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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당)

이성기(李成器): 황제의 형으로 죽지 않은 인물...

by 중은우시 2018. 2. 26.

글: 장금(張嶔)


고금중외에 만일 어느 신분이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존귀하지만, 실제로는 고위험군에 속할까? 답안은 '황제의 형(皇兄)'이다.

이 신분은 얼마나 고위험군인가? 고대사를 보면 황위를 다투는 경우에 형이라는 이름을 달면 비참하게 죽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뭐가뭔지도 모르고 감옥 속에서 죽어가거나, 궁문을 들어서다가 화살을 심장에 맞거나, 반평생 갇혀 있다가 정신이 이상해지기도 한다. 여러가지 방법으로 죽어나갔다. 현대에도 어느 나라에서는 형이 공항에서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죽어간 일도 있지 않은가? 이렇게 위험한 신분이다.

그러나 한 황제의 형은 예외였다: 골육상잔이 밥먹듯이 반복되는 시대에 태어났고, 마음이 악독한 황제동생을 두었지만, 평생 경성에서 잘 살다가 죽는다. 역대의 비극적인 황형들에 비하면 행복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행복했던 황형은 바로 당현종(唐玄宗) 이융기(李隆基)의 형인 이성기(李成器)이다.

이성기는 나중에 이름을 이헌(李憲)으로 바꾼다. 당고종 조로원년(679년), 대당황실에서 태어난다. 그의 가족은 삼대내에 황제가 수두룩하다. 조부가 당고종 이치이고, 조모가 무측천이고, 셋째숙부가 당중종 이현이며, 친아버지가 당예종 이단이다. 그 본인은 6살때 부친에 의하여 황태자에 봉해지다. 겉으로 보기에 아주 잘 태어난 것같은데, 그가 태어난 시대적 배경을 보면 그다지 잘 태어난 것도 아니다.

대당왕조는 강하기로 유명하다. 다만 육친불인(六親不認)으로도 유명했다. 원래 서로 사랑하고 아껴야할 일가족인데, 자주 정변으로 죽고 죽였다. 예를 들어, 당태종 이세민은 형과 동생의 시신을 밟고 정관지치를 연다. 이성기에 이르러 그가 출생했을 때는 조모 무측천이 정권을 농단하며, 이씨황족들에게 피바람을 일으킬 때였다.

과연 어려서부터 대당황실은 도광검영에 휩싸인다. 먼저 조부가 죽은 후, 등극한 셋째숙부는 조모에 의해 폐위된다. 그 후에 부친이 황위를 계승하고 자신은 태자가 된다. 부자는 조모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는 허수아비였다. 그후에 폐위되었을 뿐아니라, 이당(李唐)왕조도 조모에 의하여 '무주(武周)로 바뀐다. 옛날의 이당황실자제들은 유배를 가거나 피살되었다. 어렸을 때의 기억은 모조리 비참한 광경이다.

그리고, 이러한 비참함은 다른 집의 문제만이 아니라 그의 집에도 닥쳤다. 예를 들어 자신의 모친 유씨, 동생 이융기의 모친 두씨는 평소 본분을 지켜가며 조용히 살아가고 있었는데, 종이 무고를 하는 바람에 무측천에 의하여 죽임을 당한다. 시신조차 돌려받지 못한다.

이런 참상을 너무 많이 보다보니 익숙해 진 것일가. 이성기는 어린 나이에 매우 성숙해진다. 일찌감치 겸허한 성격을 갖는다. 무슨 일이든 다투지 않는다. 무측천 시대에 궁에서 쫓겨나고, 많은 고생을 겼으면서도 전혀 원망하지 않는다. 셋째숙부 당중종이 복위하고 무주가 다시 이당으로 되돌아왔을 때, 스물몇살의 이성기도 고진감래로 다시 장안에 돌아와서 왕이 된다. 그러나 여전히 겸허했고, 당중종이 하사한 것도 황망해하며 받지 않았다. 그는 알고 있었다. 그것은 돈이 아니라 화라는 것을.

여러해동안 궁중에서 살아남으면서, 그는 이런 심성을 가지고, 눈에 띄지않는 골목에서 일체의 은원과 거리를 둔다.

