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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서태후)

서태후의 출생지를 둘러싼 수수께끼

by 중은우시 2018. 6. 7.

글: 문재봉(文裁縫)



(프랑스 주간잡지의 표지에 실린 서태후. 프랑스인이 상상으로 서태후의 모습을 그린 것임)


서태후는 중국을 48년간 통치했던 여인이다. 그녀의 삶에 대하여는 크건 작건 모두 기록이 남아 있다. 이치대로라면 그녀가 어디에서 태어났는지가 논란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다. 청나라의 자료, 국조정사등 사료에 서태후의 어린 시절에 대하여 기록이 없어서, 서태후의 출신과 출생지에 대하여 논쟁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청궁당안>의 기록에 따르면, 서태후는 예허나라씨(葉赫那拉氏)이고, 만주 상황기(鑲黃旗) 사람이다. 1835년에 태어났고, 1908년에 사망한다. 안휘(安徽) 영지(寧池) 태광도(太廣道) 혜징(惠徵)의 딸이다. 함풍원년 수녀로 선발되어 후궁에 들어왔고, 난귀인(蘭貴人)에 봉해진다. 함풍제의 총애를 받아, 4년후에는 의빈(懿嬪)이 된다. 함풍6년 삼월 이십삼일 미시에 예허나라씨는 동치제(同治帝) 재순(載淳)을 낳는다. 어미는 자식을 따라 귀해지는 법이어서 그녀는 성모황태후(聖母皇太后)에 봉해지고 휘호는 자희(慈禧)라 한다. 1908년 10월 22일, 서태후는 병사하니 향년 74세이다. <청사고.후비전>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효흠현황후, 예허나라씨. 안휘 휘녕지 태광도 혜징의 딸. 함풍원년, 선발되우 허궁이 되고 의귀인이 되다. 4년후 의빈이 되다. 육년 삼월 경진, 목종을 낳고, 의비가 되다. 칠년 의귀비가 되다. 십년, 열하로 따라가다. 십일년 칠월, 문종이 붕어하고, 목종이 즉위하다. 효정황후와 나란히 황태후가 되다." 이 기록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서태후가 예허나라씨이고 상황기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부친이 안휘 영지 태광도의 혜징이라는 것이다. 그 외에 서태후의 어린 시절과 출생지 등등에 대하여는 기록이 없다. 다만, 이미 당안중에서는 서태후의 어린 시절에 대하여 가장 상세한 기록이 된다. 상세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후세의 사가들은 자신의 고증을 통하여 서태후의 신세내력에 관한 여러가지 견해를 내놓는다. 어떤 사람은 그녀가 안휘에서 출생했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그녀가 후허하오터에서 출생했다고 하며, 어떤 사람은 그녀가 산서의 장치시(長治市)에서 가난한 한인(漢人)가정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은 그녀가 북경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이런 여러가지 견해들 중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것은 서태후가 북경에서 태어났다는 설이다. 이 설은 일부 사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일 뿐아니라, 서태후 친정집안의 후손들도 인정하는 것이다. 서태후의 증조부는 길랑아(吉郞阿)이고, 상황기 사람이다. 일찌기 호부(戶部)에서 관직을 맡았다. 나중에 호부의 전량(錢糧)이 텅빈데 연루되어 파면된다. 서태후의 조부는 경서(景瑞)인데, 형부(刑部)에서 관직을 지냈다. 증조부의 전량이 빈 사건에 연루되어 역시 관직을 박탈당한다. 서태후의 부친은 혜징인데, 처음에는 이부(吏部)에서 필첩식(筆帖式)으로 있었다. 현재의 비서에 유사한 8품관직이다. 서태후는 1835년 음력 십월 십일에 출생했는데, 당시 그의 부친인 혜징은 이부에 필첩식으로 일했다. 그래서, 서태후는 이 시기 혜징이 있던 북경의 서단 패루벽시후통에서 태어났을 것이다. 이 주장은 서태후의 친정 후손들의 회고에서도 언급된다. 그리고 그들은 사학계에 알려진 한 가지 잘못도 바로잡았다. 그것은 바로 서태후의 아명이 옥란(玉蘭)이 아니라는 것이다. 행아(杏兒)였다고 한다. 이런 착오가 벌어지게 된 것은 주로 서태투가 난귀인에 봉해진 적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서태후는 난초를 좋아했다. 그래서 후인들은 서태후의 아명이 옥란이라고 착각한 것이다. 실제로 서태후의 친정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행아라고 불렀고, 정식으로는 행정(杏貞)이라고 했다. 


