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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진시황릉의 허실

진시황릉의 허실(10): 여산북록에는 진시황이 묻혀 있지 않다.

by 중은우시 2018. 2. 7.

글: 진경원(陳景元)


숙후가 사망하고, 유명한 조무령왕이 즉위한다.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상산에 자신의 능묘를 '예수'하기 시작한다. <사기.조세가>의 기록에 따르면, 조무령왕은 "3년(기원전323년)부터 능묘를 만들기 시작했다." <사기.집해>를 보면 알 수 있다. 이 능묘의 위치는 여전히 곡양의 경내이다. 조무령왕은 조나라의 내란으로 기원전299년, 사구궁에 연금되어 3개월동안 먹지 못해 아사한다. 이를 보면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능묘를 건조한 시간은 최소한 20년이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하기 시작한 능묘는 산 속 깊은 곳의 암석이 있는 것이다. 현재, 돌을 파내서 만든 묘실로 10년이상이 걸린 곳을 알고 있다. 예를 들어 만성의 유승묘, 서주의 초왕묘, 예천의 당태종묘, 이들이 돌을 파서 만든 묘실의 내부공간용적은 모두 5000평방미터 이상이다. 조무령왕의 왕릉 시공기간은 그들보다 더 길다. 형성된 공간의 용적도 그들보다 컸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중국고대 최대의 "착산위릉(鑿山爲陵)" 묘실이라고 불러도 문제가 없다.


아주 아쉬운 일이라면, 조무령왕은 형대 사구궁에서 사망한 후, 원하는대로 자기가 생전에 예수해놓은 능묘에 묻히지 못했다는 것이다. <한서.지리지>에 따르면 그는 산서성 영구현에 묻혔다. <태평환우기>에는 하북 영년현에 묻혔다고 한다. <창주지>에서는 창주현이라고 하고, <대청일통지>에서는 한단현이라고 한다. <기포통지>에는 평산현이라고 한다. 결론적으로 조무령왕이 '예수'했던 거대한 능묘는 계속하여 '공묘'로 남아 있었다. 진시황이 사구에서 사망한 후 조고등은 공개적으로 장례활동을 할 수 없는 상황이므로, 요란하게 방부조치를 할 수가 없었다. 더더구나 썩는 냄새가 하늘에 진동하는 상황하에서 최대한 조무령왕이 예전에 남겨놓은 '공릉'을 이용해야 했다. 진시황의 시신은 비빌스럽게 거기에 매장된다. 이것이 당시의 여러가지 모순을 해결할 수 있고, 각종관계를 순조롭게 처리할 수 있는 상승의 대책이다. 단지 진시황의 시신을 비밀리에 매장하고, 그 후에는 연기를 잘 하고 마무리지으면 외부인의 의심을 사지 않을 수 있다.


석륵, 조조등은 모두 각종 '분신술'을 사용했고 공공연히 가짜시신, 가짜관을 만들어 길거리를 누볐다. 기실 귀신도 모르는 가운데 어떤 사람이 진짜 시신, 진짜 관을 가지고 밤에 깊은 산골짜리고 가서 몰래 묻었고, 그 장소를 알지 못한다. 진시황의 시신에 대하여 이렇게 긴급한 순간에 어렇게 한편으로 출순대오가 계속하여 서행하여 북상하게 하면서, 깃발을 나부끼고, 북을 치면서 아주 기세좋게 나간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방식으로 일부의 사람으로 하여금 진시황의 진짜 시신, 진짜 관을 가지고 밤에 몰래 산골짜기에 묻어버리고 이들 인원도 죽여버린다. 그러헥 되면 모든 것은 흔적이 남지 않는다. 후세인들에 있어서 정말 '그 장소를 알지 못한다' 역대제왕능묘는 명확한 표지가 있으면 거의 모두 도굴당했다. 석륵등과 같이 산골짜기에 깊이 매장된 능묘는 후인들이 발견할 확률이 아주 낮다. 이것은 가장 유효하고 가장 믿을만한 비밀매장방식이다.


