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사우춘(史遇春)
절강(浙江) 은현(鄞縣)의 만리안(萬履安) 선생은 이름이 태(泰)이고 이안은 그의 자(字)이다. 호는 회암(悔庵)이며, 청나라 절동학파(浙東學派) 용상지파(甬上支派)의 창시자이다.
청나라초기에 절강의 학술연구는 아주 번성했다. 전당강(錢塘江)을 경계로 하여, 절강의 학술은 절동(浙東)과 절서(浙西)의 둘로 나뉜다.
항주(杭州), 가흥(嘉興), 호주(湖州)지구는 절서학자의 주요 활동지역이다. 대표인물로는 동향(桐鄕)의 장리상(張履祥), 여류량(呂留良), 전당(錢塘)의 응휘겸(應撝謙), 평호(平湖)의 육롱기(陸隴其), 가흥(嘉興)의 주이존(朱彛尊)등이 모두 저명한 학자들이다.
절동의 학술은 주로 여요(餘姚), 은현(鄞縣), 소흥(紹興), 소산(蕭山)등지를 중심으로 하는데, 주요 인물로는 황종희(黃宗羲), 주지유(朱之瑜), 소정채(邵廷采), 소진함(邵晋涵), 전조망(全祖望), 장학성(章學誠), 모기령(毛奇齡)등이 모두 저명한 학자들이다.
절동, 절서학술은 모두 명나라말기 유종주(劉宗周)에게서 나왔고, 경세(經世)를 목적으로 한다.
절서학술은 주로 주희(朱熹)학설을 따라 존주(尊朱)로 경세한다.
절동학술은 사학연구(史學硏究)에 편중되고, 치사(治史)로 경세한다.
장학성은 이 두 가지 서로 다른 학문취향을 이렇게 정리했다: "절서는 박아(博雅)를 숭상하고, 절동은 전가(專家)를 귀하게 여긴다"
절동학파는 절동학술사상의 좋은 전통을 계승 발전시켜, 문호지견(門戶之見)을 고집하지 않고, 널리 겸용하며, 전문가의 학문을 귀하게 여긴다. 그리하여 혁신정신이 풍부하여, '경세치용'을 창도하며, 학술연구는 사회를 위하여 봉사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송학' 및 명청학술중 현학의 하나이며, 중국근현대학술과 해외학술(특히 일본과 동남아)에 큰 영향을 미친다.
만리안 선생은 명신종 만력26년(1598년)에 태어났고, 청세조 순치14년(1657년)에 사망한다. 1갑자를 살았으며 두 개의 왕조에 걸쳐서 살았다.
명사종 숭정9년(1636년), 선생은 향시에 합격하여 거인(擧人)이 된다.
선생은 유종주에게 학문을 배운다.
유종주(1578-165), 자는 기동(起東), 호는 염대(念臺), 한족. 명 소흥부 산음(지금의 절강성 소흥) 사람. 산음 즙산(蕺山)에서 가리켰으므로 학자들은 "즙산선생"이라 칭한다. 명나라 최후의 유학대사이다; 송 명리학(심학)의 전군(殿軍)이다. 그가 개창한 즙산학파는 중국사상사 특히 유학사에서 영향이 크다; 청나라초기의 거유 황종희, 진확(陳確), 장리상등이 모두 이 학파의 전인이다.
만리안 선생은 나중에 복사(復社)에 가입하여 여요의 황종희, 무석의 고고(顧杲), 오현의 양정추(楊廷樞)등과 함께 남경에 모여서 강학을 열며 명절(名節)로 자임한다.
그때 권신인 완대성(阮大鋮)이 다시 등장하여 권력을 농단하고, 선생은 일찌기 <유도방난게(留都防亂揭)>에 서명하여 완대성을 몰아내는데 참여한다. 사림에서는 이를 통쾌히 여긴다. 나중에 호부주사가 된다.
