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문화/아방궁의 역사진상

아방궁의 역사진상(2): 이년만에 아방궁을 짓는 것은 불가능하다.

중은우시 2018. 2. 23. 01:00

글: 진경원(陳景元)


이방궁의 문제에서, "파"이든 "립'이든, 모두 신중한 문제이다. 모두 각종의 논증을 거쳐야하는 문제이고, 논증중에는 반드시 사실을 가지고 말해야 하고, 증거를 가지고 말해야 한다. 과거에 모택동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불파불립(不破不立), 선파후립(先破候立), 파자당두(破字當頭), 입재기중(立在其中)"(부수지 않으면 세울 수 없다. 먼저 부수고 다음에 세운다. 부수는 것이 앞서야 하고, 세우는 것이 그 안에 있어야 한다) 만일 '삼백리아방궁의 주장이 진정으로 성립되려면, 각종 정확한 자료를 통하여 그 '이년 혹은 십년의 기간동안 아방궁을 완공하였다'는 관점을 '깨야' 한다. 반대로, 만일 '이년 혹은 십년의 기간동안 아방궁을 건설하였다'는 주장이 성립되려면 그 '삼백리아방궁'이라는 말은 깨져야 한다. 전체 연구과정에서 비록 '파'가 앞서지만, '파'가 유일한 것은 아니다. '입'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사람들은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구세계'를 때려부수는 것이 '신세계'를 만드는 것과 같은 의미는 아니다. 이런 변증유물주의의 사고방식이 아방궁의 고고논증에서도 절대로 필요한 것이다.


역사상의 아방궁은 일찌기 시간 속에 매몰되었다. 당시의 건축장인들은 비록 모두가 총명하기 그지없었고, 기술이 정교하고, 재능이 뛰어났지만, 당시 그들 대부분은 죄수였다. 사회의 지위가 아주 낮았고, 문화수준도 낮았고, 글자를 아는 사람도 적었고, 말을 전할 줄도 몰랐다. 그래서 아방궁의 건축 자체는 후세인들에게 아무런 문자기록도 남겨주지 않았다. 수처년동안 그 어느 진정한 건축학자도 공사기술의 각도에서, 아방궁의 건설과 관련한 기술적인 문제를 진지하고 계통적으로 연구해보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중국고대의 '대표적'인 건축물인 아방궁에 대하여 사람들이 '그것이 있었던 것은 알지만 그것이 어떠했는지는 모른다"는 상황이 되었다. 이는 건축사상의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다. 황금보다 귀한 건축가들은 모두 다른 큰 일을 하러 떠났고, 아방궁에 관한 발언권은 자연히 언어능력이 심후한 문인학사들이 갖게 되었다. 그렇게 되니, <사기>의 "이년, 혹은 십년만에" 아방궁을 건축하였다는 기록을 '깰' 가능성은 없어진 것이다.  


그러나, "삼백리아방궁'이라는 주장은 원래 <삼보황도>등 사료의 기재를 근거로 한 것이다. 여기에 두목의 <아방궁부> 및 아방궁과 관련한 많은 문학, 희극, 회화등 작품에서도 널리 지지받고 인정받고 있다. 다만, 진시황의 높고 큰 정치적 이미지에 대한 무한한 경외와 존중에서,그리고 봉건제왕의 권력이 신비화 절대화되었기 때문에 그 결과로 모든 공사기술상 불가능한 일도, 모두 초자연적인 역량으로 대체되어버리는 것이다. 즉, 사람들에게 이미 습관되어버린 아방궁의 전통적인 이미지를 바꾸려면 완전히 불가능해 보인다. '삼백리아방궁'도 좋고, 진시황이 '이년 혹은 십년만에 아방궁을 건설하였다'도 좋다. 그저 경전적인 거작이 근거가 되기만 하면, 후인들이 사요에 대하여 시비논쟁이 있건 말건, 그들간에 아무리 큰 모순현상이 존재하든 말든, 일률적으로 아방궁의 이야기안에 담아버리는 것이다. '파'와 '립'에 대하여 그들은 아예 관심도 없다.