조무령왕이 '예수'한 능묘는 극소수의 장인들이 암석을 하나하나 파내서 만든 것이고, 내부의 공간이 아주 넓었다. 입구는 아주 좁다. 매장후 그것을 막아버리면 된다. 산꼭대기에서 돌맹이를 쏟아부으면 된다. 그렇게 하면 능묘는 산세와 하나로 융합된다. 무측천의 건릉 지궁도 양산의 가운데 숨어 있다. 당나라말기 40만명이 구석구석 파냈지만, 돌맹이밖에 없었고, 입구를 찾아낼 수가 없었다. 이것이 바로 지금까지 보존된 원인이다. 만일 진시황이 하북의 산에 비밀리에 안장되었다면, 비록 생전에는 장생불사약을 얻지 못했지만, 사후에는 장구히 안식할 장소를 찾은 것이다. 모택동이 사망하기 전에 계속하여 호남으로 돌아가겠다고 요구했는데, 말년에 고향을 그리는 정이 커지는 법이다. 진시황의 모친은 하북사람이고, 자신도 하북에서 태어났으니 그가 죽기 전에 일종의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마음'이 있지 않았을까? 길이 머나먼 함양으로 가서 안장될 가능성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죽은 자리에서 고향의 땅에 안장된다. 이것은 '낙엽귀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진시황 본인도 곡양이 낯설지 않다. 곡양에 조무령왕의 '공릉'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사기.진시황본기>에는 "진시황6년. 한,위,조,위,초가 진을 공격하고 수릉(무덤)을 취했다"고 되어 있다. 이는 조나라의 수릉이 있던 곳을 일찌기 진나라가 점령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조무령왕이 만든 '수릉'의 정보는 당연히 진나라의 재상이 알고 있었을 것이다. <사기>에는 이렇게 말한다: 조나라의 수릉은 장산(지금의 곡양현 경내)에 있고, 진시황은 생전에 여러번 장산에 가보았다. 그래서 그곳의 산수는 잘 알고 있었다. 진시황이 출순도중에 사망하는데,조무령왕의 이 '공릉'을 열어서, 진시황본인의 진묘로 쓴다고 하더라도 우연성이 있기는 하지만 역사적으로는 필연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진시황을 진나라도성인 함양으로 가져가서 매장하지 않으면 무슨 체통이 서겠는가? 조고등 정변자들이 보기에, 정권을 탈취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그것 자체가 진시황에 대한 최대의 불충이고 배반이다. 정변자들이 진시황의 제위, 왕권, 존엄을 얘기한다는 것은 완전히 불필요한 일이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진시황릉을 묘사하면서, 하나도 당시 진나라에 존재하는 실제상황과 들어맞지 않게 적었다. 하나도 당시의 공사기술과 들어맞지 않게 적었다. 그 안의 단어 하나, 글자 하나를 살펴보면 모조리 문인들이 잘 쓰는 허구, 과장, 억측의 수법이 들어 있다. 일종의 문학적 창작물로 보는 것이 실제에 맞다. 불행한 것은 그는 이런 글을 모두 "사(史)"라는 체계에 집어넣었다는 것이다. 문학작품이 '사기'로 바뀐 것이다. 사마천은 궁형을 당했고, 박해를 받았기 때문에 그의 이런 경력은 후세인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 수처년동안의 잔혹한 정치현실은 오랫동안의 고압적이고 전제적인 체제하에서 서로 다른 견해, 서로 다른 목소리를 표출시키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그래서 일부 문인은 권력자에 대한 불만을 왕왕 '차고풍금(借古諷今)"의 방식으로 표출했다. 사마천은 진시황릉을 욕했는데, 실제로는 한무제가 무릉을 건조한 것을 빗댄 것이다. 그래서 일부 문자는 도가 지나쳤다. 그래서 후인들은 그에게 따질 것은 아니다.


사마천은 진시황의 "아방궁, 여산묘"를 가지고 한무제가 '상림원, 무릉원'을 만든것을 못하도록 권했다. 토목공사를 대거 일으키는 것이 지나치면 민원이 발생하고, 이것은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출발점은 좋은 뜻이었을 것이다. 다만, 한무제는 자기가 하고싶은대로 그냥 했다. 단 반마디도 그는 듣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상림원은 "주변이 삼백리"로 아방궁에 전혀 손색이 없었다. 무릉의 공사도 부지선정부터, 기획, 준비 그리고 지면궁전건축까지 해놓는다. 사후에 '황장제주'로 지궁을 만드는 것까지 앞뒤로 합쳐서 50여년의 시간이 들었다. 공사건설의 규모나 호화로운 정도는 <사기>에서처럼 허구적이지 않고, 확실히 당시의 현실생활ㄹ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재미있는 점은 사마천이 그렇게 말렸지만, 아무런 작용을 하지못했다. 한무제는 상림원과 무릉을 다 짓는다. 그런데도 천하대란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문제는 사마천의 진시황릉에 관한 그 허구의 문자가 수천년동안 사람들은 경전적인 사료로 보존되어 내려왔다는 것이다.