명나라가 망하고, 선생은 난을 피해 섬서(陝西) 유림(楡林)으로 간다. 몸에는 도사의 의관을 했다. 유림이 전란에 휩싸이자 선생은 고향으로 되돌아온다.
청나라병사들이 절강을 함락시킨 후, 선생은 시를 써서 사건을 기록하고 절개를 유지한다. 황종희는 그의 시를 "시사(詩史)"라 칭했다. 옛친구이자 연(燕)지방 사람인 양이장(梁以樟)이 내방하자, 선생은 뜻이 같은 인물 6,7명을 모아서 함께 노래했다. 그 글의 행간에 숨은 의미는 모두 고곡이 처한 상황을 우려하는 내용이었다.
선생은 항청의사(抗淸義士)를 구하는데도 힘을 다했다. 고두추(高斗樞), 이동(李桐), 황종염(黃宗炎)등이 감옥에 갇히자, 선생은 전력을 다하여 구해낸다. 친구들이 출옥한 후, 항주에서 사망하는데, 선생은 그의 관을 운송하여 장례치른다. 말년에는 월동(광동동부)을 유람하고, 배를 타고 돌아오는데, 모견(毛汧)이 전염병에 걸려서 죽게 되었다. 같이 배에 탄 사람들이 모두 못본체 할 때 선생이 혼자서 돌보며 약물을 조제하여 모견이 살아난다. 그러나 선생은 병을 얻어 죽고 만다.
선생에게는 자매가 5명 있었는데, 모두 가난한 선비에게 시집을 간다. 선생은 항상 재물을 도와주었고, 그런 의로운 행위로 명성이 높았다.
선생은 문학에 능하고, 역사에 정통하며, 시를 잘 지었다.
선생은 일찌기 황종희등을 불러서 용상에서 강학을 하게 하고, 나중에 만씨묘장(지금의 백운장)에서 강학을 했다. 후인들은 그 곳을 용상증인서원(甬上證人書院)이라고 불렀다.
저서에는 <만리안행권>, <한송재집>, <명주창화집>, <회섬시>등이 있다.
선생의 문장은 모두 천하의 모범이었다.
선생에게는 여덟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사년(斯年), 사정(斯程), 사정(斯禎), 사창(斯昌, 요절), 사선(斯選), 사대(斯大), 사비(斯備), 사동(斯同). 각자 성취를 이루어 사람들은 "만씨팔룡(萬氏八龍)이라고 불렀다. 그중 만사동이 가장 유명하다.
만씨팔룡은 여요의 황리주(黃梨州) 즉, 황종희에게 사사한다. 8명은 각각 황종희에게 한가지씩 학문을 전수받았고, 자기가 익힌 분야는 정심하게 닦았다.
황리주 선생은 일찌기 이렇게 감탄한 바 있다:
"절동의 문풍이 웅성한 곳으로 만씨만한 곳이 없다."
만씨팔형제 중에서는 만계야(萬季野, 만사동) 선생의 명성이 가장 높다.
만계야는 사학(史學)에 정통했고, 포의로 <명사>의 편수에 전후로 19년간 참여한다. 그는 직함도 없었고, 녹봉도 없었다. <명사고> 오백권은 모두 그의 손으로 만들어진다. 그의 저서에는 <역대사표>, <기원회고>, <유림종파>, <군서변의>, <석원시문집>등이 있다.
곤산서씨(昆山徐氏, 徐乾學, 관직이 형부상서에 이름)의 <독례통고>와 화정왕씨(華亭王氏, 王鴻緖, 관직이 공부상서에 이름)의 <횡운사고>는 모두 서씨, 왕씨의 이름으로 출간되었지만, 이 두 부의 대작은 모두 만계야 선생의 저술이다.
만계야 선생의 해경론사(解經論史)의 저작은 간행되지 않은 것도 아직 많다.
