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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청 초기)

누르하치는 금(金)의 후예로 자처하면서 왜 여진문자를 쓰지 않고 만주문자를 만들었을까?

by 중은우시 2018. 2. 26.

글: 담사용(覃仕勇)


명나라 만력13년(1615년) 일대효웅 누르하치가 신빈현 이도하자반에 있는 허투아라성(赫圖阿拉城)에서 칸을 칭하고 나라를 건국하며 국호를 "대금(大金)"이라 한다. 역사에서 말하는 "후금(後金)"이다.

확실히, 누르하치는 여기에서 세상사람들에게 선언한 것이다. 자신의 정권은 역사상 일찌기 요를 멸망시키고 송을 평정했던 대금국의 맥을 잇는다고.

만주족 역사를 기술한 사료인 <만문노당>에는 누르하치가 조선국왕에게 보낸 서신이 실려 있다. 서신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나 대정 칸이 말한다: 우리 금나라가 조휘종, 조흠종 황제를 정벌할 때, 조선국왕은 송나라도 돕지 않고, 금나라도 돕지 않았다. 이는 공정한 대국이다." 

의문의 여지없이, 누르하치는 금왕조의 직계후예라고 자처한 것이다.

그러나, 괴이하게 생각되는 것은 대금제국을 건립할 때, 금태조 완안아골타는 이미 완안희윤(完顔希尹)과 섭로(葉魯)등에게 명하여 여진문자를 창조하게 한다. 완안희윤과 섭로는 명을 받들어, "한인의 해서자를 본떠, 거란문자제도가 본족의 언어에 맞아서 여진자를 만들었다." 이리하여 '여진창힐'이라는 칭호를 듣는다. 여진족은 이때부터 본민족의 문자를 갖게 된다.

그러나, 누르하치의 건주여진이 요동반도에서 굴기할 때, 본국문자가 없다는 난감한 지경에 처한다. 그리하여 명나라 몽골각부와 교류하거나 연락할 때 부득이 몽골문자를 빌려써야만 했다.

그리하여, 누르하치는 몽골언어문자에 정통한 관리 어얼더니(額爾德尼)와 가가이(噶蓋)에게 명하여 몽골문자를 본떠서 여진족문자를 만들게 명한다.

어얼더니와 가가이는 몽골자모를 참조하여, 만주문자를 창제한다.

여기서 보충할 것은 어얼더니와 가가이가 만든 만주문자는 자모의 수량과 형태가 몽골문자와 거의 비슷했고 아주 조악했다. 삼십여년후, 홍타이시(청태종)시대에 이르러 홍타이시는 문신 다하이(達海)로 하여금 이 조악한 문자를 개선하라고 명령한다. 다하이는 자모에 가권가점(加圈加點)하고, 일부 자모의 형태를 고치고, 새로운 자모를 증가시키는 방법으로 개선하여, 원래 구분되지 않던 음을 구분되도록 하였다.

구분을 위하여 후세에는 어얼더니와 가가이가 만든 만주문자를 무권점만문이라고 부르고, 다하이가 개선한 만주문자를 유권점만문이라고 부른다.



왼쪽이 만주어, 오른쪽이 몽골어



이를 보면 쉽게 알 수가 있다. 완안아골타의 대금제국이 만든 여진문자는 주로 한자와 거란문자에서 왔다. 그러나 누르하치의 후금이 만든 만주문자는 전통 몽골문자에서 왔다.

한자와 거런문자는 모두 표의문자(表意文字)이다. 기실 거란문자도 한자에서 왔다. 그러므로 여진문자의 필획도 횡(橫), 직(直), 점(點), 별(撇), 날(捺)이 있어 한자와 비슷하다.



여진문자



전통몽골문자는 고대 회흘문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자모가 있는 표음문자(表音文字)이다. 그래서 몽골문의 기초 위에 만들어낸 만주문자는 모양이 올챙이와 같다.

누르하치는 비록 스스로 금왕조의 직계후예라고 했지만, 금나라의 국어인 여진문자를 쓰지 못한다. 이것은 그의 여진인이라는 신분에 의심을 가게 만든다.

그리고, 비록 애신각라들은 입만 열면 '애신각라'가 '금자(金子)'라는 뜻이라고 했지만, <금사>에 기록된 여진족의 성씨를 보면, 완안씨도 있고, 오고륜씨도 있고, 걸석열씨도 있고, 도단씨도 있고, 여해씨도 있고, 올안씨도 있지만...애신각라씨는 없다.

