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기련해(紀連海)
아오바이(오배)는 도대체 강희제와 무슨 문제가 있었을까? 3대황제를 충성을 다해 모시던 원로대신이 어찌하여 소년 강희제의 눈엣가시가 되었을까? 아오바이는 도대체 무슨 경력으로 3황제를 거치는 동안 계속 대권을 장악하였을까? 그는 어떻게 권력의 정점에 올랐을까?
대청왕조의 역사상 아오바이는 잊을 수 없는 이름이다. 소년 강희제의 지금오배(智擒鰲拜) 이야기는 일찌감치 널리 전해졌고 사람들의 마음 속에 깊이 새겨져 있다. 다만, 아오바이는 우리들에게 매우 낯선 인물이기도 하고,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그는 일찌기 대청왕조를 위하여 전쟁터에서 피를 흘리며 분전했고, 전공을 무수히 세웠다는 것을. 그가 일찌기 충성을 다하여 청나라의 3대황제를 모셨고, 그의 일생은 공신(功臣)에서 권신(權臣)으로 다시 죄신(罪臣)으로의 인생궤적과 심리역정을 아는 사람은 더더욱 드물다. 오늘부터, 우리는 역사상 진실한 아오바이를 환원시키고 최종적으로 소년강희제가 아오바이를 문책하는 사건에 관련된 여러가지 수수께끼를 풀어보기로 한다.
최근 들어, 청황실에 관한 드라마영화가 인기를 끌면서 소년강희제의 지금오배 이야기는 점차 사람들이 즐겨 이야기하게 되었고, 아오바이는 사람들이 모두 다 아는 인물이 되었다. 역사상 아오바이라는 인물은 확실히 존재했고, 그는 청나라초기의 중요인물이었다. 아오바이라는 사람은 청나라의 개국공신중 하나이다. 만주 상황기(鑲黃旗)의 인물이다. 그는 대청왕조의 3명의 황제를 모셨다. 하나는 우리가 얘기할 청태종 애신각라 홍타이시(皇太極)이고, 둘은 청세조 애신각라 푸린(福臨) 우리가 일반적으로 연호로 부르는 순치제(順治帝)이다. 셋은 바로 청성조 애신각라 쉔예(玄燁), 즉 우리가 통상 말하는 강희제(康熙帝)이다. 아오바이의 일생은 공고개주(功高蓋主)라고 할 만하다. 그의 전반생은 대부분의 시간을 전쟁터에서 보냈다. 전공이 혁혁했고, 대청왕조를 건립하고 공고히 하는데 큰 공로를 세운다. 그의 후반생은 권력을 장악하고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생사대권을 장악한다. 그리하여 청나라가 초기에 입관이후 특히 강희제 통치초기에 아주 중요한 인물이 된다.
문제는 이런 중요한 인물, 공헌이 혁혁한 인물이 왜 마지막에 강희제에게 붙잡히고, 그 후에 홧병이 나서 죽는 최후를 맞이했느냐는 것이다. 이것을 보면서 내가 생각한 것이 있다. 과거에 군신지간의 정의(情誼)를 형용하는 말이 있는데, "같이 환난을 겪는 것은 쉬워도, 같이 향락을 누리는 것은 어렵다(共患難易, 共享樂難)", 혹은 "같이 창업하는 것은 쉬우나, 같이 성공하기는 어렵다(共創業易, 共成功難)", 또한 "같이 쓴 일을 겪기는 쉬우나 단 것을 나누기는 어렵다(共苦容易同甘難)" 그렇다면 천하를 얻을 때는 군신으로 잘 지냈는데, 천하를 얻고나면 그들 개국공신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개괄해보면 네 가지 결과이다. 첫째는 공성신퇴(功成身退). 즉 물러나는 것이다. 이런 류의 사람으로는 서한 초기의 장량이 있다. 유후 장량. 둘째는 계속하여 신하로 남는 것이다. 예를 들면 서한초기의 소하가 있다. 셋째는 독자노선을 걷는 것이다. 너와 같이 안하겠다 나는따로 나가겠다는 것이다. 이쪽으로는 서한 초기의 한신이 있다. 이 결과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성공하는 경우, 하나는 실패하는 경우. 한신의 사례는 바로 실패한 경우이다. 넷째는 취이대지(取而代之) 즉, 빼앗는 것이다. 서한초기에는 이런 사례가 없다. 성공한 경우로는 송나라의 개국황제 조광윤이 있다. 개국공신의 최후는 이 네 가지에 속하게 된다.
