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진경원(陳景元)
진시황이 만일 함양에서 죽었다면, 역대제왕이 경성에서 죽은 것과 마찬가지로, 조정에서 항상 마련해둔 냉장된 보관장소가 있고, 궁내에는 장례활동을 치르는데 필요한 각종 도구가 충분히 준비되어 있기 때문에 필요하다면 '비불발상'을 할 때, 궁문을 걸어잠그고, 대외에 소식이 전해지는 것을 막으면 어느 정도 예견한 효과를 거둘 수 가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대외적으로 '비불발상'하는 동시에, 내부의 치상활동은 여전히 차례차례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필요한 관목은 언제든지 가져와서 사용할 수 있게 하고, 각종 방부업무도 하나하나 실행해야 한다. 방호조치가 완비되어 있을수록 '비불발상'의 조치를 취하는데 기술적인 큰 문제가 생기지 않게 된다. 여러 사료기록을 보면, 티벳의 5세 달라이라마가 원적한 후, 방부업무를 엄밀하고 효과적으로 해서 '비불발상'의 시간을 13년이나 길게 가져갈 수 있었다고 한다. '비불발상'의 기간동안 제왕군주가 비록 죽었지만, 대외적으로는 여전히 살아있는 최고통치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진시황은 동순 도중에 돌연 사망했다. 전통적인 법도대로 한다면, 외지에서 죽은 제왕은 즉시 가장 긴급히 취하여야할 조치는 부근 군현에 설치된 관청에서 보관하고 있는 얼음을 가져와게 하여야 하고, 수행어의로 하여금 방부조치를 취하게 하여야 한다. 한편으로 가장 빠른 속도로 사구에서 출발하여, 계속 남쪽으로 행진하여, 황하를 넘어 낙양을 지나, 다시 서쪽으로 효산고도를 지나 함곡관을 넘어 동관에서 직접 함양으로 돌아가야 한다. 비록 일부 지방은 지형이 험준하고 울퉁불퉁하지만, 이 길이 가장 가깝고, 가장 편리하며 가장 빨리가는 길이다. 다만 이 길은 절대로 갈 수가 없다. 이 길로 들어서는 순간 '비불발상'을 한 정변자들의 의도는 관철될 수가 없기때문이다.
정변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사람들의 이목을 가리기 위하여, 진시황의 방대한 동순인원은 사구에서 남쯕으로 가서 바로 함양에 가지를 못하고, 원래의 계획대로 서쪽으로 갔다가 다시 북쪽으로 간다. 산서로 가서 천리사막을 지나 혹서를 무릅쓰고 진왕조의 가장 북쪽에 있는 구원군(九原郡, 지금의 내몽골 빠오터우지구)에 이른다. 이것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이해되지 않는 농허작가(弄虛作假), 사근구원(舍近求遠)의 행동이다. 조고등을 제외하고 다른 사람들이라면 절대로 하지 못할 일일 것이다. 만일 전체 정변과정에서, 한편으로 대외적으로 진시황의 사망소식을 완전히 봉쇄해야 한다. 약간의 흔적이라도 드러내서는 안되고 사람들에게 진시황은 아직 살아있다고 믿게 만들어야 한다. 심지어 가장 험난한 환경 속에서도 호위부대와 계속 같이 생활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절대로 악취가 계속 나서는 안되고, 여우나 승냥이가 따라오면서 울부짖어도 안되고, 가마에서 시수나 시충이 흘러나와서도 안된다. 이것은 조고등 정변자들이 정변을 성공시킬 수 있는 관건이다.
조고등에게 있어서, 정변을 일으켜서 정권을 탈취하는 것은 그들의 당시 최고목표였다. 무릇 정병에 유리한 일체의 일은 모두 망설임없이 진행했을 것이다. 무릇 정변에 방해가 되는 일은 전혀 사정을 두지 않고 막았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정변은 완전히 '비불발상'과 연결되어 있다. '비불발상'이 정변을 성공시키는 전제조건이다. 무릇 '비불발상'과 저촉되는 일체의 활동은 일률적으로 금지하고 엄격히 통제되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그들은 도성인 함양으로 돌아오기 전에, 진시황이 사구에서 죽었다는 소식 그리고 장례와 관련한 어떤 흔적도 남겨서는 안된다. 조그만치도 드러내지 않아야만 대외적으로 진시황의 사망소식을 봉쇄할 수 있다. 확실히 진시황의 이번 출순의 대오를 보면, 그리고 조고정변집단을 보면, 마지막에 진나라도성인 함양으로 돌아오는 중에 도대체 어떤 일은 할 수 있고, 반드시 해야 하고, 어떤 일은 하지 말아야 하고, 반드시 금지해야흔지는 실제로 명확한 목표가 있고, 일정한 선이 있는 것이다.