동시에 서태후의 친정이 북경에 있다는 것에 대하여, 일찌기 양대 제사(帝師)를 지낸 군기대신 옹동화(翁同龢)의 일기에서도 증거를 찾을 수 있다. 옹동화의 일기기록에 따르면, 동치9년(1870년) 팔월 십칠일, 서태후의 모친이 사망한다. 경성에서 장례를 지냈고, 모친이 출빈할 때, "도거추령(塗車芻靈, 장례에 쓰이는 물건들임)이 많기로 전례가 없을 정도이고, 온 경성사람들이 다 나와서 보았다. 거의 미친 듯했다. 연도에 장막이 이어져 있고 하나하나가 천금이 들었다. 정신들 중에서 조문을 오는 자는 모두 적이 있고, 이시랑이 가지 않아서, 그녀의 뜻에 어긋났다." 이를 보면, 서태후의 모친은 북경에서 죽었고, 그녀가 대권을 장악한 후였다. 이는 서태후가 어려서 모친을 잃고 가난한 집안에서 자랐다는 주장에 대한 유력한 반박증거이다.


서태후의 신세내력을 고증하기 위하여, 사학계에서는 서태후의 부친인 혜징의 경력에 대하여 고증을 진행한다. 서태후의 부친 혜징에 대하여, 역대이래로 여러가지 견해가 존재한다. 어떤 사람은 그가 파직당한 정황기(正黃旗) 참령(參領)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그가 '괘인귀림(掛印歸林)'한 대장군이라고 하며, 또 어떤 사람은 그가 인장을 가지고 태광도로 도망쳤다고 한다. 이것들은 모두 당연히 서태후의 신세내력을 얘기하기 위하여 나온 여러가지 전언들이다.  대내의 청궁당안 기록에 따르면, 서태후의 부친 혜징은 상남기(鑲藍旗) 사람으로, 도광11년(1831) 이부 필첩식이 되고, 도광14년(1834) 이부 이등필첩식이 되고, 도광19년(1839) 팔품필첩식으로 승진한다. 도광23년(1843)에 다시 이부 일등필첩식이 된다. 26년(1846)에는 이부 문선사(文選司) 주사(主事)가 된다. 28년(1848), 29년(1849)에는 산서 귀수도(歸綏道) 도원(道員)이 된다. 함풍2년(1852) 안휘 영지 태광도의 도원이 된다. 이는 <청조의 황제>라는 책에 기술된 내용과 개략 일치한다: "서태후의 부친 혜징은 관직이 안휘 영지 태광도에 이르렀는데, 도광말년, 홍수전,양수청의 반란때, 제대로 지켜내지 못하여, 혁직유임(革職留任)된다. 그후 병사한다. 처 1명, 자녀 각 2명을 남기는데, 자희가 큰 딸이다." 그러므로, 서태후의 부친이 안휘 영지 태광도의 혜징이라는 것에는 아무런 의문이 없다. 그녀의 부친 혜징은 나중에 태광도에서 재직중에 죽었다. 서태후가 권력을 잡은 후, 그의 부친을 승은공(承恩公)에 추봉했고, 모친 집안의 기적(旗籍)을 하오기(下五旗)인 상남기에서 상삼기(上三旗)인 상황기로 올려준다. 승은공이라는 직위는 나중에 서태후의 동생인 계상(桂祥)이 승계한다.


서태후의 부친이 혜징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전제하에서, 서태후의 출생지에 관하여 북경설 이외에 감숙 난주설, 절강 사포설(乍浦)설, 내몽고 후허하오터설등 여러가지가 있다. 감숙 난주설의 근거는 주로 사학가가 감숙포정사아문에서 혜징이라는 필첩식을 발견했다는데 둔다. 그러나, 당안의 혜징에 대한 기록을 보면, 그는 확실히 필첩식을 지냈지만, 이부의 필첩식을 지냈지, 감숙포정사의 필첩식을 지내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 주장은 의문이 든다. 서태후가 절강 사포에서 출생하였다는 설의 주요 근거는 현지에서 나오는 전설이다. 서태후의 부친인 혜징이 이곳에서 효기교(驍騎校)를 지냈고, 서태후가 이곳에서 출생했다는 것이다. 절강 사포는 팔기의 주둔지라고 하고 이곳에서 태어났다는 것이다. 서태후가 남방소곡을 좋아했던 것도 어려서 남방에서 생활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주장도 당안의 혜징에 대한 기록과 맞지 않는다. 서태후가 몽골의 후허하오터에서 태어났다는 설의 주요 근거는 현지의 거리중 낙봉가(落鳳街)라는 곳이 있는데, 서태후와 그의 부친이 이곳에서 거주했다고 한다. 그러나 사학자의 고증에 따르면, 서태후의 부친인 혜징이 확실히 이곳에서 귀수도의 도원을 지낸 바 있지만, 그때 서태후는 이미 15살이다. 이곳에서 태어날 수는 없다. 햬징은 안휘의 후보도대에서 귀수도 병비도대로 승진 한 후, 일찌기 15살의 딸을 데리고 이곳에 거주한 바 있다는 것은 말이 될 수 있다.