이년, 십년만에 아방궁을 건설하였다는 글은 바로 이런 배경하에서, 사마천이 <사기>라는 책에 썼다. 사마천은 책의 제목에 '사(史)'라고 붙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게 진실이라고 믿어버리는 것이다. 후인들은 아방궁의 건설을 모조리 진시황 한 사람이 한 것으로 본다. 실제로 '삼백리아방궁'의 건설규모는 글자 자체로만 보더라도 전세계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할 만하다. 그것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고금중외의 그 어느 궁전, 그 어느 도시의 점뮤변적보다도 훨씬 크다. 그렇다면, 전면적으로 되돌아보면서 고찰해야 할 것이다. 중국을 포함한 세계각국의 역대왕조의 어느 대규모 도시, 어느 대규모 제왕궁전이 짧은 몇년의 시간만에 모조리 완공된 적이 있는지. 그리고 사용하게 되었는지. 알아야 할 것은 어떤 고고학자는 동서, 남북 각 15리, 주위둘레 60리의 진릉건설공사를 37년이 지나도록 완공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런데, "삼백리아방궁"은 순식간에 완공했단 말인가?


자고이래로, 궁전건설은 중단된 적이 없다. 대비할만한 자료는 아주 많다. <신서>의 기록에 따르면, 중국의 은상시기 "주위녹대(紂爲鹿臺), 십년내성(十年乃成), 대삼리(大三里)"(주왕이 녹대를 만드는데 10년만에 완공했다. 크기는 삼리이다); <제왕세기>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주작경궁(紂作傾宮), 칠년내성(七年乃成), 대십리(大十里)(주왕이 경성을 만드는데 7년만에 완공했다. 크기는 십리이다). <술이기>, <월절서>의 기록에 따르면 춘추시대 "오왕 부차가 고소대를 건축했는데, 횡으로 오리에 걸쳐 있다(橫亘五里)" "삼년동안 목재를 모으고 오년만에 완공했다. <오월춘추>의 기록에 따르면, 오나라는 월나라에 승리를 거둔 후, 월왕 구천이 진공한 '목재'로 고소궁을 만들었다. 부진륜(傅振倫) 선생이 1955년에 제4기 <고고통신>에 발표한 <연하도발굴품의 초보정리와 연구>라는 글을 보면, 전국시대 연나라 하도(下都)의 방대한 궁전건축은 연소왕(燕昭王)때부터 시작했는데, 전후로 80여년의 기간이 들었지만, 여전히 완공하지 못했다.


서한 무릉읍(茂陵邑)은 동서로 1500미터, 남북으로 700미터이고, 기원전139년부터 시작하여, 52년의 시간이 들었다. 산서 오대산위의 360곳의 아름다운 사묘(寺廟)는 한명제부터 시작하여 수백년의 시간을 들여서 완공되었다. 중국과 외국에 유명한 만원지원(萬園之園)이라는 원명원(圓明園)은 주위가 30여리이고, "오보일루(五步一樓), 십보일각(十步一閣)"의 건축배치인데, 이는 '삼백리아방궁'의 축소형이라고 할 만하다. 그것은 청나라 강희48년(1709년)에 시작하여 청나라 함풍10년(1860년)까지 전후로 150여년의 시간을 들여서 만들었다. 다섯명의 황제를 거치면서 겨우 완공한 것이다. 다시 청나라의 승덕행궁(承德行宮), 즉 피서산장(避暑山莊)의 건설공사는 주위 40여리인데, 그것은 청나라 강희42년1703년)부터 시작하여 청나라 건륭55년(1790년)까지 전후로 87년의 시간을 들여서 준공하였다. 라싸 홍산의 포탈라궁도 1645년부터 시작하여, 5세 달라이라마가 시작하였는데, 전후로 48년이 기간이 소요되었다.


