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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진시황릉의 허실

CCTV <국가기억-진병마용탐비: 병마용주인>은 착오백출(錯誤百出)이다.

by 중은우시 2018. 12. 30.

글: 진경원(陳景元)


진용관(秦俑館)의 고고학자들은 단언한다. "시공(寺工)"이라는 관서(官署)는 진시황2년에 설립되었다고. 그 목적은 이를 통하여 병마용갱의 '시공'이라는 두 글자가 새겨진 것은 모조리 진시황2년이후에 제조된 병기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함양박물관의 전람홀에는 '시공'이라는 두 글자가 새겨진 청동기가 전시되고 있는데, 그것은 진효공 시기의 함양 탑아파(塔兒坡) 유적지에서 출토된 것이다.


최근 CCTV국제에서 방송한<국가기억 - 진병마용탐비: 병마용주인>의 프로그램은 착오백출(錯誤百出)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게 많은 국가의 일류 고고학자들이 어떻게 프로그램품질을 관리한 것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초등학생들마저도 범하지 않을 잘못을 그들의 입에서 나오다니. 심지어 그것을 득의만면하여 말하다니. 설마 우리나라의 최고의 학술권위자들의 학식이 겨우 이 정도 수준이란 말인가?


착오 1: 함양이 병마용갱에서 200킬로미터가 떨어져 있다고? TV프로그램은 시작하자마자 진시황이 정무를 본 왕궁과 진시항릉이 소재지인 임동현(臨潼縣)간에는 서로 200킬로미터가 떨어져 있다고 말한다. 서안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서안에서 임동까지는 겨우 25킬로미터에 불과하다는 것을. 함양에서 서안까지의 거리는 더욱 가깝다. 외지인들도 섬서의 지도를 본다면 일목요연하다. CCTV는 굳이 그들간의 거리를 200킬로미터라고 하다니, 정말 웃다가 이빨이 빠질 일이다.


착오 2: TV프로그램에서 반복하여 강조했다. 원중일(袁仲一)은 1974년 7월 15일 임동현 서양고고현장에 진주할 때 제1대 진용고고팀팀장이라고. 역대 신문잡지와 문헌자료를 보면, 기실 당시의 제1대고고팀 팀장은 항덕주(杭德洲) 선생이다. 그래서 말을 바꾸어서 '진용고고팀'의 제1대 팀장이 원중일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것은 객관적인 실제상황과 전혀 맞지 않는다. 완전히 역사적 사실에 어긋나는 것이다.


착오 3: 고고팀이 병마용갱을 탐침할 때 시종 서부변계선(西部邊界線)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때 한 노인이 나타난다. 고고팀에게 이렇게 말해준다. 변계는 우물을 판 곳에서 서쪽으로 150미터 지방이라고. TV프로그램은 마지막에 다시 말을 고친다. 병마용갱은 길이가 230미터이고, 남북으로 62미터라고. 금방 150미터라고 말하더니, 다시 230미터라고 말한다. 도대체 병마용갱의 서부변계선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들이 과거 진용관이 스스로 어떻게 대외에 선전했는지를 잊지 말기를 바란다.


착오 4: 진시황릉의 범위에 관하여 "56.25평방킬로미터"라는 것은 터무니없는 두찬(杜撰)이다. 1981년 4월 20일 <인민일보>에 신화사가 국내외에 발표한 <진시황릉고고에 새로운 발견>이라는 중요뉴스에서는 "고고학자들의 일제조사와 탐측결과에 따르면, 능원 및 매장구역의 범위는 비교적 크다. 동서남북으로 각 15리(7.5킬로미터), 총면적 225평방리(56.25평방킬로미터)이다."


국가문문국이 비준한 <진릉박물원프로젝트건의서>에는 명확히 말하고 있다: 진시황릉중점문물보호구는 면적이 2.26평방킬로미터이다; 일반문물보호구는 19.63평방킬로미터이다; 건설통제지대 - 동으로 희수하, 서로는 임동성구, 남으로 여산, 북으로 신풍원하, 총면적 56.25평방킬로미터"이다. 이를 보면, 원중일은 그것이 진시황매장구역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같다. 의문의 여지없이 착오이다.