제왕능묘공사에 있어서 한무제의 무릉건설의 문자기록은 비교적 진실하고 믿을만하다. 거기에서 고대문인들의 허구적이고 과장된 부분은 찾아볼 수가 없다. 그저 사실을 가지고 중국묘장의 역사를 연구해야, 규칙적인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묘장의 형식이 시대에 따라 계속 변천하고, 건축기술조건이 점점 완비되면서, 시종 특정한 궤적을 따라 앞으로 전진한다. 즉, 지상건축이건, 지하건축이건, 모두 미완성에서 완성까지의 순서로 발전해 나간다. 시대 - 기술 - 묘장. 이 삼자간의 관계는 아주 밀접하다. 그들은 서로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가 없다. 누구도 전체적인 제약을 벗어나서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한무제의 무릉건설은 그의 지궁규모, 구조, 시공기술, 건축공기가 모두 시대를 구분하는 좌표적인 의미와 작용이 있다. 이와 비교하자면, 당시 진시황릉의 공사건설은 진한시대의 공사기술의 속박과 제한을 돌파했다는 아무런 이유가 없다.


<사기>이건 아니면 다른 문학류의 작품이건, 진시황릉에 대하여는 거대하고 기이하다고 묘사한다. 사람들은 그것을 한무제의 무릉과 비교하고 분석해보기만 하면, 금방 정확한 결론을 얻어낼 수 있다. 진시황릉에 덮여 있는 신비의 면사를 벗겨내면, 금방 전부 드러나게 된다. 무릉을 대표로 하는 서한의 황제릉은 진시황릉 건설의 하나의 거울이다. 무릇 진시황릉에서 가능했던 공사구조는 서한 황제릉의 구조에서 반드시 가능했다. 무릇 서한 황제릉에서 불가능했던 공사구조는 진시황릉공사에서도 반드시 불가능했다. 건축기술은 실무에서 나온다. 그리고 다시 실무로 돌아간다. 건축기술은 복제할 수 있고, 계승할 수 있다. 건축기술은 후대가 전대를 따라잡을 수 있다. 그러나 전대가 후대를 초과할 수는 없다. 건축학이라는 각도에서 본다면, 진시황릉이 갖출 수 있는 공사규모, 지궁고조, 시공공기등 일련의 문제를 감별, 심의, 판단하려면 당연히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객관적인 실천의 검증을 거쳐야 한다.


진시황릉의 지궁은 도대체 어떤 건축구조일까? 섬서 봉상의 진경공릉의 '황장제주'와 한무제등 여러 한나라능묘의 '황장제주'지궁구조를 보면, 그것이 진시황릉의 지궁건설에 쓰였을 것이다. 이는 춘추시대에서 진한시대에 이르는 기술의 '궤적'이다. 이 기술의 '궤적'은 진시황시대에 도저히 돌파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진시황릉의 지궁은 그저 이런 '황장제주'의 구조형식을 지닐 수밖에 없다. 진시황릉의 지궁이 깊이는 시공전에 현지의 우물로 탐측한 결과 지하수층까지 내려가지 않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수환(水患)을 겪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동위고'는 폭발문제로 할 수가 없다. '황장제주'는 방형목재료를 벽돌처럼 쌓는 것이기 때문에 아치형지붕을 만들어야 한다는 기술적인 난제도 없다. 지하의 황장제주로 구성된 관곽실과 통로의 너비는 매우 좁게 된다. 그히하여 '수은으로 강하와 대해를 만드는 것이라든지' 진나라의 판도를 만들어 '지하왕조'를 건설하는 일체의 구상은 모두 현실화될 수가 없다. 


기실, 진시황릉 지궁의 건설은 진한시기 최고등급의 다른 대형 묘장들과 원칙적으로 아무런 구분이 없다. 비록 진시황릉의 지궁면적이 약간 클 수도 있고, 배장품의 수량이 약간 더 많을 수 있고, 봉토의 높이가 약간 더 높을 수 있지만, 이것은 인력으로 해낼 수 있는 것들이다. 다만 당시의 조건하에서, 진시황릉 지하의 지궁은 단지 '황장제주'를 취할 수밖에 없다.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서 만들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진실되고 엄숙한 건축사상 받아들일 수 있고,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외에 역대의 "황장제주"구조의 지궁은 시공공기가 7개월을 초과하지 않는다. 생전이 '예수'를 할 필요도 없다. 거기에 진시황 본인이 동순도중에 사망하였으므로 정변자들은 '비불발상'을 고집했다. 만일 현지인 하북에서 매장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방부조치도 제대로 취하지 못한다면, 진시황은 일찌감치 시수, 시충이 흘러나와 원모습을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비록 함양에서 정식 장례활동을 진행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저 사람들의 이목을 가리기 위한 가상(假像)일 뿐이다. 실제로 진시황의 시신은 여산으로 운반해와서 안장할 수가 없었다.