<낭잠기문삼필>의 작자이자 청나라때 절강 은현사람인 진강기(陳康祺)등은 일찌기 만계야선생의 후손인 만후승(萬后丞)의 집에서 만계야선생의 간행되지 않은 저작들을 보았다고 한다.
만후승(1814-1871), 자는 내린(乃隣) 호는 개정(個亭), 몽선외사(夢仙外史), 소위(小渭), 수조자(垂釣者), 절강 영파 은현 사람. 만후현(萬后賢)의 동생. 시재가 청일하고, 그림을 잘 그렸다. 대나무를 그릴 때는 용필이 분명했다. 영모화훼를 그릴 때는 청아하고 귀여웠다. 나중에 감계창당에 거주한다.
만사선 선생의 자는 공택(公擇)이다.
만공택 선생은 이학에 깊이 심취하여 황리주 선생에게 배우고, 즙산 유종주, 양명 왕수인을 계승한다.
만공택은 60살에 죽었는데, 황지주는 통곡을 하며 이렇게 말한다:
"용산에서 즙산의 절학을 떨칠 수 있는 사람은 공택 한 사람뿐이었다."
만사대 선생은 자가 충종(充宗)이다. 선생은 지조가 있고, <춘추>, <삼례> 학문을 깊이 연구한다.
명나라의 충신 장충절공 황언, 부친의 친구인 육부가 죽었을 때 만충종 선생은 모두 그들을 위하여 상복을 입고 장례지내준다.
이고당(업사) 선생은 일찌기 만충종 선생을 이렇게 평가한 바 있다:
"설경무쌍(說經無雙), 명천팔룡(名擅八龍), 석유자명(昔有慈明), 금견충종(今見充宗)"
만사비 선생의 자는 윤성(允誠)이고, 유종주가 죽은 후, 그의 유서는 모두 만윤성 선생이 수장한다.
사산전씨(조망)은 일찌기 만윤성 선생을 이렇게 칭찬한다.
"즙산의 공신이다"
만사년 선생은 자가 조승(祖繩)이고 어려서는 전충절공(숙락) 선생에게 배운다. 금방 상란(喪亂)을 당한다. 그날, 검과 창, 그리고 화살이 온 도시에 난무하는데도 선생은 글을 읽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전란을 피하기 위하여, 선생은 여러번 이사를 간다. 그 동안 가구는 모조리 잃어버렸고, 가져간 수레에 실은 것은 모조리 서적이었다. 선생은 말련에, 도원서원(桃源書院)을 주재한다. 선생은 학자의 천성을 나누어, 각각에게 경전을 전수했다. 왜냐하면 그 재능에 따라서 가르쳐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기로 공부하러 오는 사람이 계속 늘었다. 만조승 선생은 삼당에 모두 은혜가 있어서 전충절공이 해외에서 죽자, 선생이 그의 문집을 수집하고 그를 위하여 후사를 잇게 한다.
만사정(程) 선생은 전력을 다하여 의학(醫學)을 공부했다. 황종염이 처형될 때, 만사정 선생의 부친은 고두괴(高斗魁)등과 기획하여, 암중으로 사형수를 싣고 황종염과 바꿔치기 한다. 그때, 황종염을 업고 암흑 가운데 십리를 달려간 사람이 바로 선생이다.
만사정(禎) 선생은 자가 정부(正符)이고, 효순우제(孝順友悌)했다. 이는 천성이다. 선생은 <주역>에 정통했고, <모시> <춘추>를 공부한다. 서법은 이북해(李北海)에게 배우고, 시는 운치가 있었다.
만사창 선생은 아주 재능이 뛰어났지만, 불행히도 요절한다.
만씨일가는 여러 대에 걸쳐 경의에 정통하고, 품행이 뛰어났다. 그 집안이 학문, 행사, 품행, 도의등은 문자로 기록되어 황리주, 이고당, 전사산, 한촌제집 그리고 군압의 각지에 실려 있다.
양한에서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어라한 문재가법은 백불일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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