착오 5: "여불위과(呂不韋戈)"는 진용의 성격을 규정하는 철증(鐵證)이 아니다. '여불위과'는 그저 이동가능한 문물이다. 그것이 병마용 건조연대와 필연적 관계가 있을 필요는 없다. 병마용갱이 완성된 후, 갱내의 진흙퇴적층이 아주 두텁다. 퇴적층의 수도 아주 않다. 수십년간의 퇴적간고의 시간이 필요하다. '여불위과'는 다수가 퇴적층의 표면에서 출토되었다. 그래서 그것은 분명 병마용갱이 불태워지기 전에 외부인들이 가져온 것이고, 그래서 병마용갱내에 남아있게 된 것일 것이다.


착오 6: '시공' 두 글자가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 진시황2년이 아니다. 왜냐하면 병마용갱에서 출토된 과피(戈鈹)와 모상(矛上)에 모두 '시공' 두 글자가 새겨져 있다. 만일 '시공' 두 글자가 진시황2년이후에 비로소 나타난 것이라면, 과와 피는 자연히 진시황시기의 병기이다. 그러나 함양박물관의 전럼홀에는 아주 눈에 잘 띄는 장소에 진효공 시기의 청동기 위에 '시공'이라는 두 글자가 새겨진 것이 진열되어 있다.


착오 7: 병마용갱에서 출토된 병기는 모두 청동병기이다. 철기가 없다. 그것이 진시황의 배장갱이라는 것을 확정하기 위하여는 반드시 진나라대 철기병기가 없다는 결론이 나와야 한다. 그리하여 원중일등은 전국시기 각 제후국은 모두 철기병기가 없고, 청동병기만 있었다고 말한다. 중국국에서 철기병기가 청동병기를 대체한 것은 한나라이후의 일이아는 것이다. 이를 보면 이들 고고학자들은 중국의 철기병기의 발전사에 대하여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설마, 전국시대의 각국군대는 모두 청동병기만 사용했단 말인가? 아무렇게나 한권의 <전국사> 혹은 <야금사>를 뒤져보기만 하면, 어느 국가이든 모두 대규모의 철강기지를 갖추고 있었고, 예리하기 그지없은 강철병기를 갖추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기>에 기록된 사마천의 고조부 사마창(司馬昌)은 진나라때의 '주철관(主鐵官)'이다. 바로 진시황이 임명한 철강부장이다. 설마 사마창이 그저 구리만 제련하고, 강철을 제련하는 전문가가 아니었단 말인가?


착오 9: 프로그램에는 '형가자진(荊軻刺秦)'의 장면을 보여주었다. 진시황의 수중에 90센티미터의 청동검을 쥐고 있었다고 여긴다. <염철론>을 보면, 진시황이 형가에 반격한 병기는 7척길이의 패검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칠척의 장검이라면 161.7센티미터이다. 161.7센티미터 길이의 장검은 강철검일 수밖에 없다. 절대로 청동검은 그렇게 길 수가 없다.


착오 10: 원중일 등은 1호갱이 바로 대형 군사방진이라고 했다. 무엇이 방진(方陣)인가? 방진은 군사용어이다. 지극히 넓고, 평탄한 지형 위에서, 혹은 연병장에서 열병장에서 ㅗ여주는 군사작전의 방형 대형이다. 방형대열의 규모가 크면 클수록 요구되는 부지도 더욱 크고, 편평해야 한다. 좁고, 가늘고 길고 기복이 있는 장소에는 방진이 어울리지 않는다.


