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독력견문(讀歷見聞)
무측천은 역사상 유명한 인물이다. 그녀와 연고지의 인연을 맺으려는 곳으로는 산서문수(山西文水), 섬서서안(陝西西安), 사천광원(四川廣元), 하남낙양(河南洛陽)과 강소양주(江蘇揚州)가 있다. 그러나 계속되는 논전과 말싸움을 거치면서 진리는 갈수록 드러나지 않고, 도리는 갈수록 분명해지지 않고 오히려 제3자가 보기에 더욱 진흙탕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산서문수가 이미 무측천의 조적(祖籍)이라는 우세를 점한 후에, 섬서서안이건, 사천광원이건, 아니면 하남낙양이건 강소양주이건 모두 무측천의 출생지를 다투는 방식으로 바뀌게 된다. 이 전투에 가담한 사람들 중에서 사천광원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전투의지가 가장 강하다.
그러나, 사천광원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목소리가 크지만, 북위말기에 황택사(皇澤寺)를 지었다든지, 심지어 괴이한 광원의 풍수를 들먹이며 여황이 나올 것이라느니 하는 것을 제외하고 논리적으로 얼마나 가치가 있는 주장을 내세우고 있는 것일까?.
무측천은 어렸을 때 확실히 사천 광원에서 생활한 바 있다. 다만 1400여년전에 그녀가 태어난 곳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 문제는 해답을 내리기 어렵다. 아이의 출샐지는 통상 부모의 거주지이다. 그래서, 무측천의 출생연도를 따져보고, 다시 그의 부친 무사확(武士彠)의 당시 소재지를 찾아보아야 그녀의 확실한 출생지를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무사확은 원래 태원(太原)의 목재상인이다. 그가 장안으로 가서 무측천의 모친인 양씨(楊氏)와 결혼하기 전에 이미 고향에서 결혼하여 두 아들이 있었다. 618년이후, 무사확은 이연(李淵)을 따라 태원을 떠나 장안으로 간다. 전후로 고부낭중(庫部郎中), 공부상서(工部尙書)를 지낸다. 그는 고향에 남겨둔 처 상리씨(相里氏)는 이때 병사한다. 그리하여 이연이 중매를 서서 무측천의 생모인 양씨와 장안에서 재혼하게 된다.
개략 625년 하반기에 무사확은 장안을 떠나 양주대도독장사(揚州大都督長史)가 된다. 그의 전임인 이정(李靖)은 최소한 624년까지는 임기가 끝나지 않았다. 626년에는 장안에서 풍운이 일고, 무사확은 '현무문사변'후에 장안으로 다시 불려온다. 그 후에 627년말 이주도독(利州都督, 사천광원)이 되고, 632년 형주대도독(荊州大都督)으로 옮긴 후 635년 임지에서 사망한다.
ㅇ렇게 보면 무사확의 각 시기의 활동은 비교적 분명해진다:
618년-625년하반기: 장안에서 관직에 있었다.
625년하반기-626년하반기: 양주대도독장사로 있었다
626년하반기-627년말: 장안으로 되돌아온다
627년말-632년: 이주도독(사천광원)으로 있었다.
632년-635년: 형주대도독으로 있었다.
그러면, 무측천의 출생연도를 확정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우선 그녀가 사망했을 때의 연령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는 <신당서>, <구당서>와 <자치통감>에 모두 명확히 기록되어 있다:
<구당서>: 상양궁(上陽宮)의 선거전(仙居殿)에서 붕어하다. 나이 팔십삼세
<신당서>: 후(后, 무측천)이 붕어하다. 나이 팔십일세.
<자치통감>: 측천이 상양궁에서 붕어하다. 나이 팔십이세
이를 보면, 무측천이 사망했을 때의 연령은 81세에서 83세의 사이였을 것이다. 그리고 무측천이 서거한 일자는 705년 12월로 명확하다. 그러므로, 그녀의 출생일자는 당연히 622년 12월에서 624년 12월일 것이다. 그렇다면, 무사확의 이 시기 활동지는 장안이므로, 무측천이 출생지는 장안일 가능성이 크다.
사천 광원은 그곳이 무측천의 출생지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하여, "여아절(女兒節)"을 둘러싸고, "무측천파(武則天壩)" "천후소세루(天后梳洗樓)", "강담감임(江潭感姙)"등 활동을 대거 벌인다. 이는 확실히 문화와 관광을 발전시키겠다는 좋은 뜻에서 하는 것이겠지만, 무측천의 출생지가 광원이라고 하는 주장의 증거로는 확실히 부족하다.