우리는 중국의 고대역사를 살펴볼 때 앞의 두 가지 경우는 그다지 많이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은 뒤의 두 가지 경우이다. 그렇다면 문제가 있다. 아오바이는 이 네가지 중에서 어느 것일까? 아오바이는 공성신퇴를 선택하지도 않았고, 독자노선을 선택하지도 않았다. 더더구나 취이대지할 생각은 없었다. 그는 계속 신하로 남는 것을 선택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아주 비참했다. 계속 신하로 남는 것도 쉽지가 않다. 결국 지금당하게 된 것이다. 보정대신 아오바이와 강희제의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었던 것같다.
그렇다면 문제는 보정대신 아오바이와 강희의 사이에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었을까? 강희제는 또 왜 지금오배하게 된 것일가? 이 문제에 대답을 하려면 우리는 먼저 아오바이가 공을 세워 강희제를 보좌하게 된 경위부터 얘기해야할 것이다.
아오바이에 대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그가 대단한 가정에서 태어났다는 것이다. 그에게는 유명한 백부가 있다. 그의 백부는 바로 페이잉동(費英東)이다. 우리가 아오바이를 이해하려면 먼저 페이잉동부터 시작해야 한다. 페이잉동이 없으면 나중의 아오바이의 성공과 실패도 없었기 때문이다. 페이잉동을 얘기하려면 1588년부터 시작해야 한다. 1588년에는 아직 아오바이가 태어나지 않았다. 아오바이의 할아버지인 소르궈(索爾果)는 쑤완부(蘇完部)의 우두머리였다. 그는 전부락 500호를 이끌고 누르하치가 거병한 6년째 되는 해에 누르하치에 투항한다. 당시에 누르하치는 소르궈의 아들이자 아오바이의 백부인 당시 24살의 페이잉동을 만난다. 보자마자 영준하고 백보천양(百步穿楊)의 활솜씨를 지닌 것을 본다. 그래서 아주 좋아해서 계속 곁에 데리고 다닌다. 이후로 페이잉동은 확실히 아주 잘 싸웠다. 하다(哈達)을 멸망시킨 전투에서건 우라(烏拉)를 정벌할 때이건 아니면 사르후(薩爾滸) 전투에서건 가장 힘들게 싸울 때는 항상 페이잉동이 있었다. 역사에는 그와 관련한 두 가지 일을 기록하고 있다.
한번은 사르후전투에서 그가 무순성(撫順城)을 공격하는데, 당시 성위의 명나라군의 포화는 아주 맹렬했다. 당시는 페이잉동이 이끄는 부대가 무순성을 포위공격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명군의 포화가 떨어진 후에 페이잉동은 용감했지만, 그의 말은 그렇지 않았었는데, 포화를 보자마자 놀라서 바로 발길을 돌려 도망친다. 그 결과 말에 타고 있던 페이잉동까지 도망친 꼴이 도었다. 부하들은 이런 광경을 보자 장수도 도망쳤는데 우리가 싸울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여 바로 공격을 멈추고 후퇴한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페이잉동이 말을 다시 몰아서 돌아온다. 그리고 이런 말을 남긴다: "우리 건주에는 패퇴하는 장수는 없다. 전사하는 장수만 있을 뿐이다(無敗退之將, 只戰死之將)" 그리고는 계속 군대를 지휘하여 일거에 무순성을 함락시킨다. 이때 바깥에서 이 전투를 지켜보던 누르하치가 한 마디 한다. 그는 만인적(萬人敵)이다.