외국의 궁전건축공기는 어떠한가? 예를 들어, 프랑스의 베르사이유궁전은 면적이 겨우 1.11평방미터인데, 1204년에 시작ㅎ여 1689년에 완공된다. 400여년의 시간이 든 것이다. 파리의 루부르궁은 르네상스식의 궁전건축인데, 점유면적이 겨우 15만평방키터이다. 그것은 1546년에 시작하여 1857년에 전부 완공된다. 전후로 300년의 시간이 들었다. 영국의 버킹검궁은 1703년에 시작하여 1837년에 완공되어 134년의 시간이 들었다. 러시아의 크레믈린궁은 주위가 2.2킬로미터인데, 1547년에서 1849년까지 모두 302년의 시간이 들었다. 다른 세계의 유명한 건축물들로는 영국 런던의 세인트 폴성당은 1675년-1710년까지 35년이 걸렸고, 프랑스 파리의 노트르담사원은 1163-1345년까지 182년이 걸렸다. 이탈리아의 피렌체대성당은 1296년-1436년까지 140년이 걸렸고, 로마의 성베드로대성당은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건축인데, 1506-1626년까지 120년이 걸렸다.


건축 자체는 허환(虛幻)의 물건이 아니다. 더더구나 문인학사들이 기묘한 상상력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인류가 기나긴 생존의 길에서 계속하여 형성되는 볼 수도 있고 만질 수도 있는 공사실체인 것이다. 원시사회의 선조들은 천연암동에서 거주하거나 나무 위에 인공집을 짓고 거주하기 시작했다. 나중에 지하, 반지하의 토갱혈거에서 생활했다. 강소의 비현, 섬서의 무공현에는 모두 석기시대의 도옥소모형이 출토되었다. 규모로 보면, 방은 이미 지면에 건설되고, 벽이 있고, 문이 있고, 창이 있고, 지붕이 있다. 건축구성의 기본요소는 모두 갖추었다. 노예사회로 들어선 후 은상시대에는 간이한 궁전건축이 나타난다. 그러다가 춘추전국시대에는 목조구조의 중국궁전건축체계로 발전되어 이미 완전히 성숙된다. 두공(斗拱), 채화(彩畵)가 모두 정식으로 궁전건축에 나타난다. 진한시기에 이르러, 궁전건축의 체형은 확실히 방대해지고 호화스러워진다. 충분한 인력, 시간과 재료만 있다면, 공사기술이 허가하는 각종 건축을 지을 수 있었다.


중국이건, 외국이건, 원시사회에서 현재까지, 건축기술의 진보와 발전은 모두 느렸고 점진적이었다. 모두 없는 것에서 있는 것으로,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 간단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미비된 것에서 완비된 것으로의 과정을 거쳤다. 매 시기마다 서로 다른 건축기술이 있었고, 후대의 건축은 전대의 건축을 넘어설 수 있지만, 전대의 건축은 후대의 건축을 넘어설 수 없다. 이런 건축법칙은 누구도 어길 수 없다. 비교를 해야 감별을 할 수 있다. 각종 궁전건축공기를 대비연구해보면 이런 결론을 낼 수 있다. 겨우 '이년, 혹은 십년의 시간'을 들여서, '삼백리아방궁'을 만드는 것은 조그만치의 가능성도 없는 얘기라는 것을. 진시황이 지고무상의 권력을 지녔다고 하더라도, 제왕의 절대적 위엄이 있다고 하더라도, 모든 인력을 동원할 수 있고 모든 건축재료를 얻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시간과 기술에서의 주도권은 장악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그가 얼마나 정확한 국가발전계획을 가지고 있든, 그가 얼마나 두터운 경제력을 가지고 있든, 결국은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다.


