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무측천)

무측천의 4가지 최고기록

by 중은우시 2015. 2. 10.

글: 서문(瑞文)

 

기록은 경기장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다른 분야에도 여전히 각양각색의 기록이 존재한다. 중국통치자중의 하나의 특수한 사례로서 무측천 1인은 4가지 황제중의 기록을 세웠다. 국내에는 그 어느 황제도 깨지 못했을 뿐아니라, 세계적인 범위로 보더라도 여전히 기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4가지 기록은 다음과 같다.

 

첫째, 즉위연령이 가장 많다.

 

무측천이전에 즉위시 연령이 가장 많았던 황제는 유비였다. 이 한소열제는 전반생을 사방을 돌아다니며 유격전을 벌였지만, 다행히 늙어서 복이 있어, 형주, 익주 두 개의 당시로서 가장 큰 주를 차지하고 최종적으로 60세에 영광스럽게 등극하고, 촉한정권을 세운다. 무측천은 그보다 더욱 힘들었다. 당태종의 재인에서 당고종의 소의를 거쳐 황후, 천후에 이르고 다시 태후에 이르렀다. 67세가 되어서 비로소 황제에 오른다. 이 해가 기원690년이다. 무측천은 국호를 주(周)로 바꾸고 자칭 '신성황제'라 한다. 14살때부터 그녀는 이미 53년을 분투한 것이다. 그외에 오대십국때 마은(馬殷)이라는 사람이 당말시기에 호남에 할거한다. 927년에 이르러 후당은 그를 초국왕에 봉한다. 그는 75세의 나이에 대기만성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단지 '왕'일 뿐이고, 죽고나서의 묘호도 초무목왕이다. 이 왕은 그리고 중앙의 할거세력이 봉한 것이므로 황제의 반열에 오른 것은 아니다.

 

둘째, 임용한 재상이 가장 많다.

 

당왕조에는 재상이라 칭하는 관직이 아주 많다. 좌우복야 및 문하, 상서, 중서 삼성의 장관이 모두 재상이라 칭할 수 있다. 그리하여 당나라의 재상수량은 전체적으로 다른 왕조를 넘어선다. 예를 들어 당태종은 재위23년간, 재상을 25명 이명한다. 그러나 이 숫자는 무측천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무측천은 인재를 아끼기로 유명했다. 과거를 크게 일으키는 외에, 지방의 각급관리들에게 우수한 인재를 추천하도록 장려했다. 그렇기는 해도 그녀는 인재를 놓칠까봐 두려워했고, 나중에는 심지어 사람들에게 스스로가 스스로를 추천하도록까지 격려한다. 인재가 많아지니, 그들에게 자리를 마련해주어야 했다. 그렇지 않고 놀려두면 그것은 낭비이다. 결국 그녀의 통치하의 제국관료기구는 커지게 된다. 재상의 직만 앞뒤로 73명에 달하게 된다. <수당사>에서는 이렇게 해석한다: "무후는 일처리가 마음내키는대로 였고, 좋고 나쁜 것이 항상 바뀌었다. 그래서 그녀가 임조하는 동안 재상은 모두 73명에 이른다." 여기에서 무측천이 재상을 임용한 사례를 들어보기로 한다. 대주왕조를 건립하기 전에 부유예(傅遊藝)라는 9품관리가 기회를 잘 노렸다. 그는 무측천이 황제를 칭할 야심이 있는 것을 알아채고, 사람을 끌어모아 상소를 올린다. 무측천에게 국호를 '주'로 고치라고 요구한다. 무측천은 기뻐하며, 1년동안 9품관리를 3품관직으로까지 승진시킨다. 그리하여 재상의 위치에 이른다. 당나라때 1품, 2품관리는 아주 적었다. 재상은 대부분 3품관이었다. 다행히 무측천은 부지런히 정무를 보았고 나라를 잘 다스렸다. 빈번하게 재상을 바꾸었지만 제국의 혼란은 오지 않았다. 역사상 무측천에 다음가는 황제는 숭정제이다. 이 명나라 마지막 황제는 일생동안 사람을 쓰면서도 의심을 계속 하였고, 재위7년동안 재상을 50명이가 쓴다. 명왕조는 원래 병이 깊었는데, 그가 이렇게 뒤흔들면서, 더더욱 회복할 방법이 없어지게 된다.

 

셋째, 사용한 연호가 가장 많다.

 

연호는 한무제가 발명한다. 제왕기년법의 연속이다. 무측천 이전에 이 기록을 보유한 사람은 한무제였다. 그는 55년간 재위하면서 연호를 모두 11개 사용한다. 평균 5년이 1개이다. 이들 연호는 각각 건원(기원전140-기원전135), 원광(기원전134-기원전129), 원삭(기원전128-기원전123), 원수(기원전122-기원전117), 원정(기원전116-기원전111), 원봉(기원전110-기원전105), 태초(기원전104-기원전101), 천한(기원전100-기원전97), 태시(기원96-기원전93), 정화(기원전92-기원전89), 후원(기원전88-기원전87).

 

무측천에 이르러서는 그녀가 칭제한 후 마지막에 정변으로 하야할 때까지의 21년동안 모두 17개의 연호를 사용한다. 생활력이 강한 여성으로서 무측천의 연호는 개성이 있다. 이들 연호는 각각 광택, 수공, 영창, 재초, 천수, 여의, 장수, 연재, 증성, 천책만세, 만세등봉, 만세통천, 신공, 성력, 구시, 대족, 장안이다. 그중 비교적 재미있는 것은 천수3년이다 무측천은 두번이나 연호를 바꾼다. 즉 천수3년, 여의원년과 장수원년은 모두 같은 해이다. 이 해는 바로 692년이다.

 

넷째, 능묘의 규모가 가장 크다.

 

무측천이 처한 시대는 당나라의 번영시기이다. 풍부한 국력은 그녀의 능묘건설에 견실한 재력기초를 제공한다. 그녀의 능묘인 건릉은 684년에 공사를 시작하고 23년의 공사를 거쳐 1기가 완성된다. 건릉은 거의 수도 장안성을 모방해서 만들었다. 외곽성, 황성, 궁성의 3중성곽이 있고, 내성에는 동쪽의 청룡문, 남쪽의 주작문, 서쪽의 백호문, 북쪽의 현무문이 있다. 남북의 주축선은 길이가 4.9킬로미터에 달한다. 남북의 담은 길이가 1450미터이고 동쪽의 담은 1582미터, 서쪽의 담은 1438미터이다. 총면적이 230만평방킬로미터에 달한다. 역사문헌에 기록된 "주팔십리(周八十里)"이다. 이러한 규모는 당태종의 소릉도 견줄 수가 없어, '역대제황제릉중 최고"라고 할 수 있다. 그 외에, 성내에는 헌전, 편방, 회랑, 궐루와 적인걸등 60여명의 중신들의 사당이 있다. 이는 또 하나의 장안성이라 할 만하다. 아쉬운 것은 안사의 난에 건릉의 휘황하고 장관인 지면건축물이 상당히 크게 파괴되었다는 것이다. 정원14년(798년)에 이르러 다시 수리한다. 이렇게 큰 능묘이니 안에 들어 있는 부장품도 만만찮을 것이다. 현대학자의 예상에 따르면, 부장된 진귀한 보물의 총량은 최소한 오백톤가량일 것으로 본다. 만일 무측천의 건릉이 열린다면, 아마도 진시활응과 같이 중요한 고고학적 대사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