더욱 대단한 일은 그 후에 일어난다. 예허(葉赫)를 멸망시키는 전투가 있다. 우리는 알고 있다 누르하치의 건주여진과 예허여진은 원수지간이다. 그 예허를 멸망시키는 전투에서 페이잉동은 예허성에서 진격을 명령했다. 그러나 누르하치는 예허가 너무 강해서 도저히 함락시킬 수 없을 것같았다. 전투는 매우 힘들게 진행되었고, 오래 공격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했다. 누르하치는 결국 이런 말을 생각한다: 사나이대장부의 복수는 10년도 늦지 않다. 철수한다. 그리하여 그는 철수명령을 페이잉동에게 보낸다. 그러나, 페이잉동은 내 부하들이 이미 성을 공격하고 있는데 어떻게 철수한단 말인가. 말이 철수이지 꼬리를 말고 도망치는 꼴이 아닌가. 지금 철수하면 즉시 상대에게 포위되어 섬멸될 것이다. 그리하여 명령을 받지 않고 계속 공격한다. 모두 내가 책임지겠다고 하면서. 이때 누르하치는 철수해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군대가 돌아오지 않았다. 내가 철수명령을 내렸는데 왜 군대가 돌아오지 않는가? 왜 내 명령을 듣지 않는가? 다시 전했다. 철수하라고. 이때 누르하치가 다시 철수명령을 내렸을 떄, 페이잉동은 즉시 전령을 돌려보낸다. 나의 군대가 이미 성벽을 올라가고 있는데, 철수명령을 내리면 나는 그런 명령을 내릴 수 없다. 현재 모두 성벽을 기어오르고 있는데, 이 명령을 받들 수가 없다. 모두 내가 책임질테니 돌아가라. 우리는 철수할 수 없다고 전해라. 그 결과 누르하치는 다시 세번째 철수명령을 내리려고 준비하고 있는데, 페이잉동이 왔다. 철수명령을 내릴 필요 없습니다. 내 군대가 이미 완전히 예허성을 점령했습니다. 예허성을 점령했을 뿐아니라, 예허부의 우두머리인 진스타이(金石台)도 생포했다. 이때 누르하치는 다시 한번 말한다. 페이잉동은 정말 만인적이다. 생각해보라 페이잉동에게 이런 백부가 있으니, 그는 어려서부터 어떤 뜻을 세웠겠는가?
아오바이가 언제 출생했는가? 역사상 기록이 없다. 우리가 고증한 바에 의하면, 필자의 생각으로는 1610년이후의 몇년내에 출생했을 것으로 본다. 아마도 2,3년의 시간내일 것이다. 즉, 그는 나이가 도르곤, 효장화애후와 비슷할 것이다. 왜 그런가? 필자의 근거는 두 가지이다. 첫째, 소니(索尼)의 나이이다. 소니와 아오바이는 나중에 같이 강희제의 보정대신을 지내는데, 소니는 1600년에 출생했다. 역사에 기록이 있다. 이것은 <청태종실록>과 <청사고>에 모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역사에 이런 기록이 있다. "소니가 나이들어 병에 걸리면서(老病), 아오바이가 권력을 독점했다." 우리는 주목해야할 것이 있다. 바로 이 '노(老)'자이다. 소니는 늙어서 병이 들어서 아오바이가 권력을 독점한다는 말이다. 즉 소니의 나이가 많고, 병에 걸려서 아오바이에게 기회를 주었다는 것이다. 이를 보면 아마도 아오바이보다 소니가 십여세는 많지 않을까 싶다. 이것이 나의 첫번째 근거이다.