왜 역대제왕들은 궁전을 건축하는데 왕왕 수십년, 수백년이 걸렸는가? 그것은 바로 제왕이 지으라고 명령한 궁전은 모두 최고등급의 건축이고, 면적도 넓고 호화사치스럽고, 목적이 제왕의 위엄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다. 진이세(秦二世)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무릇 천하에서 존귀한 사람은 그의 욕심을 마음대로 채워야 한다. 한나라때의 재상인 소하는 한고조 유방에게 이렇게 종용한다. 제왕궁전을 만들면서 장려(壯麗)하지 않으면 위엄이 서지 않습니다. 그 뜻은 제왕이 쓰는 궁전은 반드시 가장 좋고, 가장 웅대한 건축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그 건설과정에서 반드시 가장 좋은 풍수길지를 선정하고, 반드시 가장 엄격한 설계배치를 하고, 반드시 가장 좋은 나무를 베어오고, 반드시 가장 선진적인 시공기술을 사용하고, 가장 우수한 건축장인을 불러모아야 한다. 결론적으로 반드시 모든 것이 최고여야 했다. 그러나, 부지선정문제, 설계문제, 계획문제, 시공문제는 명령을 내린다고 바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벌목문제 하나만 하더라도 하루아침에 쉽게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아방궁을 건설하는데 어떤 목재가 필요할까? <한서.가산전>에는 명확히 기록하고 있다. "아방궁의 전(殿)은 높이가 십인(十仞)이다." 진한때는 5척6촌이 1인(仞)이다. 1척은 0.23센티미터이다. 이를 보면 아방궁 주전(主殿)의 나무기둥은 굵고 높아야 했다. 바로 왕중언이 <자녕전부>에서 말한 그대로이다. 제왕궁전에 쓰는 것은 모두 "천년지산(千年之産), 만년지재(萬年之材)"이다. '촉산올, 아방출'과 <사기.진시황보기>에서 '작아방, 사촉형지재'라는 기록을 보면, 이들 거목은 어느 곳이나 다 있는 나무가 아니다. 아방궁의 목재는 사천의 심산노림에서 벌목해 온 것이다. 사천의 어느 곳에 '천년지산, 만년지재'의 목재가 있었을까? 사천역사상 저명한 벌목지구는 하나가 강정(康定) 타전로(打箭爐)이고, 하나가 검각(劍閣) 취운산(翠雲山)이다. 이곳의 나무는 직경이 2미터 이상의 고백(古柏)이다. 나무의 직경이 1-2미터 되는 큰 나무를 곳곳에서 볼 수 있다. 현지사서이 기록에 따르면, 진나라아방궁은 대량의 거목을 벌목한 후, 산위에 다시 대량의 '황백(皇柏)'을 심었다고 한다.


벌목할 곳을 찾았는데, 그렇다면 벌목상황은 어떠했을까? 이 곳들은 교통이 편리한 평지가 아니다. 수레를 끌거나, 말을 끌거나 사람이 옮기거나 모두 장애가 많다. 천년거목은 모두 인적이 드문 원시삼림에 있다. 산과 언덕이 험하기 그지없고, 맹수들이 출현한다. 감독하는 관리나 벌목노동자는 위험을 감수하고 산으로 들어가야 하고 거기서 목숨을 잃게 된다. 후세에 이런 말이 있다. "산으로 천명이 들어가면 나오는 건 오백이고, 경사까지 도착하는 사람은 일백이다." 이는 벌목하는 사람의 피눈물나는 호소이다. 저명한 건축학자 유돈정(劉敦楨)은 <동치중수원명원사료>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역대이래 대형공사는 목재를 구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일로 여겼다. 큰 나무는 기둥과 대들보로 쓰는데, 수량이 가장 많이 필요하다. 그러나 채집이 쉽지 않아, 대형공사에서 가장 큰 난점이다. 산에 들어가 벌목하는 것은 여러 해를 하지 않으면 산에서 가져나오지 못한다." <양궁정건기.대목부록>에서도 명확히 기록하고 있다: "남삼대목(楠杉大木)은 사천, 귀주에서 생산된다. 관리를 보내어 채집하는데, 4,5년이 되어야 경사에 도착한다." 이것은 후대인 명,청시대의 일이다. 산에 들어가서 벌목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알 수 있다. 하물며 진나라때의 벌목은 더욱 어려웠을 것이다.


