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천비홍(中天飛鴻)
자희(慈禧), 만주족. 예허나라씨. 안휘 휘냥 지광태도, 증삼등승은공 혜징(惠徵)의 딸. 옥첩(玉牒), 즉 황족족보에 기록된 내용은 이러하다: "예허나라씨. 혜징의 딸" 아명은 난아(蘭兒)이며, 예허나라가족중에서는 그녀가 행아(杏兒)라고 불리웠다. 함풍원년, 즉 1851년에 서태후는 입궁하여 의귀인(懿貴人)이 된다. 나중에 의빈(懿嬪)에 책봉된다. 5년후인 삼월, 서태후는 황장자 재순(載淳)을 낳고, 의비(懿妃)에 책봉된다. 얼마후에는 의귀비(懿貴妃)로 진봉(晋封)된다. 함풍제가 피서산장에서 붕어한 후, 치상기간동안 자안태후(慈安太后)와 연파치상전(煙波致爽殿)의 동난각 서난각에 거주하였으므로 "서태후"라고 불린다.
함풍10년 칠월, 재순이 즉위하니 동치제(同治帝)이다. 서태후는 동태후와 나란히 양궁황태후가 된다. 두 사람은 양심전(養心殿)에서 수렴청정을 한다. 1874년말, 동치제가 병사한다. 서태후는 5살된 재첨(載湉)을 광서제(光緖帝)에 앉힌다. 1889년초에 이르러 비로소 광서제는 친정(親政)을 한다. 다만, "상(광서제)는 황태후를 조심스럽게 모셨고, 조정의 큰 일은 반드시 황태후의 지시를 받은 후에 집행했다." 기실 광서제의 친정은 그저 명목상의 것일 뿐이었고, 모든 조정대권은 서태후가 결단했다. 1908년 11월 14일, 광서제가 중남해의 영대(瀛臺) 함원전(涵元殿)에서 붕어하니 나이 겨우 38세이다. 서태후는 순친왕(醇親王) 재풍(載灃)의 아들인 나이 겨우 3살짜리 부의(溥儀)를 황제에 앉히고 연호를 선통(宣統)이라 한다. 다음날 오후, 서태후는 자금성 의란전(儀鸞殿)에서 병사하니 향년 73세이다. 조정은 그녀에게 25자에 이르는 "효흠자희서우강이소예장성수공흠헌숭희배천흥성현황후"라는 시호를 내리는데, 유사이래 황후에게 내린 가장 영예로운 시호이다. 다만, 조정의 군국대권을 장악했던 서태후는 죽기 전에 자신의 사후에 대하여 어떻게 안배했는지가 지금까지 수수께끼였다. 그렇다면, 이 근 반세기를 수렴청정했던 황태후는 임종때까지 무엇에 매달렸을까? 무엇을 끝까지 고민했을까? 자신이 사후에 대비하여 도대체 어떤 정치적 안배를 해놓았을까? 최근에 한 매체에서 이와 관련한 잘 알려지지 않은 비밀을 폭로했다.
광서제의 죽음은 청나라말기 최대의 수수께끼사건이다. 여러 기록에 따르면, 광서제는 살해당한 것이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얘기하는 배후는 바로 서태후이다.
광서제는 4살때 궁으로 들어간 후, 서태후의 관리를 받는다. 정신적으로 계속하여 긴장하고 억업된 상태에 있었다. 장성하여 친정을 하지만, 내우외환이 있고, 황태후는 건건마다 제지했으니 마음이 편하지 못했을 것이다. 무술변법이 실패하면서, 영대에 유폐되고, 정신적으로 고통을 당하고 타격을 입었다. 진비의 참혹한 죽음은 아마도 더더욱 그를 우울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렇게 장기간동안 거대한 정신적 압박을 받았으므로 신체도 무너지게 되는게 이상할 것도 없다.
그러나, 비록 광서34년때, 황제의 몸은 이미 허약해져 있었고, 연초부터 병으로 병석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완쾌되지도 못했다. 다만 여러가지 흔적을 보면, 병세가 돌연한 사망에 이를 정도는 아니었다.
광서제가 죽기 하루 전날, 이런 유지(諭旨)를 반포한다. 전국각지의 독무(督撫, 총독과 순무)로 하여금 명의를 찾아서 약방을 구해 북경으로 추천하라는 것이다. 이 사건을 보면, 병자는 이때 아직은 정신이 맑았던 것같다. 병을 치료하는데 대하여 아직은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그 외에 광서제의 "맥안(脈案)"을 보면 여하한 '토혈(吐血)'의 기재가 없다. 병자이 결핵병은 아직 심각한 정도에 이르지 않은 것이다.
