름을 ㅁ나들 때 그는 요한을 약망으로 번역한다. 이것은 그가 스스로 고른 것이다. 중국이름은 약망인데, 성은 뭐라고 할 것인가. 아담을 가지고 비슷한 글자를 골라서 탕자를 쓴 것이다. 그래서 그의 중문이름은 그가 스스로 지은대로 탕약망이 된다. 그는 1611년에 예수회에 가입한다. 1620년에 중국의 마카오로 온다. 짧은 기간동안 중국어를 배운 후, 내지로 들어간다. 1629년에는 북경으로 와서 1630년 당시의 교회인 중국교구에서 서안으로 파견되어 선교활동을 한다. 서안으로 간지 반년만에 그는 다시 북경으로 불려올라온다. 왜 그랬을까? 왜냐하면 이 시기에 중국의 역법(曆法)에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명나라의 역법은 대통력(大統曆)인데, 그 원형은 수시력(授時曆)이다. 곽수경이 수시력을 만들었고, 1282년 전국에서 시행한다. 이 <수시력>은 당시에 세계에서 가장 정확한 일력이었다. 1년이 365.2425일이다. 현재의 양력과 차이가 크지 않다. 26초가 차이날 뿐이다. 그러나 이 26초를 가볍게 보면 안된다. 300년이 지나다보니 10분12초가 된다. 명나라가 이 역법을 실행하면 정확할가? 그래서 탕약망, 나아곡(羅雅谷)등이 서광계(徐光啓)가 편찬하는 것을 돕게 된다. 1633년 서광계가 죽고, 1634년 이 역법 우리가 부르는 숭정역서 137권이 완성된다. 완성된 후에 전국에 시행하려고 했으나 시간이 없었다. 매일 전쟁을 벌이다보니 완성해놓고 그냥 놔둔다. 순식간에 1644년 5월이 되어, 청나라군대가 입관하여 섭정왕 도르곤이 명을 내린다. 내성주민은 3일내에 외성으로 이주하라. 모든 민족을 다 떠나야 했다. 그리고 기병이 거주한다. 당시 선무문 안에는 천주교당이 있었다. 탕약망은 거기에 거주하면서 어찌할 까를 고민한다. 그리고 섭정왕 도르곤에게 편지를 쓴다.
서신에서 그는 몇 가지를 얘기한다. 첫째, 내가 여기에 와서 여기에 사는 것은 전왕조 황제가 그렇게 하라고 한 것이다. 그 뜻은 너희도 너무 자잘하게 굴지 말라는 것이다. 멸망한 전왕조의 황제보다는 마음이 좁아서야 되겠느냐는 것이다. 그도 나를 여기에 살게 하였는데 네가 나를 여기에 못살게 한다면 너무 마음이 좁지 않느냐는 취지이다. 둘째, 여기에는 물건이 많다. 설사 네가 마음이 좁아서 나를 옮겨나가라고 하더라도, 나는 갈 수가 없다. 이렇게 많은 물건을 3일만에 옮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셋째, 설사 네가 사람을 보내서 물건을 옮겨준다고 하더라도, 옮기다가 망가지면 누구책임이냐는 것이다. 넷째, 설사 내 책임이라고 하더라도, 내가 여러해동안 힘들여 만든 것이 망가졌는데 나는 다시 살 돈이 없다. 이 돈을 누가 내야 하는가.
도르곤은 그의 편지를 보고난 후에 바로 명을 내린다. 서양선교사 탕약망이 천주교당에 거주하는 것을 허용한다. 각기의 병사들은 함부로 진입하여 괴롭히지 말라. 탕약망은 기뻐하며 도르곤에게 예물을 보낸다. 원래는 그가 물건을 모두 정리해 놓았었다. 이사갈 준비를 마쳤던 것이다. 이제 이사를 가지 않아도 되니, 원래 놓아야 할 곳에 다 놓아두었다. 그리고는 즉시 몇 가지 선물을 준비한다. 하나는 <여지병도(輿地屛圖)>이다. 즉 세계지도이다. 당시에 그가 그린 세계지도이다. 그리고 혼천의(渾天儀), 지평구(地平晷), 망원경등 자신이 썼던 것, 쓰지 않는 것, 남는 것을 보내준다. 망원경을 보여주면서, 섭정왕님 이렇게 하면 별을 볼 수 있습니다. 도르곤이 망원경을 들어 하늘을 보니, 원래 이렇게 가지고 노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두 사람은 사이가 가까워진다. 그리고 탕약망은 한 가지를 얘기한다. 순치제에게 9월 1일날에는 절대 정식등극을 하지 말라고 하라고. 무엇때문인가? 이건 양력이다. 음력으로는 팔월초하루이다. 그날 일식(日食)이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명나라의 역법으로는 예측이 정확하지 않다. 시간은 몇시 몇시이다. 내 말을 들어라.