두번째 근거는 바로 아오바이의 등장시기이다. 우리는 <청태조실록> 즉 누르하치의 언행을 기록한 이 책에서는 아오바이라는 이름이 아예 나오지 않는다. 그럼 어디에 나오는가? <청태종실록> 즉, 홍타이시의 언행을 기록한 이 책에 나온다. 아오바이가 처음 등장한 것ㅇㄴ 1632년이다. 즉 청태종 천총6년이다. 아오바이등이 명나라 변경을 쳐들어가서, 몽골인 5명, 한인 30명, 가축 32마리를 빼앗아 왔다는 것이다. 홍타이시는 너희들이 빼앗은 것은 너희가 가지라고 말한다. 이것이 처음 아오바이가 등장한 때이다. 아오바이가 이때 개략 20살 정도 되지 않았을까 싶다. 즉 그는 1610년이후 몇년내에 출생했을 것이다.
그럼 아오바이라는 이 인물이 처음 두각을 나타낸 처음에 무엇이 되었을까? "용감한 바투루(巴圖魯)". 바투루라는 말은 우리가 처음 접하니 먼저 소개하기로 한다. 바투루라는 말은 만주어가 아니라.원래는 몽골어이다. 몽골어에서 우리는 일반적으로 '바투루'라고 번역하지는 않고, 다르게 번역한다. 뭐라고 하는가 '바두(拔都)'라고 한다. 바두라고 하면 바로 알 것이다. 징기스칸의 자손중에 바두라는 사람이 있다. 그럼 바두는 몽골어에서 무슨 뜻인가? 그것은 세 가지 한어로 번역된다: 첫째는 용장(勇將), 둘째는 용관삼군일장(勇冠三軍一將), 셋째는 대영웅(大英雄). 몽골어에느는 일반적으로 바두라는 것을 사라미 이름으로 쓰고, 황제가 그것을 대신에게 하사하는 명칭으로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있기는 하지만 드물었다. 그러나, 청나라는 달랐다. 청왕조가 중원으로 진입한 후 만주인들도 이 단어를 쓰는데, 자주 그것을 상으로 하사하는 명칭으로 썼다.
1616년 누르하치가 후금을 건립한 후 1861년 함풍제가 열하 피서산장에서 죽을 때까지 245년간, 청나라의 황제는 모두 몇 명에게 바투루라는 명칭을 하사하였을까? 모두 33명이다. 계산해보면 평균 7년에 1명꼴이다. 아오바이가 바로 이런 바투루인 것이다.
1632년에 아오바이는 몇 사람을 붙잡아서 돌아왔다. 그렇다면 1634년에 아오바이는 홍타이지수하에서 어떤 인물이었을까? 그는 상황기의 일개 바야라(巴牙喇) 갑라장경(甲喇章京)이었다. 바야라는 무슨 뜻인가? 황제의 호위부대(護軍)이라는 뜻이다. 장경은 무슨 뜻인가? 장경이라는 말은 만주어인데, 바로 장군이라는 뜻이다. 이 장경이 처음에는 세 가지가 있었다. 갑라장경은 가장 낮은 장경이다. 이어서 매륵장경(梅勒章京)이고 그 다음이 앙방장경(昻邦章京)이다. 이 장경의 원래 뜻은 장군이지만, 나중에는 청나라정부의 4품 문관도 장경이라고 불리게 된다. 그때의 장경은 현재로 말하자면 고위공무원이다. 그 후에는 군기처를 성립하고, 총리각국사무아문을 두는데 거기에서 일하는 관리를 장경이라고 부르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1634년, 아오바이는 홍타이시의 호위부대인 호군의 일개 장교이다. 비교적 낮은 등급의 일개 장교이다. 1636년이 되어, 홍타이시가 황제에 오른다. 그해에 홍타이시는 팔기에 명하여 조선을 정벌하라고 명령한다. 이때가 바로 아오바이가 두각을 나타내고 아오바이가 진정으로 '용감한 바투루'가 되는 때이다.
