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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진시황릉의 허실

진효문왕(秦孝文王)은 왜 진왕(秦王)에 오른지 3일만에 급사했는가?

by 중은우시 2019. 2. 28.

글: 일조심진기(一條尋秦記)


진효문왕은 진왕에 오른지 3일만에 돌연 급사한다. 그는 부인 당씨(唐氏)의 침상 위에서 죽었다. 죽어서도 풍류귀신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진효문왕 영주(嬴柱)에게는 강인하고 장수한 부친 진소양왕(秦昭襄王) 영직(嬴稷)이 있었다. 영직은 56년간 진왕으로 있었으며, 그동안 장남인 대태자(大太子)는 먼저 죽었고, 차남인 영주가 40여년간 태자로 지낸다.


할머니 선태후(宣太后)와 부친 영직이 패도적이고 강세이다보니, 영주라는 태자는 진나라에서 거의 영향력이 없었다. 그래서 영주는 오랫동안 여색에 빠진다. 그래서 몸이 매우 좋지 않았고, 진왕이 된 후에 낙극생미(樂極生悲)로 급사하고 만다.


영주에게는 여러 부인이 있었다. 수량은 스무명이상이다. 그중 유명한 부인으로는 적처(嫡妻)인 화양부인(華陽夫人), 애인인 화음부인(華陰夫人), 영이인(嬴異人, 진시황의 부친)의 생모인 당팔자(唐八子)! 영주는 태자로서 할 일이 없었고, 그래서 도광양회하고 있었으며 전혀 두각을 드러내지 ㅇ낳았다. 그래서 그는 공로도 없지만 과실도 없이 부친이 돌아가실 때까지 기다린다.


이 기간동안 영주가 가장 좋아한 일은 여색을 탐닉하는 것이다. 화양부인과 화음부인은 모두 초나라의 미녀들이다. 선태후가 영주를 위해서 물색해준 여인들이다.


화양부인은 침상에서의 기술이 뛰어나고 의학방면의 지식이 있었다. 그녀의 여동생인 화음부인은 과부가 된 후에 자주 영주와 만난다. 자매가 같이 한 남편을 섬긴 것이다. 오랫동안 여색에 빠지다보니, 영주의 신체는 매우 허약해진다. 영직도 한때 영주를 태자에서 폐출시킬 생각을 할 정도였다. 그러나 다른 아들들 중에 마땅한 인물이 없었다. 그래서 부득이 영주의 태자자리를 보전해준다.


여불위는 영주의 아들 영이인을 물색했고, 영이인을 진왕으로 올릴 계획을 세운다.


여불위는 큰 돈을 들여 영이인의 명성을 떨치게 만든다. 그리하여 조나라의 한단에 인질로 잡혀 있던 영이인의 명성은 크게 올라갔고, 원근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명사가 된다.


영직은 손자인 영이인이 현명하고 재능이 출중하다는 소문을 듣는다. 그것도 영주의 태자자리를 보전시켜준 하나의 원인이다. 그리고 명을 내려 영이인을 영주의 적자로 봉한다. 즉 아들이 못났으면 손자를 보는 것이다. 손자가 제대로 된 수성지군(守成之君)이 되기를 기대한 것이다.


화양부인이 제2의 선태후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영직은 동궁을 음란하게 했다는 죄명을 씌워 화음부인을 처형한다. 화양부인의 날개를 꺽어버린 것이다.


화양부인은 여동생을 잃은 후, 자주 넋을 잃고 멍하게 지낸다. 영주를 침상에서 맞는 일도 대폭 줄어든다.


등극후의 영주는 영이인을 태자로 세우고, 화양부인을 왕후로 세운다. 그 후에 당팔자와 침상에서 뒹굴었다. 그러나 결국 당팔자의 침상 위에서 죽어버린 것이다.


영이인이 왕으로 등극한 후, 화양부인은 극력 당팔자를 처형할 것을 요구한다. 여불위가 중간에서 알선하여, 화양부인을 정궁태후(正宮太后)로 앉히고, 당팔자는 부태후(副太后)로 앉힌다. 이런 식으로 태후가 의지(懿旨)를 내리지 않아 진왕을 책봉할 수 없는 난감한 위기를 벗어난다.


영주는 겨우 3일간 진왕으로 있었고, 무슨 큰 일을 한 것은 없다. 그는 죄인을 사면하는 영을 내렸고, 공신들에게 상을 내렸다. 그리하여 시호를 효문왕으로 받은 것이다. 효라는 것은 그가 부친에게 효도를 다했다는 것이고, 문이라는 것은 그가 공신들에게 상을 내리고 죄인을 사면한 행위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