그날 과연 일식이 있었다. 나중에 그는 음력 시월초하루에 즉위하는데, 그 날은 탕약망이 잡았다. 도르곤은 전혀 생각지 못했다. 이 외국인이 이렇게 대단하다니. 그래서 그에게 흠천감(欽天監)의 감정(監正)을 맡긴다. 정오품이다. 전체 하늘을 그가 관장한다. 땅의 일은 내가 관장하고, 하늘의 일은 네가 관장해라. 이건 중국에서 가장 큰 두 개의 관직이다. 그렇지 않은가? 품계가 얼마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하늘이 모조리 그의 관할이다. 순치제가 친정한 후 탕약망은 천문역법을 잘 알 뿐아니라, 의학에도 정통했다. 탕약망은 황태후의 병을 치료해 주었을 뿐아니라, 순치제의 미혼황후 보얼지지터씨의 병도 치려해준다. 그래서 효장황태후가 그에게 매우 감사한다. 그리고 그를 순치제의 혼례식에도 참석하도록 초청한다. 1661년초에 순치제가 천연두에 걸리자, 죽기 전에 순치제는 자신이 천연두에 걸린 것을 알고는 후계자를 선정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한다. 순치제는 고민에 빠진다. 황위를 누구에게 넘겨주어야 하는가. 아들에게 넘겨주어야 하는가. 나이가 겨우 5, 6살이다. 장래 섭정왕이 나와서 간섭을 받으면 그도 나처럼 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어른이 된 사람을 황제에 올릴까도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당형(堂兄) 안친왕(安親王) 웨러(岳樂)을 떠올린다. 그에게 황제를 할까 생각하다가 그는 탕약망과 상의한다. 탕약망은 안된다고 말한다. 황제의 자리가 다른 집안으로 넘어가면 그게 너의 당형이더라도, 너희 가족의 아들들이 장래에 모두 좋지 않을 것이라고. 이건 매우 위험하다고 얘기한다. 아들 중에서 한 명을 황제로 올려야 한다고 말한다. 순치제는 생각에 빠져 있다가 그에게 너는 이제 돌아가라. 내가 좀 더 생각해 보겠다고 말한다. 그는 생각을 해본다. 두 명의 아들이 있는데 하나는 8살이고, 하나는 6살이다. 그래서 그는 나이가 좀더 많은 8살짜리를 후계자로 삼으려고 생각한다. 그의 차남이다. 그의 장남은 이미 죽었다. 차남은 푸췐(福全)이다. 복으로 가득차게 해주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 그의 모친인 효장황태후는 삼남 쉔예(玄燁)으로 해야한다고 고집한다. 그래서 모자간에 다툼이 벌어진다. 한 명은 둘째아들이 맡아야 한다고하고 한 명은 셋째손자가 해야한다고 한다. 그래서 마지막에 그들 둘은 다시 탕약망을 부른다. 탕약망은 이렇게 말한다. 쉔예로 하여금 하게 하는 것이 적당하겠다고. 순치제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왜 그런지 묻는다. 쉔예는 이미 천연두를 앓았습니다. 천연두는 평생 한번 걸리는 것입니다. 한번만 걸리고나면 괜찮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순치제는 그의 셋째아들인 애신각라 쉔예로 하여금 황위를 이어받게 한다. 이리하여 중국봉건왕조의 마지막 성세, 강건성세(康乾盛世)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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