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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아방궁의 역사진상

아방궁의 역사진상 (1): 아방궁 "삼백리"는 가능한가.

by 중은우시 2018. 2. 23.

글: 진경원(陳景元)


만일 중국 대부분의 경전적인 사료를 뒤져보면 언제든지 찾아볼 수 있다. '아방궁(阿房宮)'이라는 세 글자를. 항상 진시황의 이름과 같이 나오며 둘은 굳게 연결되어 있다. 소위 "진황위무도(秦皇爲無道), 작아방지궁(作阿房之宮)"; "진축아방(秦築阿房), 영성이전(赢姓以顚)"; "아방(阿房), 아방(阿房), 망시황(亡始皇)"; "진흥아방지전(秦興阿房之殿), 이천하란(而天下亂)"; "장화성이초중반(章華成而楚衆叛), 아방출이진인리(阿房出而秦人離)"; "요조아방궁(窈窕阿房宮), 만태횡청운(萬態橫靑雲), 형황갑을장(熒煌甲乙帳), 일조나긍분(一朝那肯焚)"; "초왕장화일신하기(楚王章華一身何寄), 진황아방이세이기(秦皇阿房二世而棄)"; 진시황불축도덕지기(秦始皇不築道德之基), 이축아방지궁(而築阿房之宮)"; "진시황작아방(秦始皇作阿房), 이세이멸(二世而滅)"; "진시황작아방궁(秦始皇作阿房宮), 역도칠십만인(役徒七十萬人)"; "진작아방이궁치미(秦作阿房而窮侈靡), 한궁미앙이자존영(漢宮未央以自尊榮)". 이와 유사한 시사, 문장과 기타 문자는 수천, 수만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진시황이 아방궁을 만들었다"는 것은 2000여년의 세월에서 일찌감치 역사상 철의 정설이 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의 궁전건축 중에서 어느 것이 가장 유명하고 어느 것이 가장 잊기 힘든지를 물어보면 답은 단지 하나이다. 그것은 바로 아방궁말고는없다. 만일 중국에서 누구의 작품이 가장 환영받는지 가장 감동적인지 물어보면, 답은 단지 하나이다. 그것은 바로 두목(杜牧)이 쓴 <아방궁부(阿房宮賦)이다. 누구든지 <아방궁부>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모두 두목의 그 깊이있는 의경(意境)에 도취되고 감염된다. 사람들은 그가 왜 반드시 <아방궁부>를 써야했는지 알고 있는가? 두목은 당나라의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이다. 그는 사람됨이 "강직(剛直)하고 기절(奇節)했으며, 감히 여러 대사를 논하고, 이로운 점과 해로운 점을 설명하는데 특히 뛰어났다." 그는 여하한 정치가, 군사가, 시사문인보다 더욱 잘 알고 있었다: 역대왕조의 군왕중에서 무릇 사치와 욕망을 다하기 위하여 대거 토목공사를 벌여서 백성들을 힘들게 하면 모두 위험한 길로 들어서는 것이라고. 그가 <아방궁부>를 쓴 원래의 취지는 역사상의 아방궁을 조롱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당경종에게 "애이감지(哀而鑒之)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진나라에서 민력을 소모하다가 망국에 이른 참혹한 교훈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었다. 이는 문인의 우국, 우민이고 황제에게 고언하는 하나의 수단이었다.

 

《阿房宫赋》:“六王毕,四海一,蜀山兀,阿房出。覆压三百余里,隔离天日。骊山北构而西折,直走咸阳。二川溶溶,流入宫墙,五步一楼,十步一阁,廊腰缦回,檐牙高啄,各抱地势,钩心斗角。盘盘焉,囷囷焉,蜂房水涡,矗不知其几千万落。长桥卧波,未云何龙?复道行空,不霁何虹?高低冥迷,不知西东。歌台暖响,春光融融;舞殿冷袖,风雨凄凄。一日之内,一宫之间,而气候不齐。妃嫔媵嫱,王子皇孙,辞楼下殿,辇来于秦。朝歌夜弦,为秦宫人。……雷霆乍惊,宫车过也。辘辘远听,杳不知其所之也。一肌一容,尽态极妍。缦立远视,而望幸焉,有不得见者三十六年。……管弦呕哑,多于市人之言语。使天下之人,不敢言而敢怒。独夫之心,日益骄固。戍卒叫函谷举,楚人一炬,可怜焦土!”