여러 사료의 기재를 보면, "황장제주"지궁의 건설은 기껏해야 7개월이면 완성된다. 이어서 흙으로 메우고 봉토를 쌓으면 된다. 그리고나서 지상의 전조후침의 거대한 궁전건축물, 수릉건축물 신도와 내외성원등을 세우면 된다. 만일 진왕조가 멸망하지 않았더라면, 능묘를 완성하는데 충분한 시간이 있었을 것이다. 당나라때 당태종의 건릉이 7개월의 시간을 들여서 지궁을 건설했다. 규모는 비교적 작지만 당고종이 매장된 후 다시 50여년의 시간을 들어서 후속건설 한다. 한무제의 무릉은 비록 수십년에 걸쳐 만들었지만 지궁은 마지막에 만들었고, 수십년의 시간은 모두 생전에 지면건축물을 '예수'하는데 들인 시간이다. 진시황이 죽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엄청난 규모의 농민반란이 일어난다. 이곳은 높은 봉분과 내외성원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공사는 진행하지 못했다. 여산의 진시황릉은 모든 것을 서둘러 진행했고, 서둘러 끝맺었다. 그래서 그래서 서둘러 만드는 과정에서 진정 진시황릉 지궁으로 들어간 것은 그저 생전에 입던 의관뿐이다.


만일, 이후에 실제로 여산이 진시황릉 지궁에 실제로 유골이 발견된다면 그것은 절대로 진시황 본인이 아닐 것이다. 분명히 진시황의 '대역'일 것이다. 왜 진시황에게 '대역'이 있다고 말하는가? 그것은 진시황이 죽은 후, 함양으로 돌아오는 3개월의 귀로에서, '진시황'이 죽지 않은 것처럼 출순대오를 따라 전체 일정을 완성했기 때문이다. <사기.진시황본기>에는 이렇게 기록한다. "그래서 행관자가 수레를 타고, 도착하는 곳마다 식사도 올리고, 백관들이 일을 평소처럼 보고했다." 그 뜻은 '진시황'이 여전히 환관이 모든 수레에 앉아서, 매번 숙영지에 도착할 때마다 식사도 올리고, 연도의 문무백관들이 영접하고 배웅하며, 일을 보고했다는 것이다. 모두 평소와 아무런 구별이 없었다는 것이다. 귀로에서 '진시황'이 얼굴을 드러내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매번 저녁이 되면, '행궁'으로 가서 취침도 했을 것이고, 매번 수레가 지날 수 없는 관애(關隘)를 만나면, 가마로 옮겨탔을 것이다. 함양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다시 황하도 건너야 하는데, 이때는 배로 갈아타야 한다. 백관들이 알현하면 예로 맞이해야 했을 것이다. <사기>의 기록은 우리에게 말해준다. 하나의 허구의 '진시황'이 시종 존재했던 것이다.


많은 정치인물 예를 들어 사담 후세인, 히틀러등은 자신의 '대역'을 가지고 잇었다. 그들의 모습, 목소리, 동작은 모두 원래인물과 똑같았다. 한고조 유방은 바로 자신의 '대역'이 있었다. <한서.고조본기>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유방이 항우에게 함양에 포위되어 있을 때, 생긴 모습이 유방과 꼭 닮은 기신(紀信)이 나서서 적에게 거짓으로 투항한다. 이 틈을 타서 유방 자신은 좁은 길로 도망칠 수 있었다. 진시황은 생전에 형가, 고점리, 장량등의 암살을 당했다. 그래서 외지로 출순할 때는 항상 비밀리에 '대역'을 데리고 다녔다. 긴급할 때는 대역을 내세우는 것이다. 후대의 제왕들도 '대역'을 두게 된다. 진시황이 사구에서 사망한 후, 정변계획의 필요상, 조고등은 '비불발상'을 결정한다. 대외적으로 정보를 봉쇄하는 동시에, 진시황이 여전히 건재하다는 가상을 보인다. 이것은 모순된 현상이다. 그러나 긴급한 순간이라면 '대역'이 쓸모있다. 일반적인 상황하에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일거에 해결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진시황의 사후, 조고등의 조종하에, '대역 진시황'은 부대를 이끌고 계속 북상한다. 모든 것은 예정된 대로였고 누구도 그가 가짜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런 위장은 함양까지 계속된다. 그리고나서 황제의 사망소식을 알린다. 그후에 진시황의 의관을 안장한다. '대역'을 비밀리에 처리하지 않을 수 없고. 그는 진시황을 위하여 마련한 관목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비록 그는 억울하게 죽기는 하겠지만, 그대로 최고등급의 장례를 받는 것이다. '대역'의 묘가 진짜가 되어 버리고, 후인들의 무수한 도굴과 파괴를 당한다. 진시황의 '진짜시신'은 영원히 하북의 산속에 잠들어 있으면서 천년이래 각종 침해를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기이한 일은 또 하나 있다. 이 "하(河)"의 "북(北)"은 바로 진시ㅘㅇ의 '수덕(水德)'제도를 상징하지 않는가? 그래서 진시황이 하북에 묻히는 것은 하늘이 정해준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