그렇다면 외 조선을 쳤을까? 조선에는 역사상 여러 나라가 있었다. 이씨왕조는 비교적 늦게 건립된다. 1382년에 비로소 건립되었다. 명나라보다도 늦었다. 이씨조선이 건립되고 그들은 명나라와 싶은 우의를 맺는다. 이씨조선건국 200년이 되엇을 때 이씨조선은 공전의 재난을 맞이한다.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것이다. 당시 이씨왕조는 이기지 못하고 순식간에 나라가 망할 위기에 처한다. 이때 명나라가 출병해서 조선을 도와 7년간 싸워주고 1598년 일본침략군을 모조리 조선에서 몰아낸다.
그후에 조선과 명나라정부와의 관계는 날로 밀접해진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하에서 조선의 존재는 무엇이 되었는가? 후금정권에는 큰 위협이 된다. 후금이 명나라를 치면, 조선이 출병하여 후금을 친다. 후금이 조선을 치면, 명나라가 출병하여 후금을 친다. 그렇다면 후금은 양쪽에서 적군을 맞이하는 셈이다. 이런 상황하에서, 후금정권은 양쪽에서 모두 전쟁을 벌일 수는 없었다. 그래서 1627년 홍타이시는 아민(阿敏), 지르하랑(濟爾哈朗), 아지거(阿濟格)등을 보내어 제1차조선정벌을 시직한다. 그 결과 순식간에 명나라에서 준비를 전혀 하지 못한 상황하에서 평양을 점령하고, 조선국왕 이종(李倧)은 강화도로 피신한다. 그리하여 쌍방은 형제지맹을 체결한다. 이후는 형제간이다. 그러나 맹약이 체결된 후 홍타이시는 철군을 명령한다. 그는 철군이후 조선에 맹약의 이행을 요구한다. 그러나, 조선은 맹약을 지키지 않는다. 우리의 맹약에 규정한 것은 우리가 형제간이라는 것 아니냐. 우리 둘은 형제간이지만, 우리와 명나라는 부자관계이다. 형제를 위해서 부친의 뜻을 어길 수는 없다. 부친은 세상에 하나이고, 형제는 여럿이다. 네가 나에게 명나라를 배신하라고 하는 것은 따를 수 없다. "영이국퍠 단불감종(寧以國斃, 斷不敢從)" 차라리 나라가 망할지언정 절대로 따를 수 없다.
금방은 1627년이고, 이번은 1636년이다. 홍타이시가 황제가 되었는데, 즉시 조선에 사람을 보낸다. 홍타이시는 조선이 자신의 체면을 살려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조선은 첫째, 사신을 접견하지 않고, 둘째 무슨 선물도 보내지 않는다. 홍타이시의 사신은 대청의 사신이 어떻게 이렇게 돌아갈 수 있는가? 나를 만나주지 않는다고 하여 내가 돌아갈 수 있는가? 내가 무슨 낯으로 황상에게 그들이 안만나주어서 돌아왔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건 안된다. 그리고 홍타이시도 생각한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으니 치겠다. 그리고 홍타이시가 친히 군대를 몰고 나선다. 양로의 대군이 조선으로 진격하는데, 하나는 홍타이시 본인이 직접 이끌고 의주를 점령한다. 다른 하나는 바로 평양과 한성을 점령한다. 이번에는 이종이 붙잡힌다. 그 후에 완전히 승복하여 조약을 체결한다. 이번에는 저번과 달랐다. 군신맹약이다. 조선은 이해의 정월 삼십일이전은 대명의 신하이지만, 정월삼십일이후는 대청의 신하이다.