아방궁의 점유면적은 얼마나 넓었을까? 한나라때 사람이 쓴 <삼보황도(三輔黃圖)라는 책을 보면, 아방궁에 대하여이렇게 적고 있다: "규획이 삼백리나 되고, 이궁,별관이 산에 가득하고 골짜기를 넘는다. 수레가 다니는 도로가 서로 연결되어 있고, 전각과 도로가 여산 팔십여리에 통해 있다" 그래서 두목은 이를 근거로 말한 것이다: 아방궁은 "복압삼백리(覆壓三百餘里, 삽백여리의 땅을 뒤덮었다)"라고. 모택동도 이를 근거로, "아방궁삼백리"라는 말을 한다. 중국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의 연구원 이육방(李毓芳) 선생은 여러해동안의 고고발굴공작을 거쳐, 아방궁의 전전(前殿) 유적지의 서쪽에서 대형의 정치한 '진상림원(秦上林苑)'의 경관원림건축유적지를 발견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아방궁의 '후화원(後花園)'이라고 한다. 그녀는 명확히 말했다. "이 아방궁의 후화원 점유면적은 전체 상해시면적보다도 훨씬 크다." 2004년 상해시의 행정구역상 점유면적은 780평방킬로미터에 달한다. 아방궁의 후화원이 이 정도의 크기에 달한다면, 아방궁의 주체궁전 점유면적도 분면히 아주 클 것이다.


아방궁의 비교적 정확한 위치는 도대테 어느 구체적인 경계선내에 들어 있었을까? 나중에 일부 사람들은 강하게 말한다. 아방궁 '삼백리'라는 설은 완전히 두목이 <아방궁부>에서 일종의 과장과 상상으로 만들어낸 것이라고. 그러나 기실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한나라때 사마천의 <사기.진시황본기>에 이미 "전전아방(前殿阿房), 주치위각도(周馳爲閣道), 자전하직지남산(自殿下直至南山), 표남산지전이위궐(表南山之顚以爲闕), 위복도(爲復道), 자아방도위(自阿房渡渭), 속지함양(屬之咸陽)"이라는 기록이 있다. 그 뜻은 위수(渭水)의 남쪽으로 남산의 최고봉까지 직접 연결되는 곳이 모두 아방궁의 점유부지라는 것이다. 납북방향의 위치는 이렇게 확정된다. 그렇다면, 동서방향의 경계는 어떠할까? 동한말기 이미 세상에 나온 진한시기의 지리전문서적 <삼포황도>라는 책에서 명확히 기록하고 있다: "상림원(上林苑), 소지구원야(素之舊苑也), 동남지난전(東南至蘭田), 이서지장양오작(而西至長楊五柞), 북요황산(北繞黃山), 역위수지동(歷渭水之東), 주무삼백리(周袤三百里)". 보기에 두목이 <아방궁부>에서 얘기한 것은 근거가 있는 것이다.