착오 11: 원중일 등은 계속 견지하여 말하기를, 병마용갱의 안에는 대량의 전차와 전마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진시황시기에 분명히 차전(車戰)과 같은 전투방식이 존재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차전방식은 4마리의 말이 수레를 끌고, 사병이 수레 위에서 적과 싸우는 것을 말한다. 그 적용조건은 지극히 평탄한 지영이어야 한다. 산지, 구릉, 강을 만나거나 심지어 습지를 만나더라도, 전차와 차전은 존재가치와 작용을 잃어버린다.


<문헌통고>의 기록에 따르면, "옛날의 차전의 법은 대오가 정연하지 않고, 좌우에 섞여 잇고, 병졸이 정한 법으로 싸우지 않는다...춘추시기가 끝날 때까지 패배한 측은 차전을 제대로 못했기 때문이었다." <숙원잡기> "삼대에서 춘추에 이르기까지 차전이 위주였다. 진,한이후에는 '기병'위주였다" 병마용의 수레는 바퀴의 길이가 서로 다르고, 제후의 도로에서 달릴 수가 없다. 병마용갱의 말은 나귀같고 노새같다. 그러므로, 이런 전차는 전쟁에서 쓸 수가 없다.


착오 12: 명마용갱은 "1인1검"이다. 다만 병마용갱에서 출토된 검, 피, 과는 겨우 23건이다. 나머지 병기는 어디로 갔는가? 진나라 말기, 항우가 함양에 도착하기 전에, 백만이상의 진군을 소멸시켰고, 대량의 병기를 획득했다. 유방이 함양을 칠 때, 진나라의 창고를 봉쇄시킨다. '게간이기, 참목위병(揭杆而起, 斬木爲兵)'의 진승 대군은 적수공권인데 뭘 가지고 싸웠ㅇ르까? 설마 병마용갱의 대부분 병기는 정말 그들 그들이 가져가지 않았단 말인가?


착오 13: 병마용은 1974년 3월 임동현 서양촌의 농민이 우물을 파는 과정에서 발견한 것이다. 한 '젊은이'가 중앙에 서신을 보내 진나라 무사용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강청은 즉시 사람을 섬서로 보내 조사했고, 고고팀을 조직하여 서양촌으로 보낸다. 그래서 '진나라병마용'과 관련한 성격규정은 고고팀이 서양촌에 진주하기 전에 일찌감치 북경에서 '흠정(欽定)'되었다. 이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었던 '정치적 성격규정'이다.


정상적인 고고학에서라면 여하한 과학적 발굴도 거치지 않고, 아무런 엄격한 논증도 없이, 밀실에서 강청이 결정했다는 것은 당시에 계급투쟁이 모든 거을 결정하고 모든 것을 압도했기 때문에, 이렇게 '먼저 성격규정하고, 후에 발굴하는' 방식을 썼는데, 이것이 고고학의 기본원칙에 들어맞는단 말인가? 21세기에 이르러서도 이견을 제기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단 말인가? 사람의 입을 막을 수 있단 말인가.


학술적으로 서로 다른 견해, 서로 다른 의견은 아주 정상적이다. 우광원 선생은 생전에 주장했다. '학술문제는 수수가 다수에 복종해야하는 것이 아니다. 더더구나 민주집중제를 해서도 안된다." 유일하게 정확한 방법은 각종 방식의 학술논쟁을 벌이고, 모두에게 충분한 발언권을 주는 것이다. 학술의 시비는 싸우면 싸울수록 분명해진다. 이것은 학술도덕문제이다. 또한 학술발전의 방향성문제이다.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갈 것인지 당국에서는 재삼 고민해봐야 할 것이다.


'병마용주인은 진시황이 아니라 진선태후이다"라는 견해를 내놓은 본인은 여기에서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자 한다. 1957년부터 진시황릉을 연구하기 시작하고, 1974년부터 다시 병마용을 연구하기 시작하여 전후로 61년의 기간동안 병마용의 주인에 대한 고증을 하면서 이미 120만여자의 <진용재탐>의 원고를 완성했다. 만일 출판환경이 허용하지 않는다면 할 수 없이 후인들이 결정하게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