실제로 싸우는 도중에 아오바이등도 보낸다. 그러나 홍타이시는 다른 곳으로 보냈다. 어딜 보냈는가? 피도(皮島)이다. 어떤 사람은 내가 왜 들어보지 못했지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피도를 무시해서는 안된다. 피도는 작지만 아주 중요하다. 피도전투는 아주 중요하다. 그는 아오바이에게 홍타이시에게 누르하치에게 그리고 전체 대청국에 극히 중요했다. 피도는 바로 압록강이 충적되어 만들어진 하나의 작은 섬이다. 압록강입구 바깥의 한 작은 섬이다. 섬은 아주 작다. 그러나 그 위치는 바로 압록강 입구에 있다. 요동지구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이다. 전략요충지이다. 요동이 명나라 천계제이후 누르하치에게 점령되었는데, 명나라의 동북지방 수비군 일부분은 모문룡의 지휘하에 피도로 갔다. 모문룡이 이끄는 군대는 피도에 주재하기 시작한다. 여기서는 나가면 공격할 수 있고, 물러서면 수비할 수 있다. 그래서, 당시 누르하치가 여러번 피도를 공격하였지만 점령하지 못했다. 홍타이시도 여러번 공격하였지만 점령하지 못했다. 이번에 홍타이시는 철저히 조선문제를 해결했다. 이제 조선과는 볼 일이 없다. 그래서 즉시 피도로 군대를 보낸다. 누구를 보냈는가. 슈퉈(碩托)이다. 슈퉈는 다이샨(代善)의 아들이다. 그는 슈퉈에게 대군을 이끌고 피도를 치게 한다. 결과는 생각지도 못하게 슈퉈도 점령하지 못한다. 포위공격을 해도 피도는 반석과 같이 튼튼했다. 그래서 아지거(阿濟格)을 보내어 인수인계받게 한다. 아오바이도 아지러를 따라나선다. 당시 아지거가 거기에 도착했을 때 역시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십여년간 공격했지만, 이 작은 섬을 무너뜨리지 못한 것이다. 당시 여러 장수들은 상의를 한 끝에 성동격서의 전법을 쓰기로 한다. 큰 배를 몰고와서 주력부대로 해상에서 피도를 공격한다. 표면적으로 보면 이곳이 주력이다. 동남쪽에서 친다. 그리고 뒤에는 정예부대를 서북에서 포위공격하도록 한다. 뒤쪽 부대가 관건이다. 표면적으로 보면 정면에 수만의 부대가 있지만, 그들은 중요하지 않다. 후면부대를 위한 거짓공격이다. 당시 양로로 나누어 공격하기로 결정한 후에 아오바이가 손을 든다. 내가 후로를 맡겠다. 당시 아지거가 말한다. 네가 되겠는가? 아오바이는 이때 맹세를 한다. "우리가 이 섬을 점령하지 못하면 다시 당신을 만나러 오지 않겠다. 반드시 섬을 점령하고 돌아오겠다." 바로 <청사열전>의 아오바이열전에 기록된 내용이다.
아오바이는 부하들과 서북으로 가서 진공한다. 생각해보라 이 피도에 있는 명나라 수비군이 어떤 사람들인가? 수십년간 싸우면서 무너지지 않았다. 그들이 어떤 전술을 모르겠는가? 그들이 십여년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그들도 대단하다는 것이다. 너희가 성동격서를 한다고. 명군도 멍청하지 않다. 정면에서 오는 거짓공격에는 우리도 노약병잔을 보내어 막는다. 우리는 배후에서 오는 군대가 정예부대라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도 정예부대를 그쪽으로 보내겠다. 그래서 쌍방이 싸움을 벌이자마자 아오바이는 바로 발견한다. 이쪽이 상대의 정예부대라고. 그래서 그는 동남에서 공격하던 배에 신호를 보낸다. 불을 드는 것을 신호로 하여 공격하자고. 그리고는 바로 섬으로 돌진해 들어간다. 피도에 상륙하여 한편으로 싸우면서 한편으로 소리친다. 그는 손에 횃불을 들고 있었다. 뒤의 청나라병사들은 장수가 횃불을 들고 맨앞에서 돌진하는 것을 보자 한꺼번에 돌진한다. 동남방에 있던 사람들도 정면으로 거짓공격을 펼치는게 의미없다는 것을 알고 신속히 서북으로 와서 공격에 가담한다. 이렇게 하여 피도를 함락시킨다. 피도를 십수년간 수비하던 명나라병사는 모조리 섬멸된다. 이 소식이 성경으로 전해지자 홍타이시는 아주 기뻐한다. 친히 글을 써서 누르하치에 제사지낸다. 이렇게 하늘에 있는 누르하치의 영을 위로했다.