아방궁의 시공규모는 도대체 얼마나 될까? <사기.진시황본기>에는 명확히 기록되어 있다. "작궁아방(作宮阿房), 고천하위지아방궁(故天下謂之阿房宮), 은궁도형자칠십여만인(隱宮徒刑者七十餘萬人), 내사촉형지재개지(乃寫蜀荊地材皆至)" 그 뜻은 아방궁의 건설공사에 참여한 인원은 칠십여만명이고 필요한 엄청난 수량의 목재는 모두 사천, 호북지방의 심산밀림에서 벌목했다는 것이다. 이는 두목의 <아방궁부>에서 묘사한 "촉산올(蜀山兀), 아방출(阿房出)"의 정경과 대체로 들어맞는다. 여러 문자자료의 묘사를 보면 '삼백리' 범위내에서 기능이 서로 다른 궁전건축군이 있는 외에 환경이 아주 아름다운 제왕의 후화원도 있고, 특히 아방전전의 북쪽에 있는 정문의 바깥에는 반듯하고 나란히 12개의 동인을 세워 두었다. 일부 궁전의 높은 기둥은 청동을 부어서 만들었다. 이 모든 것은 황권제도와 건축환경이 합ㅊ져서 진제국이 여러 군웅을 압도하고 불가일세라는 기백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진나라 아방궁을 역대제왕의 궁전과 비교하자면 확실히 몇 단계는 수준이 높다. 아방궁은 중화민족물질문명과 정신문명의 중요한 표지라 할 수 있다. 이천년이전의 중국건축에서 최고수준이 집중적으로 표현되었다. 고대의 총명하고 지혜로운 건축가들이 자신의 피눈물, 재화와 헌신정신으로 만든 노동의 결정체이다. 아방군의 건축은 중국 내지 세계상 그 어느 고대제왕궁전과 비교하더라도 후인에게 남긴 사료가 가장 많고, 가장 완전하다. 아방궁과 관련된 문자자료, 각종작품, 연구성과도 가장 풍부하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아방궁'이라는 세 글자가 사람들의 시선에 나타날 빈도는 역대이래로 가장 높다. 아방궁과 관련한 자료가 전파되는 면적도 아주 넓다. 아방궁이 가진 지명도가 이렇게 높다. 그래서 아방궁의 존재 자체는 확실하고 신뢰할만한 사회인문적 기초가 있다. 어느 때건 어느 사람이건 그것을 부정하거나, 뒤집으려고 한다면 그 가능성은 아주 미미할 것이다.


아방궁과 중국의 역사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사람들의 사회생활과 이미 충분히 하나로 융합되어 있다. 이는 모두 회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만, 이것이 아방궁과 관련한 역사적 진상이 이미 완전하고 철저하게 모조리 사람들 앞에 드러났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문제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실제상황은 이렇다. 각종 경로를 통하여 찾은 아방궁과 관련한 자료가 실제로 너무나 많다. 너무 많아서 이미 진위를 가리기 어려울 정도이다. 여러가지 서로 다른 주장들이 혼재한다. 어떤 사람은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른지, 어느 것이 옳은 와중에 틀린 부분이 있고, 어느 것이 틀린 와중에 옳은 부분이 있는지를 분명히 알지 못한다. 만일 이렇게 올고 그른 것을 철저히 구분하지 않으면, 아방궁의 역사적 진상은 그저 짙은 안개로 덮여있게 될 뿐이다. 일반인에게 있어서, 알고 있는 자료가 그다지 많지는 않다. 아방궁의 많은 대립되는 견해와 모순되는 현상에 대하여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지도 않는다. 다만 전문가에게 있어서 많은 미해결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아방궁의 사료에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가 들어있는가? 세간의 사물은 항상 기이한 것이 많다. 사람의 사고는 당연히 약간 복잡해야 좋다. 사실은 증명한다 사람이 진지하게 객관적으로 아방궁에 관한 각종 문자기록을 살펴본다면, 즉시 여러가지 불가사이한 괴이한 현상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사기.진시황본기>에는 이렇게 기록한다. 아방궁을 건설하기 시작한 시간은 진시황35년(기원전212년)이라고, 그런데, 2년후에 진시황은 동순(東巡)하는 도중에 하북의 형대지구에서 사망한다. <사기.육국년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진시황은 "27년(기원전219년) 아방궁을 건조했다. 이를 보면 아방궁을 만든 시간에 모순이 발생한다. 전자는 겨우 2년의 기간이고, 후자는 겨우 10년의 기간이다. 설마 진시황이 이렇게 짧은 시간내에 규모가 이렇게 거대한 '둘레가 300리에 달하는" 아방궁을 만들 수 있었을까? 이년만에 건조한 아방궁이라면 신화라고 봐야하지 않을까?