벌목한 큰목재를 사천에서 함양까지 운송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세상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사천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산들이 높고 험하다. 사천과 섬서의 사이에는 진령이 가로막고 있고, 절벽과 깊은 골짜기가 있다. 사람의 힘으로 옮기기가 어렵다. 만일 촉도를 통하여 섬서로 간다면 그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곳은 그저 좁은 산길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촉도난, 난어상청천(蜀道難, 難於上靑天)"이다. 만근무게의 거목은 이곳으로 통과할 수가 없다. <간주부지(赣州府誌)>를 보면, "상락산(上洛山)에는 목객(木客)이 있는데, 스스로 말하기를 진나라때 아방궁을 짓다가 이곳으로 피해 숨었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사천에서 벌목한 후, 운송하는 과정에서 나무로 뗏목을 만들어 강물을 통해 장강중하류까지 보냈다. 일부분 '목객(나무를 벌채하고 운송하는 사람)'은 나무를 잃어버려서, 살 수가 없다고 보고 벌받는게 두려워 강서 간주 상락산으로 도망쳐 숨어있었다는 뜻이다. 이를 보면, 사천의 목재는 크고 작은 하천을 통해 장강으로 유입된 후 호북의 평탄한 지대까지 옮긴다. 그리고나서 북으로 하남을 넘어 낙양을 거쳐 효산, 함곡, 동관을 거쳐 최종적으로 함양의 공사부지에 도착하는 것이다.


수로는 강물이 계속 흐르고, 육로는 대량의 인력으로 천천히 나가야 한다. 이는 <용재수필>에 분명하게 적혀 있다: "아방궁을 만들 때, ...가까운 산에는 큰 나무가 없었다. 모두 먼 곳에 있었다. 이천명이 기둥 하나를 끈다. 나무를 바퀴로 삼으면 쉽게 할 수 있다. 기둥 하나를 옮기는데 이미 수십만의 공을 들여야 한다." 이를 보면 설사 평탄한 곳이라고 하더라도 이천명이 큰 나무기둥 하나를 옮겨야 한다. 구릉지대를 만나면, 도로를 평판하게 정리하여야 한다. 이것도 시간과 인력이 드는 일이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수나라에서 낙양궁전을 건축하는데, 예장(지금의 강서성)에서 큰 나무를 운반해 왔다. 3000명이 기둥 하나를 운반하는데 하루에 겨우 2,30리밖에 갈 수 없었다. <지전록>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개성회창연간에 함원전의 기둥 하나를 바꾸는데, 우군에 명해서 나무를 벌목해오도록 시켰는데,  주질(盩厔)의 임장(林場)으로 가서 여러해가 되도록 완성하지 못했다." 여기에서 얘기하는 것은 당나라때 함원전에서 기둥 하나를 교체하는데 인근의 임장에서 벌목하는데도 여러해동안  완성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이러함에도 <사기>의 기술에 문제가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총명한 사람이라면 분명히 새로운 문제를 발견했을 것이다. 여러 사료에 따르면, 아방궁을 만들 때 사용한 목재는 사천의 원시삼림에서 벌목했다고 한다. 그러하면 문제가 나타난다. 첫째, 만일 진왕조가 존속한 10여년의 기간내에 목재조차도 벌채할 수 없는데, 사천에서 함양까지 운송하는 이 모든 것은 분명히 진시황의 통일육국이전에 발생하여야 한다. 그가 육국을 통일하기 이전에 사천은 일찌감치 진나라의 판도에 들어가 있었는가. 둘째, 사천의 목재라면 진령의 험준한 산을 넘어 운송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반드시 모든 목재를 강으로 흘려내려보내어 호북의 지점에서 건녀내야 한다. 그러나, 그곳은 진나라와 싸우고 있는 초나라의 통치지역이다. 초나라사람들이 이런 거대한 목재가 순조롭게 자신의 영토를 지나가도록 놔두었을까? 이들 문제는 아주 골치아프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확실히 해결방법이 없다. 이 문제를 확실히 해결하기 위하여, 반드시 두 가지 조건이 전제되어야 한다. 사천이 진나라에 귀속되어야 하고, 진나라와 초나라가 우호적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