이렇게 가슴졸이며 사는 동안에 그는 무엇을 가지고 심성을 다졌을까? 그에게는 한 가지 특수한 취미가 있다. 바로 음율(音律)이다. 이 점에서 그는 부친의 훈도를 받았다. 그러나 수준은 청출어람이었다. 그는 중원의 악곡에 능통했을 뿐아니라, 각민족의 음악에도 능했다. 그리고 시사도 잘 지었고, 본인이 춤도 잘 추었다. 그외에 각종 악기도 잘 다루었다.

그리하여 당중종 이현이 재위할 때, 위황후와 안락공주가 권력을 농단하며 여러 왕공대신들이 죄를 받을 때도 이성기의 집안에서는 자주 연회를 열었다. 동생 이융기가 장안으로 밀고 들어가 위황후등을 죽일 때도 그는 아무런 압력을 받지 않고 그저 음악에 심취했다. 그리고 부친 당예종이 다시 등극한다.

이렇게 칼끝에서 춤을 추면서 안전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는 춤추는 것보다 뛰어난 재주가 있었다. 이성기가 일찌감치 수련한 것이다: 안목. 오랫동안 숨어지낸다고 하여 머리까지 녹슨 것은 아니다. 정국의 풍취초동을 모조리 꿰뚫어 보고 있었다.

과연 부친 당예종 이단이 다시 등극하자, 장남으로서 지위가 더할 나위없이 존귀해진 이성기는 다시 한번 큰 시험에 들게 된다: 태자(太子)의 자리.

태자를 다투는 일은 역대 이래로 피비린내나는 일이다. 당예종이 다시 등극하자 31살의 이성기는 즉시 핫한 인물로 떠오른다. 황제의 적장자이니 신분과 지위가 명정언순(名正言順)했다. 그 이외에 다른 사람이 누가 있단 말인가.

그런데 정말 다른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바로 당예종의 셋째아들이다. 친히 병력을 이끌고 황궁으로 쳐들어가서 당예종을 등극시킨 평왕 이융기이다. 그에게는 명분이 약했지만, 그는 부친을 황제로 옹립했다. 그의 공은 아무도 다툴 수가 없다. 그래서 문제가 생긴다. 가장 공로가 큰 아들을 태자로 세울 것인가 아니면 가장 신분과 지위가 있는 장남을 태자로 세울 것인가. 대신들이 고민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당예종도 망설이게 된다. 사서에는 '그래서 오랫동안 뜻을 정하지 못했다'고 적었다.

바로 이 때, 이성기가 일어선다: 다투긴 뭘 다투는가. 태자? 나에게 하라고 해도 안한다.

그가 정말 태자에 오르려 하지 않았다고? 그렇다. 다른 사람이 태자가 되려고 애를 쓸 때, 그는 계속하여 당예종을 찾아가서 자신은 태자가 되지 않겠다고 말한다. 심지어 가장 격동했을 때는 곡을 한다. 매일 곡을 하면서 자신의 뜻을 알리니, 어떤 때는 부자가 같이 끌어안고 울었다. 네가 안하겠다면 할 수 없다.

그에게 진정 안목이 있다는 것은 그가 운데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가 울면서 부친에게 한 말에 있다: 평화로운 시대라면 적장자를 세우고, 나라가 어지러운 때라면 공이 있는 사람에게 돌아가야 합니다. 만일 태평성대라면 나를 세워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난국입니다. 반드시 셋째를 세워야 헤쳐나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단언한 것을 보면 이성기는 그저 간단한 문예남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때의 당왕조는 안에는 내분으로 망가져 있고, 밖에는 강적이 있었다. 여러 면에서 위험한 국면이었다. 만일 태자의 자리를 빼앗게 되면 아마도 강산을 지켜내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여러 신하들이 보기에 분명히 시끄러웠어야할 태자다툼이 순조롭게 끝이 나고, 이융기는 형인 이성기의 지지하에, 자연스럽게 태자에 오른다. 얼마후에는 다시 순리에 따라 등극하니 그가 당현종이다.

이런 장면에 당시의 호사가들은 이렇게 감탄했다: 일생동안 숨어지내던 이성기가 이제는 정말 집에 숨어버렸구나. 이어서 발생한 한 가지 일에서 그는 더 이상 숨어 있지 않았다. 당현종의 등극초기에 최대정적은 고모인 태평공주였다. 이 고모가 한창 때에는 조정의 절반이 그녀의 문하였다. 먼저 태자다툼에서도 그녀가 중간에서 불을 질렀다. 그녀는 자신의 권세를 유지하기 위하여 이융기를 반드시 밟아놓아야 했던 것이다. 이융기가 황제가 된 이후에도 여전히 가만히 있지 ㅇ낳고 병력을 모아서 계속하여 권력을 잡으려 하고 있었다.