왜냐하면 이들 무측천을 둘러싼 '유적', '전설'은 이웃한 호북 형주(荊州)가 사천 광원보다 훨씬 많다. 무측천이 형주에서 생활한 시간은 사천 광원에서 생활한 기간보다 훨씬 길다. 형주의 소기와(筲簊洼), 어로구(御路口), 철녀사(鐵女寺), 옥천사(玉泉寺)에서 신수(神秀)에 절한 것, 천황사사복(天皇寺賜福)등 유적과 전설이 모두 무측천과 관련된다.
광원은 이외에도 비록 사료에서는 찾을 수 없는 일부 증거를 내놓는다. 다만 모두 쉽게 반박당할 수 있는 오류가 있다. 어떤 것은 심지어 정사에 어긋나기도 한다.
예를 들어, 60여년전에 광원에서 출토된 한 석비(石碑)에는 "부사확위도독어시주시생후언(父士彠爲都督於是州始生后焉)"(부친 무사확이 도독으로 있을 때 이곳에서 황후를 낳았다"라는 말이 있어서 마치 그러나, 이 글은 오대(五代)시기의 비문에서 나왔으므로 정사에 속하지 않으며, 또한 이 문구들 중에서 10자는 믿을만하나 그중 '주시생(州始生)"의 3글자는 위치상 원래 글자가 빠진 것인데, 이 세 글자를 추측해서 집어넣은 것이다.
그외에 <구당서>를 보면 "원아무위노서(願阿武爲老鼠), 오작묘아(吾作猫兒), 생생액기후(生生扼其喉)"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무측천을 저주하면서 한 말이다. "원컨대 무측천이 쥐가 되고 나는 고양이가 되어 계속하여 그녀의 목을 물어뜯게 해주십시오". 그런데 사천광원은 이를 가지고 무측천이 쥐를 싫어했고, 그것은 그녀가 쥐띠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즉, 628년에 출생). 그때는 바로 부친 무사확인 이주도독으로 있을 때이다. 다만 이런 주장은 너무 억지스럽다. "무측천이 쥐가 되고"라는 말과 무측천이 쥐띠라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리고 이 말은 소양제(蕭良娣)가 저주하면서 한 말이이 홧김에 한 말이다. 소양제게 고양이가 되려면 반드시 무측천은 쥐띠여야 한단 말인가? 만일 그렇다면 소양제는 고양이띠라고 된단 말인가? 확실이 히는 견강부회이다.
그외에 사천광원설이 끌고온 증거로는 "원천강상면(袁天綱相面)"이 있다. 그리고 송나라 왕상지(王象之)의 <여지기승>등 지리지가 있다. '원천강이 관상을 보다'라는 것은 <대당신어>(필기체소설집)의 '기이(記異)'편에 나오고, <태평광기>(전기소설의 모음집)에서는 '방사(方士)'편에 나온다. 이 두 권의 진실성이 의심스러운 소설집에 나오는 내용을 가지고 그리고 괴이한 이야기를 담안 편에 둔 것을 가지고 증거로 내세운다는 것은 확실히 어불성설이다.
<여지기승>등 송나라때의 지리지는 작자가 역사를 고증하는 전문가가 아니므로, 사료가치는 당연히 의심된다. 이들 책의 무측천 출생지에 관한 기록은 아마도 이상은(李商隱)의 <이주강담작(利州江潭作)>의 시에 뿌리를 두는 것일 것이다. 책들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당음규첨>: <이주강담작>자주(自注): '감몽금륜소(感夢金輪所)"
<여지기승>: 당 이의산(李義山) <감임금륜소>시가 있는데, 그 뜻은 바로 이 곳이다.
<명승지>: 현의 남쪽에 흑룡담이 있는데, 후(무측천)의 모친이 용꿈을 꾸고 잉태한 곳이다.
<촉지>: 무측천의 부친 무사확이 배를 타고 강담에 갔고, 후의 모친이 용과 교합하여 후를 임신했다.
이를 보면 이들 주장은 기본적으로 '강담감임'의 설이고, '감용교'(용과 교합하였다)는 말은 실로 황당하기 그지없다.
무측천은 적관(籍貫)으로 따지면 산서문수 사람이다. 출샐지로 말하자면 아마도 섬서 서안사람일 것이다.
그런데, 사천광원이 무측천과 인연을 맺은 것은 무측천이 3,4세가 되었을 때부터일 것이다. 627년부터 632년까지 무측천은 광원에서 3,4살부터 7,8세까지 자랐다.
광원은 무측천을 5년간 키웠다. 이런 인연이 있다. 그것으로 인하여 천년간이나 인연이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감정이 사실(史實)을 대체할 수 없다. 역사의 진실한 면모에 가깝게 가려고 노력해야하지, 반드시 무측천과 광원의 관계를 그으려고 해서는 안된다. 감정은 감정이고, 문화는 문화이고, 역사는 역사이다. 굳이 속박될 것이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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