얘기하자면, 여진은 중국동북지방에서 생활하던 오래된 민족이다. 3000여년전에는 '숙신'이라 칭하고, 기원2세기에서 4세기에는 '읍루'라 칭했다. 기원5세기에는 '물길'이라 칭한다. 기원6세기에서 7세기에는 '흑수말갈'이라 칭하고, 기원9세기부터 '여진'이라고 이름을 고친다. 여진이라는 단어는 고대의 여진어 jusen 혹은 julcen에서 왔다. 한자로 음역할 대는 "주리진(朱里眞)", "주신(珠申)", "제신(諸申)"등으로 불렸다. 1115년, 여진족의 완안부 수령인 아골타가 여진부족을 통일하고 짧은 기간내에 요나라의 북방수도 상경을 함락시키고, 금나라를 건립하고, 회녕성을 수도로 삼는다. 그 후에 요나라를 평정하고 송나라를 멸망시키며 중원으로 들어간다.

그래서, 백산흑수에서 생활하던 여진인이 모조리 남하한 후에 중원의 금수강산을 차지한다.

1234년, 몽골인이 계속 공격하자 금나라는 완전히 붕괴된다. 금나라의 상하는 모조리 남으로 도망친다. 테무진은 선조가 금나라의 목려지상(木驢之上)에서 죽은 원한이 있고, 송나라는 정강지치의 원한이 있어, 몽골인과 한인은 모두 여진인에게 뼈에 사무치는 원한이 있었다. 몽골인과 송나라사람은 여진인을 대거 살륙한다. 몽골과 송나라가 번갈아가면서 괴롭히자, 여진인은 혹은 몽골의 부족에 병합되고, 혹은 한족에 섞여 들어간다. 그리하여 하나의 민족으로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 

여기에 한 가지 주의할 만한 현상이 있다: 금나라는 망국에 즈음하여, 왜 계속 남쪽으로 도망쳤을까? 시종 북쪽의 고향으로 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것은 도대체 무슨 이유에서일까?

원래, 여진인이 전 부족을 이끌고 남하한 후, 흑룡강, 송화강, 도문강, 장백산 북부일대는 진공상태가 된다. 이 진공을 메운 것은 더욱 북쪽에서 온 퉁구스원시사회부락군이다. 이들 원시부락군은 계속 동남으로 이주하고, 현지에서 여진에 병합되지 않은 말갈부락과 융합한다. 그리하여 나중의 해서여진(海西女眞), 야인여진(野人女眞)과 건주여진(建州女眞)이 된다.

해서여진, 야인여진과 건주여진은 금나라여진과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다. 즉, 완안아골타가 쓰던 여진어와 누르하치가 쓰던 만주어는 전혀 다른 두 가지 언어이다. 누르하치의 만주어는 완안아골타의 여진문자를 사용할 수 없는게 당연한 일이다. 어떤 언어학자는 이렇게 말한다. 만주어는 알타이어계 만주-퉁구스어족 만주어지에 속한다고 당연히 어떤 사람은 만주어가 만주-퉁구스어족에서 분리하여 만들어진 알타이어계의 독립된 분지라고도 한다. 

그후 후금이 커지면서, 1635년 홍타이시는 명령을 내려 여진이라는 옛 명칭을 더 이상 사용하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부족명을 '만주'로 고친다. 조서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는 원래 만주, 하다(哈達), 우라(烏喇), 휘파(輝發)등의 이름으로 불리웠다. 이전에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왕왕 제신(諸申)이라고 불렀는데, 무릇 제신이라는 것은 석북초묵이근의 후예이다. 실은 우리나라와 관련이 없다. 우리나라는 만주로 부르기로 하니, 통서면연, 상전혁세하라. 지금이후, 모든 사람들은 우리를 만주 원 이름으로 부르고, 이전의 망녕돤 명칭을 쓰지 말라." 

1636년 홍타이시는 '금'이라는 글자를 버리고, 국호도 '대청'으로 고친다.

이렇게 한 것은 한편으로 가짜조상 여진인을 초월했다는 자신감도 드러내고, 다른 한편으로 한족의 자신들에 대한 원한을 약화시키려 했다.

<만문노당>에는 홍타이시가 대릉하수장 조대수에게 보낸 서신도 실려 있다. 서신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금국의 칸이 대장군에게 서신을 보낸다. 이전에 이라마, 방길납등이 왕래할 때, 나는 성심껏 화합하려 했다....그러나 명나라의 여러 신하들은 이전의 송황제를 본받아 한 마디도 회신을 해오지 않았다. 그러나 대명은 송황제의 후예가 아니고, 나도 선금칸의 후예가 아니다..."

여기서 이 말, '대명은 송황제의 후예가 아니고, 나도 선금칸의 후예가 아니다'는 말은 이미 진상을 드러내고 있다고 할 것이다. 이 여진은 그 여진이 아닌 것이다. 후금은 선금의 후예가 아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