이런 몇 가지 주장외에 또 한가지 주장이 있다. 서태후가 산서 노안부(潞安府)에서 태어났다는 설이다. 즉 오늘의 장치시이다. 이 주장은 산서의 유기(劉奇)라는 학자가 제기했다. 이 주장은 서태후가 장치에서 태어났을 뿐아니라, 서태후의 신세내력에 대하여도 완전히 다른 견해를 제기한다. 이 학자의 고증에 따르면, 서태후는 만주족이 아예 아니라는 것이다. 신세곡절이 남다른 한족 아가씨라는 것이다. 1835년, 서태후는 산서성 장치현 서파촌(西坡村)의 왕증창(王增昌)이라는 가난한 농민가정에서 태어났고, 이름을 왕소겸(王小謙)이라고 했다. 집안이 가난하여, 어린 서태후는 4살때, 같은 현 상진촌(上秦村) 송사원(宋四元)의 딸로 팔려가고, 이름을 송령아(宋齡娥)로 바꾼다. 그러나 서태후가 12살이 되었을 때, 다시 노안부에서 지부(知府)로 있던 혜징의 노비로 팔려가고, 이름을 옥란(玉蘭)으로 바꾼다. 한번은 옥란이 혜징의 부인 부찰씨(富察氏)의 발을 씻겨주고 있는데, 그녀의 발바닥에 점이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녀는 자기의 두 발바닥에도 점이 있다고 얘기한다. 부찰씨는 그 말을 듣고 크게 놀란다. 두 발바닥에 모두 점이 있다는 것은 황후가 될 명운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더 이상 그녀를 비녀(婢女)로 두지 않고, 수양딸로 거둔다. 그리고 그녀를 정성껏 키운다. 함풍2년(1852)이 되어 궁중에서 수녀를 뽑을 때 옥란은 혜징의 딸 예허나라씨라는 신분으로 참가하여 뽑혀 궁에 들어간다.


이 주장은 사학계를 크게 뒤흔들었다. 이 학자는 그의 논저 <자희 동년의 수수께끼를 파헤치다>라는 책에서 38가지 근거를 내세워 서태후가 원래 한족이라고 주장한다. 첫째, 서파촌의 왕영배(王英培) 집안의 족보에는 "왕소겸이 나중에 서태후가 되었다"라는 기록이 적혀 있다. 둘째, 서파촌 외양두 위의 산자락에는 서태후 모친의 묘가 있다. 동시에 서태후의 두번째 고향인 상진촌에도 증거가 발견된다. 즉 송가의 후손인 송육칙과 송덕문의 집안에서는 조상으로부터 전해지는 광서, 선통연간의 청나라조정이 제작한 피협식(皮夾式)의 청나라조정이 제작한 후종사보(后宗祀譜)가 있다. 송육칙의 집에서는 서태후가 당형인 송희여(宋禧餘)에게 키워준 은혜에 감사한다고 보낸 서신의 일부와 서태후 본인의 사진이 있다. 동시에 이 마을에는 '낭낭원(娘娘院)'이라는 오래된 집이 보존되어 있는데, 전해지는 바로는 서태후가 어렸을 때 거주했던 곳이라고 한다. 서태후가 황태후가 된 후에 현지의 사람들이 기념하기 위하여 그 오래된 집을 낭낭원으로 개명하고 보존해 왔다는 것이다. 그외에 작자는 서태후의 장치와 관련된 생활습관도 몇 가지 나열한다. 예를 들어 서태후가 즐겨먹는 나복단자(蘿卜團子), 호관초(壺關醋), 옥미참죽(玉米摻粥), 심주황소미(沁州黃小米)는 모두 장치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상당방자(上黨梆子)도 즐겨 보았다. 이 주장은 서태후의 어전여관인 유덕령(裕德齡)이 쓴 <청궁이년기>에서도 확인된다. 거기에는 서태후가 일찌기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고 적혀 있다: "시골생활을 좋아한다. 거기가 궁안보다 생활하기 자연스럽다.' 현재 서태후가 산서 장치에서 태어났다는 주장은 사학계에 큰 영향을 미치고, 적지 않은 사학자들의 반박도 불러왔다. 서태후가 어디서 태어났는지에 대하여는 추가로 더 고증이 필요한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