유감스러운 점은 2000여년동안 건축학이나 공사기술의 각도에서, 아방궁의 건설에 대한 완전한 역사를 합리적인 논리를 통하여 연구하고 사고하지 않았었다는 것이다. 진시황이 이년 혹은 십년만에 아방궁을 건설했다는 이런 주장이 그다지 큰 의문이나 문제제기를 받지 않았다. 그 원인을 따져보면 두 가지일 것이다: 하나는 학자들이 지나치게 봉건왕조의 지고무상의 황권의 위력을 미신하고 굴종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황제가 말을 하기만 하면 세상에 하지 못할 일은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둘째는 지나치게 고대문자기록의 사학기능을 숭상해서 무릇 고서에 쓰여있는 글자라면 모조리 쓸모있고, 정확하며 헤아릴 수 없는 사학적 가치를 지닌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사상과 이념이 강력하게 지배함에 따라, 많은 작가, 역사학자, 고고학자는 그들이 찾을 수 있는 각종 고서자료를 전혀 따ㅣ지 않고 잘라모아서, 다시 자신의 각종 기교로 교모히 정히, 해석, 연결시키고 상상력을 발휘하여 무수한 문학작품, 역사논문과 고고학거작을 만들어낸 것이다. 


책에 쓰여 있는 것은 모두 옳다. 모두 100% 믿어야 한다. 모두 조상이 남겨준 역사이다라고 여기는 것이다. 예전의 모택동은 이에 대하여 예리하게 비판한 바 있다. 그는 말했다: "이런 태도로 책을 읽는 것은 읽지 않는 것만 못하다. 독서라는 것은 첫째 읽고, 둘째 의심하고, 셋째 반대의견을 제기해야 한다. 그냥 읽기만 해서는 안된다. 책을 읽고도 의심할 줄 모르면, 서로 다른 의견을 제기할 줄 모르면, 그것은 헛 읽은 것이다." 그는 또 이런 말도 했다: "책에 쓰여 있다고 무조건 옳다고 여기는 것은 문화가 낙후한 중국에서 지금까지 존재하는 심리이다. 공산당내에서도 문제를 토론할 때 어떤 사람은 입만 열면 '책에는 이렇게...'리고 얘기한다. 오랜 혁명가인 진운(陳雲)동지는 '윗사람이 말하느대로가 아니고, 책에 쓰여있는대로가 아니고, 오로지 실제있는대로"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칭찬할만한 말이다. 왜냐하면 오직 실제있는대로 실제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래서 실사구시적으로 문제를 연구하고, 문제를 처리해야 한다. 그래야 의지할 수 있다. 저명한 경제학자인 우광원(于光遠)도 이렇게 말한 바 있다: "학자가 학자로 되는 것은 글자를 한자 한자 씹기 때문이다. 나는 스스로 비판해보지 않은 언어를 사용한 적이 없다"


그렇다면, 아방궁의 건설공사에 대하여 어떻게 그 허실과 진위를 판결해야 할 것인가. 어떻게 이전의 여러 아방궁에 관한 '사료'를 진지하고 과학적으로 한자한자 씹어볼 것인가. 또 어떻게 일종의 '유실(唯實), 구실(求實)"의 정신으로 아방궁건설의 시시비비를 살피고 고찰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자신이 비판해본 언어로 이전의 연구와 같지 않은 아방궁에 대한 새로운 관점과 견해를 의심하고 제출하고 시정할 것인가. 이들 문제는 과거에 아무도 말하지 않은 것이다. 누가 이런 말을 했다면, 이런 의문이 있다는 의견을 제기했다면 즉시 웃음거리가 되었을 것이고, 미치광이로 배척당했을 것이다. 학계를 장악하고 있던 패주(覇主)들은 이렇게 소리쳤을 것이다: 책을 가져와라 그렇지 않으면 말도 꺼내지 말라. 한 젊은이가 40여년동안 적지 않은 권위자에게 아방궁에 관한 문제를 물어본 바 있다. 여러 간행물에 아방궁에 관한 의문을 글로 써서 기고한 바 있다. 그러나 북경, 상해, 서안의 관련부서는 이런 류의 글을 한번 보면 마치 대적을 상대하는 것처럼 문밖으로 몰아낸다. 새로운 사람이 새로운 의견을 내는 것은 하늘에 오르는 것보다 어렵다.


