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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한)

자이모귀(子以母貴): 넷째아들인 유장(劉莊)은 어떻게 황제에 올랐는가?

by 중은우시 2018. 1. 19.

글: 소가노대(蕭家老大)


한명제(漢明帝) 유장은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의 넷째아들이다. 그의 위로는 장남 유강(劉疆)이 있다. 유장은 신야(新野)의 음려화(陰麗華)가 낳은 아들이고, 유강은 정공왕(定恭王)의 외손녀인 곽성통(郭聖通)이 낳은 아들이다. 이 두 여인의 사이에, 유수가 더욱 사랑한 여인은 음려화이다. 이때 음려화는 아직 자식이 없었고, 곽성통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다. 후대를 잇는 것의 중요성을 생각하여 음려화가 양보한다. 건무2년(26년) 유수는 곽성통을 황후로 봉하고, 음려화를 귀인으로 봉한다. 같은 해 유강은 황태자가 된다.


천하가 아직 평정되지 않았을 때, 유수는 군대를 이끌고 팽총(彭寵)을 토벌하러 나선다. 음려화도 그를 따라 원정에 나선다. 행군도중에, 음려화가 임신을 한다. 건무4년(28년), 원지(元氏)에서 음려화는 사내아이를 낳는다. 그가 바로 나중의 한명제 유장이다. 당시의 이름은 유양(劉陽)이었다. 그는 동해왕(東海王)에 봉해진다.


유양은 음려화의소생이므로 유수의 총애를 받는다. 소년시대에 그는 경학대사 환영(桓榮)에게 배운다. 10살때, 명저 <춘추>를 암송하고 이해했다. 유수는 이 아들이 대단하다고 여긴다. 아예 신동이라고 생각한다.


비교적 어려서부터 유수의 곁에서 정무활동을 학습하고 관찰하였기 때문에, 유양의 재능은 더욱 성장한다. 건무15년(39년), 유수는 천하의 간전(墾田)과 호구(戶口)를 조사하도록 명을 내린다. 그리고 자사, 태수에게 명하여 보고하게 한다. 이날 12살의 유양은 유수의 뒤에 서 있다가 관리들의 신색을 관찰한다. 유수는 자세히 문서를 검사하며, 넘기며 넘기다가 진류현(陳留縣)의 이독(吏牘)에서 이런 말을 발견한다: "영천(潁川), 홍통(弘農) 가문(可問), 하남(河南), 남양(南陽) 불가문(不可問)" 유수는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아래의 관리들에게 묻는다. 모두 무슨 의미인지를 말하지 못한다. 이때, 유수의 뒤에 서 있던 유양이 부친의 허가를 받아 일어나서 말한다. "하남은 수도가 있는 곳입니다. 중앙의 고관들이 모두 이곳에 살고 있습니다. 남양은 폐하의 고향입니다. 폐하의 친척이 이 곳에 많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두 지방의 전답숫자는 검사를 책임지고 있는 관리들도 감히 더 물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유수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12살짜리 아이가 이렇게 예리한 안목을 지니고 있다는데 놀란다. 그리하여 유양을 황위계승자로 세우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때 곽황후는 총애를 잃어, 마음 속으로 원망이 있었다. 수시로 음려화와 유수를 비꼬고 비웃었다. 그리하여 유수가 유강을 황태자에서 폐위시키고 유양을 황태자로 올려야겠다는 결심을 더욱 굳히게 만든다.


그러나, 황태자 유강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유수는 먼저 곽황후를  폐위시킬 생각을 한다. 건무17년(41년), 유수는 "원망을 품고 여러번 칙령을 어겼다"는 죄명으로 곽황후를 폐출시킨다. 그리고 음려화를 황후로 올린다.


황태자 유강은 모친이 폐위되면서 대세가 기울었다고 여긴다. 그래서 부득이 상소를 올려, 양위를 하고 변방을 지키겠다고 청한다. 유수는 유강에게 잘못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그 청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유강은 다시 가까운 대신들에게 부탁하여, 그가 진정으로 아뢰는 것임을 말씀드려달라고 한다.


유수는 시기가 성숙되었다고 여기고, 건무19년(43년), 조서를 내려 유강을 동해왕(東海王)으로 하고, 동해왕 유양을 황태자로 한다. 그리고 이름을 장(莊)으로 개명시킨다. 이 해에 유장은 16살이었다. 건무중원2년(57년) 유수가 사망하고 유장이 정식으로 황제에 즉위한다. 그가 한명제이고 당시 나이 30살이었다.


서한 후기의 몇몇 황제때, 대권이 외척의 손에 넘어가서, 결국 왕망(王莽)이 권력을 전횡하고 결국 황위를 찬탈하는 일이 벌어졌다. 왕망의 제도개혁과 이로 인한 사회동란으로 국가의 예의제도는 파괴되었다. 그리하여, 광무제 유수가 사망하였을 때, 여러 왕과 대신들이 조문을 하는데 아무런 법도가 없었다. 조정은 혼란스러웠다. 한명제 유장의 형제들은 궁전에서 황제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앉았으며, 이 새 황제를 완전히 무시하는 양태였다. 위신을 수립하기 위하여, 한명제는 성격이 강직하고. 행동거지가 위엄있으며, 법을 집행하는데 엄격한 태위(太尉) 조희(趙熹)로 하여금 장례를 주관하게 한다.