또 하나 깊이 생각해야할 것은 바로 광서34년 십월 이십일, 즉 광서제가 붕어하기 하루 전날, 서태후가 죽기 이틀 전날, 청나라조정은 광서제의 명의로, 전국에 두 가지 유지를 반포한다: 하나는, 순친왕 재풍의 아들 부의를 궁내로 데려와 기르고 상서방에서 공부하게 한다는 것이며, 둘은 재풍을 섭정왕으로 임명한다는 것이다.
이 유지의 행간에 담긴 뜻은 아주 명확하다. 부의는 비록 대아거(大阿哥)로 세워진 것은 아니지만 사실상 이미 미래의 황위계승자가 되었다.
확실히 이 두개의 유지는 황제가 내린 것이 아니다. 심지어 광서제 본인은 이 두 개의 유지를 알지도 못했다. 광서제가 이때 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만이 아니고, 설사 광서제의 몸이 건강할 때도 조정은 완전히 서태후의 손아귀에 장악되어 있었다. 평일에 조회에 나가면 광서제는 그저 허수아비일 뿐이다. 설사 아주 작은 일이라고 하더라도, 발언권이 없었다. 황위계승자를 결정하는 이런 중대한 문제는 서태후가 절대 광서제에게 간여하도록 하지 않았다. 더더구나 그가 독자적으로 결정할 수 있지도 못했다.
분명히 유지는 서태후의 뜻에 따라 반포된 것이다. 이렇게 보면 두 가지 문제가 나타난다:
첫째, 유지가 반포되었을 때, 서태후의 목숨은 이미 마지막 순간이었고, 그녀는 이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둘째, 유지가 반포되었을 때, 서태후는 이미 결정을 내렸다. 그는 광서제가 죽는 것을 보겠다는 것이다. 만일 광서제가 서태후보다 뒤에 죽게되면, 부의를 입궁시키고 재풍을 섭정왕에 봉한 유지는 휴지조각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서태후가 죽은 후에는 광서제가 분명히 자기의 뜻에 어긋나게 결정된 심지어 자신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결정된 이것을 뒤집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 관하여, 서태후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해결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바로 이 결정을 바꿀 수도 있는 사람을 이 결정을 내린 사람보다 먼저 죽게 해야 한다.
사실상, 서태후의 성격과 사람됨을 보면 그녀는 일찌감치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같다.
무술정변이후, 서태후는 광서제를 사지로 몰아넣었다. 그녀는 광서제가 병력을 동원하여 이화원을 포위하고 그녀를 감금하려 한데 대하여 원한을 가졌다. 다만 광서제는 어쨌든 대청국의 황제이다. 일반적인 정적과는 다르다. 무술정변후, 광서제가 정치무대에서 사라지자, 즉시 조야와 내외의 그리고 국제적으로 거대한 반향을 불러왔다. 만일 황제가 또 돌연 사망한다면, 반드시 더욱 큰 사회동란이 일어날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인내했다.
이후 서태후는 여러번 광서제를 폐위할 것을 생각한다. 다만 여전히 여러 방면에서의 압력으로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때는 서태후가 이미 나이가 들어서 병이 깊었다. 더 이상 이것저것 신경쓸 여지가 없었다.
이 4억인민의 중국을 근 반세기동안 통치한 여인이 임종전에 가장 바라지 않는 것은 바로 자기의 생명이 끝나면서, 정적인 광서제에게 승리의 기회를 주는 것이었다. 그가 다시 조정을 장악하고, 개혁을 진행하는 것이었다. 만일 그렇게 되면, 서태후는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없을 것이었다.
권력은 서태후의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이다. 모든 정치적 각축에서 그녀는 영원히 승리자였다. 과연 부의를 입궁하도록 하는 유지를 내린 다음 날, 광서제는 붕어한다. 부의는 명을 받아 대통을 계승하여 선통제에 오른다. 부친인 섭정왕 재풍은 감국이 된다. 그리고 다음 날, 이미 목숨이 간당간당하던 서태후가 마지막 결정을 내린다: 죽은 후, 일체의 군국대사는 모두 감국인 섭정왕이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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