이 때, 이성기는 숨지 않았을 뿐아니라, 반대로 황제동생과 협력한다. 대당강산을 위하여 고모를 제거하기로 한 것이다. 즉시 포주자사를 맡는다. 이런 의외의 방식으로 태평공주의 증원노선을 끊어버린다. 그리고 이융기와 앞뒤에서 협력하여, 전광석화처럼 무측천시대에 가장 강성했던 강자를 제거한다. 어쨌든 이융기의 황제지위를 안정시키고, 이어서 병권을 동생에게 넘겨준다. '동생이 잘해 보게. 형은 계속 음악을 하며 놀고 있을테니...'

이렇게 해준데 대하여 당현종 이융기는 계속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있었다. 당초 태자가 되었을 때도 큰 상(床)을 만들어 이성기와 함께 이불을 덮고 음악을 감상했다. 형제의 정이 깊음을 보여준다. 나중에 군림천하하고나서는 그것만으로 부족했다. 아예 누각을 지어서 할 일이 없을 때면 이성기를 불러서 같이 연주한다. 이렇게 형제간의 정이 깊음을 대당의 모두가 알게 만든다. 그렇다면 평생 숨어지내던 이성기는 이렇게 걱정없이 살았을까? 그렇지는 않다.

당현종 이융기는 전반생은 정명했지만, 후반생은 엉망이었다. 그러나 평생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그것은 시기심이다. 그는 누구도 믿지 못했다. 아들이 모반했다고 의심하여 세 아들을 죽인다. 대장이 불충하다고 의심하여 명장 왕충사, 가서한등을 망친다. 당연히 그의 이런 문제로 인하여 성당은 쇠퇴기로 접어든다.

이런 성격을 지닌 동생이 그에 대하여는 안심하도록 만들다니 형인 이성기는 정말 대단했다.

이성기는 평생 칼끝에서 춤을 추면서 살아왔고, 가장 뛰어난 것은 안목이다. 그는 동생이 어떤 사람인지를 너무나 잘 알았다. 그래서 일찌감치 황제동생으로부터 여러 은총을 받으면서도 그는 전혀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개원4년(716년)에 이르러서는 당현종이 아주 편안해 할 일을 하나 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이름인 성기(成器)가 당현종의 생모인 두씨(昭成皇后)의 이름과 같으므로 피휘를 위하여 이름을 고치겠다고 한 것이다. 더 이상 이성기라고 부르지 않고, 앞으로는 이헌(李憲)이라고 하겠다고 선언한다. 당현종은 당연히 크게 기뻐한다; 좋은 형이다. 녕왕에 봉한다.

이 일의 관건은 어디에 있는가? 이성기는 지금 이헌이라고 불린다. 평생 그의 가장 큰 신분은 적장자라는 것이다. 그의 이런 신분은 당현종의 마음 속에 항상 걸렸다. 어쟀든 자신은 출신이 낮다. 봉건사회에서 이것은 큰 결격사유이다. 그래서 당현종은 등극한 후, 모친 두덕비를 소성황후로 추존한다. 이헌이 이렇게 말을 한 것은 앞장서서 당현종의 모친을 인정한다는 말이다. 당현종은 너무나 기뻤고 그에 대하여는 완전히 안심한다.

큰 일뿐아니라 평소의 작은 일에도 이헌은 아주 잘 처리했다. 매일 놀고 사냥하고 음악을 즐겼지만 절대로 정치에 대하여 묻지 않았다. 왕유등 문학가들과 교류를 하였지만 절대로 결당하지는 않았다. 더더구나 조정의 인물들과는 교류를 하지 않았다. 이런 생활을 그는 여러 해를 하루같이 했다. 그러다가 63세에 사망한다. 그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당현종은 아주 비통해 한다. 그 자리에서 곡을 하고는 3일간 조회를 폐하고, 형을 양황제(讓皇帝)로 추존한다.

다른 집안의 형제들은 서로 황제가 되겠다고 다투었는데, 나의 형은 평생 양보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