조희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검을 들고 입조하여 한명제와 같이 앉아있던 여러 왕에게 모조리 계단아래로 내려오게 한 후, 대신의 행열에 들어가게 한다. 이렇게 하여 군신의 구분을 명확히 하였다. 그리고 궁중의 호위제도를 정비하고, 왕궁의 관리들이 궁정을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게 하였다.


이렇게 하여 조정의 질서가 점차 안정된다. 그외에 한명제는 신변의 하급관리이건 아니면 삼공구셩이건 모두 엄히 감독한다. 잘못이 있을 때마다 그 자리에서 질책한다. 그리하여 영평(永平)조의 관리들의 법도는 아주 엄정해지고 후세 사가들의 칭송을 받는다.


그러나, 한명제가 넷째아들의 신분으로 대통을 승계한 것에 대하여 형제들은 불만이 있었다. 한명제의 동모제(同母弟)인 산양왕(山陽王) 유형(劉荊)은 대홍려(大鴻臚) 곽황(郭況, 곽황후의 동생)의 글씨를 위조하여, 동해왕 유강에게 편지를 써서 그에게 거병하여 천하를 취할 것을 권한다. 유강은 담량이 작고 겁이 많은 사람이어서 급히 서신을 가져온 사절과 서신원본을 낙양으로 압송하여 한명자에게 조사처리하게 한다.


한명제는 암중으로 알아보고 이 서신을 산양왕 유형이 썼다는 것을 알아낸다. 더욱 큰 소란이 일어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한명제는 유형사건을 그대로 묻어둔다; 음려화, 곽성통 두 황후를 한명제는 동등하게 공경한다; 전태자 유강에 대하여도 한명제는 잘 보살펴주고 대우도 다른 왕후들 보다는 높이 해주었다.


인사에서, 한명제는 개국공신 고밀후(高密侯) 등우(鄧禹)를 태부(太傅)로 하고, 동모제 동평왕(東平王) 유창(劉蒼)을 표기장군으로 하고, 광무제때의 태위 조희는 원직에 그대로 남겨두어, 종실, 공신, 관료집단이 모두 자신의 정치적 대표를 갖도록 해준다. 이렇게 하여 정권의 안정을 도모한다. 이와 동시에, 한명제는 명을 내려, 천하에 작위를 내리고, 유민을 안착하게 하며, 형벌을 감면하고, 홀아비 과부등을 돌봐준다. 이렇게 하여 최대한도로 사회의 갈등을 완화시키고 자신의 통치를 공고히 한다.


한명제가 계속 양보만 한 것은 아니다. 일단 통지가 공고해지자, 그는 반대파를 엄격히 진압하고 자신의 전제통치를 강화한다. 영평13년(70년)에 발생한 초왕영옥(楚王英獄)은 바로 한명제가 제후왕세력에 침충한 타격을 가한 사건이다.


초왕 유영은 광무제 유수와 허미인(許美人) 사이에 태어났다. 허미인이 총애를 받지 못했으므로, 유영도 유수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 그리하여 비교적 편벽한 곳에 봉해진다. 봉지도 아주 작았다. 당시에 불교가 점점 중원으로 들어왔는데, 유영은 심심하던 와중에 불교에 흥미를 느낀다. 그리하여 여러번 불법을 구하고 부처의 힘으로 자신을 보호하기를 기원했다. 이 해에 연광(燕廣)이라는 사람이 조정에 상소를 올리는데, 유영이 어양인 왕평, 안충등과 불교를 믿는다는 명목으로 도서를 만들어 불충한 일을 도모했다는 것이다.


한명제는 보고를 받은 후, 즉시 종정(황실사무를 관리하는 중앙관리)에게 관리를 파견하여 조사하게 한다. 파견나간 관리가 얼마후 보고를 올리는데, 초왕 유영이 간사하고 교활한 자들을 모아서, 도참을 날조하고, 찬위를 도모했으며, 증거가 확실하니 유영을 사형에 처해달라는 것이었다.


한명제는 초왕 유영의 왕작위를 박탈하고, 그를 단양경현(丹陽涇縣)으로 가게 한다. 유영은 단양에 이르러 자살한다. 안충과 왕평은 낙양의 감옥에서 옥리의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아무렇게나 진숳하여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끌려간다. 이들 중에는 수향후(隨鄕侯) 경건(耿建), 낭릉후(郞陵侯) 장신(臧信), 호택후(護澤侯) 등회(鄧悝), 곡성후(曲成侯) 유건(劉建)등이 있다. 이들 4명은 안충, 왕평과 평생 만난 적도 없고, 서로 모르는 사이였다. 다만 한명제는 이때 이미 예전에 종실의 여러 왕들에 대하여 꾹 참아 오던 원한을 모조리 초왕 유영 사건에 풀었다. 그래서 안충, 왕평이 진술한 사람은 죄증이 있건 없건 모조리 끝까지 추궁하려 했다. 아랫사람들은 윗사람의 뜻을 받들어 여러 억울한 사람들이 처벌받는다, 나중에 시어사 한랑(寒郞)이 적극 간하여, 한명제는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직접 낙양감옥으로 가서 직접 사건을 조사하고 무고한 사람 천여명을 석방한다. 그리하여 조야가 안정되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