아오바이는 피도를 점령하여, 홍타이시가 여러 해동안 고민하던 것을 해결해 주었다. 당시 홍타이시는 그에게 바투루라는 칭호를 하사한다. 그리고 그를 '삼등매륵장경'으로 승진시킨다. 즉 지금으로 말하면 장군이 된 것이다. 원래 몇 사람만 지휘하다가 이제는 장군이 된 것이다. 또한 이 삼등매륵장경이라는 직위를 6번 세습하고, 만일 후대가 잘못만 저지르지 않으면 다시 12번 세습할 수 있게 해준다. 6번이면 6대이고, 여기에 12번을 더하면 합쳐서 18대나 내려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큰 상인가. 아오바이는 황상의 은혜에 감읍한다. 그리고 전력으로 보답하겠다고 생각한다. 그는 매일 자신이 야근할 차례이든 아니든 홍타이시를 위하여 보초를 선다. 충성이 대단했다. 한번은 다이샨의 아들이자 홍타이시의 조카인 웨퉈(岳托)가 홍타이시에게 잘 보이려고 말을 가져왔다. 전쟁터에서 얻은 몇 필의 좋은 말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 즉시 황상에게 바치려 한다. 그런데, 아오바이가 가로막는다. 황상은 잠을 자고 있다. 그러니 내일 아침에 다시 오라고 돌려보낸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 아오바이는 지난 밤에 있었던 일을 홍타이시에게 보고한다. 홍타이시는 매우 기뻐하면서 그를 칭찬한다. 그 후에 전군에 명령하여 웨퉈와 같이 아부하는 행동을 하지말라고 비판한다.
그후, 아오바이는 보초를 설 뿐만아니라 전투에 나서서도 갈수록 용맹을 더해간다. 1641년 영금대전(寧錦大戰)때 금주를 공격하면서 아오바이는 군대를 이끌고 송산(松山), 행산(杏山)을 점령한다. 긜고 명나라의 보군영(步軍營)을 점령한다. 순식간에 그는 삼등매륵장경에서 일등매륵장경으로 승진한다.
이어서 1643년, 명천간에 또 한번의 전투가 벌어진다. 당시 명나라군대가 대패하는데, 아오바이는 군대를 이끌고 추격하며, 오삼계를 치고, 당통을 치고, 백광은을 쳤다. 그래서 그들을 이리저리 도망다닌다. 1642년 여름, 아오바이는 군대를 이끌고 지금의 하북(河北) 당시는 직예라고 부르는 지역에서 산동으로 진격한다. 연속으로 4개의 성을 점령하고, 다시 삼등앙방장경으로 승진한다. 1642년때 아오바이는 팔기(八旗)의 호군통령(護軍統領)이 된다. 호군팔기는 기실 매 기가 일부분 군대를 파견하여 황궁의 안전을 보위하고, 황상의 안전을 보위하는 부대이다. 앞에서 우리는 아오바이가 맡은 것이 필기중 하나인 상황기의 호군수령이라고 했다. 1642년에는 그가 8개 기를 합친 호군통령이 되는 것이다. 이 8개 기의 모든 호군이 아오바이의 지휘하에 들어간 것이다. 앞에서 한 얘기에서 우리는 알 수가 있다. 명문출신인 아오바이는 여러번의 전투에서 걸출한 실력을 드러내므로서 홍타이시의 신임을 받는다. 그리고 신속히 홍타이시 수하에서 손꼽히는 장군이 된다. 그리고 팔기장령중 후래거상(後來居上)의 인물이 된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치대로 발전하면 그는 계속 홍타이시와 그 이후 황제의 신임을 받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쉽게 권력의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 있었을 것이다. 당연히 이렇게 추측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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