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장계합(張繼合)
청나라초기에 권력을 잡은 유명한 여인은 강희제의 조모인 효장태후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개국여인에게는 너무나 많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있다. 가장 큰 의문은: 효장이 죽은 후, 왜 자신의 남편인 홍타이시(청태종)과 합장되지 않고, 이 세상에 37년간이나 매장되지 않고 놓여 있었을까라는 것이다.
강희26년 즉 1687년, 음력 십이월 이십오일, 효장황태후가 사망한다. 최종연령은 75세였다. 청나라때의 법도에 따르자면, 황후 혹은 태후는 황제능묘의 바깥에 '후릉'을 별도로 짓게 된다; 재미있는 것은 효장태후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녀의 능묘는 아주 특수하다. 효릉의 홍장(紅墻) 바깥에 있는 것이다. 원인에 대하여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 그리고 각각의 설은 나름대로 이치에 맞는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효장태후는 권세때문에 할 수 없이 당시의 권신 도르곤에게 '시집'을 갔다. 자세히 생각해보라 이미 개가한 여인이 어찌 전남편과 함게 묻힐 수 있겠는가. 당연히 이 설에 반대하는 사람도 있다. 효장태후의 안장문제는 그녀 자신의 생각이고 그녀 자신이 결정한 것이지, 다른 신하들은 전혀 이에 관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1901년, 사학자 장태염 선생은 남명 장황언의 수초본 <장창수집>을 출판한다. 그 안에는 이런 시가 남아 있다: "상수상위합근존(上壽觴爲合卺尊), 자녕궁리난영문(慈寧宮裏爛盈門), 춘궁작진신의주(春宮昨進新儀注), 대례공봉태후혼(大禮恭逢太后婚)" 이것은 큰 일이다. 효장태후는 일찌기 '자녕궁'에 거처했다. 그런데 거기서 '대혼'이라니. 그리고 명확하게 '태후혼'이라고 쓰지 않았는가? 이 시로 인하여, 효장태후의 장엄한 절개는 보존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 시를 쓴 장황언은 어떤 사람인가? 그는 어떻게 황실의 비사를 알고 있었을까?
사료의 기록에 따르면, 장황언은 대청황실과 '원수지간'이다. 그는 민속소설의 극도로 주변화되 '항청인사'에 속한다. 그리고, 남명 노왕정권때, 주요한 역할을 한다. 그가 조직한 의사(義師)는 정성공의 대군과 마찬가지로, 모두 동남연해에서의 주요한 항청역량이었다.
강희3년, 장황언의 항청은 실패로 끝난다. 그리하여 그는 작은 섬으로 가서 몸을 숨긴다. 아쉽게도, 청나라군대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중으로 변신하여 섬으로 가서 장황언을 붙잡아 죽여버린다. 확실히 장황언은 청나라조정과 '피의 원한'이 있다. 예를 들어, 건륭제같은 인물도 그의 눈에는 '보잘것없는 소인배'에 불과하다.
그외에 어떤 사람은 또 이렇게 말한다. 효장태후는 도르곤에게 시집간 적이 아예 없다고. 그렇다면 왜 순치제는 도르곤을 "황부"라고 불렀는가, "황숙"이 아니라.
맞다. 순치제가 즉위했을 때는 나이가 어렸다. 자신의 즉위에 도르곤이 어느 정도 힘을 보탰다고 할 수 있다. 그 때 '예친왕" 도르곤과 "정친왕" 지르하랑 두 사람이 모두 섭정했다. 나이가 어린 순치제는 그저 숙부를 '황숙섭정왕'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도르곤이 이자성을 물리치고, 기세가 오르게 된다. 그의 눈에 순치네는 그저 정사를 모르는 '어린애'에 불과했다. 그래서 순치5년, 순치제에게 그를 '황부섭정왕'으로 부르게 한다. 당시, 순치제는 원하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고, 마음 속에 원망이 쌓인다. 만일 모친 효장이 이미 도르곤에게 '시집'을 갔다면, 순치제는 분명 그 자리에서 화가 나서 죽었을 것이다.
여기서 밝혀두어야 할 점은 청나라의 각급 사료에서, 공개적으로 효장태후가 '시집'갔다는 내용을 기록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난신이 섭정을 하더라도, 횾장태후를 '시집'오도록 모욕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도르곤은 기껏해야 권모술수를 쓰는 저급한 역할에 불과하다.
기실, 효장이 남편인 청태종과 합장되지 않은 것은 주로 그녀 자신의 뜻때문이다. 효장의 일생은 가히 정치여강자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강희라는 위대한 손자가 떠받들고, 많은 왕공대신들이 존경하는 인물이었다. 누가 감히 그녀의 뜻에 어긋나게 일을 처리할 수 있겠는가? 하물며 강희제는 그녀의 말을 아주 잘 들었다. 할머니의 말이라면 다 따랐다. 자신의 능묘를 어디로 할 것인가는 아마도 효장 자신의 뜻일 것이다.
효장태후는 병세가 위중한 때, 손자에게 당부를 글로 써서 남긴다. 강희황제에게 남기는 유언인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내가 죽은 후 특별히 너에게 당부한다. 태종문황제의 관은 안장된지 오래 되었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움직일 수 없으니, 지금 합장을 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 다른 묘를 만든다면, 백성들을 많이 동원하게 될 것이고, 합장의 뜻에도 맞지 않는다. 나는 너희 부자를 그리워하여 멀리 떠나기 싫으니, 준화에 묻어달라. 그러면 나는 마음을 놓겠다."
후사는 과연 그렇게 진행되었다. 옹정2년, 즉 1724년, 음력 십일월 이십일일, 조정은 정식으로 효장문황후의 능묘를 "소서릉(昭西陵)"이라 명명한다. 효장태후는 마침내 안장된 것이다.
이를 보면, 그녀가 '소릉'에 묻히지 않은 것은 3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겉으로 드러난 뜻을 보면, '홍타이시'는 이미 매장된지 오래되었다.자신은 비천하다 실로 다시 '선황'의 묘를 다시 파낼 수 없다; 둘째, 백성들을 많이 동원하면 안된다. 그래서 노역을 경감시킨다. 이 점을 보더라도 그녀는 총명하고 현덕한 태황태후이다. 셋째, 명확하게 언급했다. 자신은 아들과 손자를 떠나고 싶지 않다. 그들과 함게 묻히고 싶다 그러면 만족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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