아방궁을 얘기하면, 사람들은 모두 그것은 고고학자, 역사학자가 연구할 분야라고 말한다. 어떤 학술의 권위자는 까놓고 이렇게 말했다; 아방궁에 관한 연구는 순수히 역사학, 고고학의 문제이다. 다른 문외한인 사람 특히 역사학을 모르고, 고고학을 모르는 사람은 나서서 시끄럽게 만들지 않는 것이 좋겠다. 그래봐야 재미가 없다. 이런 견해는 극단적으로 책임지지 않는 태도이다. 아방궁은 전체적으로 봐서, 건축학, 건축사상의 문제이고, 공사기술연구의 문제이다. 건축학을 모르고, 건축사를 모르고, 공사기술을 모르는 사람은 가급적 나서서 뭐라고 하지 않으면 좋겠고, 각종 기괴한 얘기를 만들어내지 않으면 좋겠다. 당연히 역사상의 모든 궁전건축은 모조리 건축가의 손에서 나왔고, 건축장인의 손으로 만들어 졌다. 그들이야말로 고대건축정수의 창조자이고 증인이다. 그들은 고대건축에 관하여 가장 큰 발언권을 지니고 있다. 일단 고대건축문자기록과 공사기술의 한계로 서로 모순이 발생하고 대치할 때, 건축학자의 의견이 당연히 우위를 점할 것이다.


아방궁의 사료와 건축기술실무는 도대체 어떤 중대한 문제에서 서로 부딛치는가. 먼저, <사기>등 사료에 기재된, "이년 혹은 십년의 시간"동안 방원 '삼백리'의 아방궁을 만들어 세계역사상 규모가 가장 큰 제왕의 궁전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약간의 이성을 가지고 혹은 약간의 건축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바로 드는 생각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만일 <사기>에 기록된 내용의 신뢰성과 권위성을 굳게 믿는다면, 먼저 철저히 '삼백리'기록의 허위성과 무단성을 부정해야 한다. 반대로 현재 고고부문의 현지조사를 거쳐 아방궁의 후화원이 확인되었는데, 전체 상해시지역보다 넓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년, 혹은 십년의 시간'안에 아방궁을 건설하였다는 사료는 철저히 부정하여야 한다. 보기에, '이년, 혹은 십년의 시간'과 '삼백리'라는 규모의 사이에는 모순과 충돌이 있다. 조화될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이다.


일반적인 상황하에서, 동일한 역사사건 혹은 동일한 건축유적지에 대하여, 두 가지 전혀 다른 문자기록이 존재하면, 이렇게 얘기할 수 있다. 정확한 것은 단지 하나뿐이다. 다른 것은 분명 잘못되었다. 그러므로 반드시 버리거나 시정해야 한다. 사람들은 실사구시의 정신으로 역사를 대하고 역사를 인식하고 역사를 연구해야 한다. 모든 것은 사실로 말해야 한다. 모든 것은 증거로 말해야 한다. 당연히 많은 경우에, 문제를 발견하기는 쉽다. 예를 들어, "이년의 시간만에 아방궁을 건설하였다"는 주장은 한번 보기만 해도 부정확하고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아방궁건설의 진실한 역사를 새로 연구하고 정리하고 글로 쓰려면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인정받으려고 한다면, 그것은 아주 곤란하고 복잡한 일이다. 많은 역사학의 의난문제는 "파(破)"와 "립(立)"의 두 방면에서 인식과 전환의 과정이 필요하다. 여기에는 시간과 인내심과 기다림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