많은 고고학자들은 모두 말한다. 진시황릉 지궁은 수은으로 가득 차 있다고. 수은은 아주 좋은 방부작용을 한다고. 그래서 진시황의 유체는 지금까지도 완전하게 특별히 만든 관목 속에 보존되어 있다고. 당연히 만일 진시황이 함양에서 죽었다면 그리고 적시에 신뢰할만한 방부조치를 취했다면, 그리고 정말 수은을 지궁에 넣었다면, 이상의 주장은 성립될 수가 있다. 아쉬운 것은 진시황이 수천킬로미터 밖에서 객사했다는 것이다. 죽은 후에 온갖 방법으로 사망소식을 덮었다. 감히 여하한 형태의 치상활동도 취할 수가 없었다. 3개월의 시간이 흐르다보니 시신은 일찌감치 존재하지 않는다. 소위 "먼 곳으 물로는 가까운 갈증을 해결할 수 없다" 여산복록의 지궁의 안에는 '수은'이 있다. 그렇지만, 형대 사구에서 사망한 진시황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지궁의 '수은'은 진시황의 시신이 함양으로 돌아오기 전에 아무런 방부나 보호작용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시신이 모두 썩어버렸는데, '수은'으로 방부조치를 할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이런 인과관계는 완전히 전도되어 있다. '사후조치'를 가지고 일부 고고학자들은 소리높여 떠든다. 실로 그렇게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진시황의 죽음을 감추기 위하여, 한가지 반드시 피해야할 일은 바로 돌아오는 대오에서 공개적으로 장례도구와 관련된 물건이 나와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특히 관목이 백관의 눈앞에 나타나서는 안된다. 만일 대형의 상등급의 나무로 만든 관목이 나타난다면, 어떻게 비밀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만일 저급한 관목을 쓴다면, 이는 황제의 법도에 어긋난다. 그리고 관의 틈으로 시수가 흘러내릴 수 있다. 이것도 피하기 어렵다. 음침목(陰沉木)도 제왕이나 고관들이 좋아하는 관의 재료이다. "황금만냥송지부(黃金萬兩送地府), 환래오목제천령(換來烏木祭天靈)" 이것은 바로 고대의 높은 등급의 묘장에서 나타나는 음침관목의 진실한 모양이다. 음침목은 바로 탄화목(炭化木)이다. 촉의 사람들은 '오목'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지하에 수만년간 묻혀서 목질이 단단하고 두텁다. 색채는 검은색으로 귀해보인다. 단면은 부드럽고 매끄러우며 향기가 나는 진주목재이다. 그것은 만년이 가도 썩지 않는다. 벌레나 습기의 침입을 우려할 필요도 없다. 그리고 아주 높은 약용가치가 있다. 원세개는 음침목을 관의 재료로 썻고, 안양의 묘지에 안장되었다
고대에 상등품의 관목은 '만년불휴(萬年不休)"의 기이한 공능이 있다. 모두 변방의 고원지대에서 가조온다. 권세가 있고 재력이 있으면 누구든지 쓸 수가 있다. 설사 일반인이라도 고가를 내기만 하면 살 수가 있다. 그렇게 하더라도 법에 어긋나지 않는다. 이런 류의 관목은 너무 크고, 너무 무겁기 때문에, 왕왕 수십명 심지어 백명이상이 들어야 한다. 관을 드는 방식도 신경써야 하고 엄격하다. 죽은 사람의 영혼이 놀라게 하지 않기 위하여, 도로도 편평하게 닦아야 하고, 관목도 안정되게 들어야 한다. 그렇게 하여 관목이 움직일 때, 기울어지거나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장례때, 10일의 시간이 필요하고 그때 '연강(演杠)'훈련을 해야 한다. 관을 드는 사람들은 정식 장례의 규모와 요건에 따라 먼저 중량이 만근에 달하는 독룡목을 들고, 그 위에 물을 한사발 얹는다. 행진과정에서 물방울이 넘치지 않을 때까지 연습한다. 춘추전국이래로, 모두 이런 방식으로 좋은 관목을 썼다. 진시황의 사후에 쓴 관목이 다른 사람들보다 못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이렇게 만근에 이르는 관목은 많은 사람들이 들지 않으면 앞으로 움직여나갈 수가 없다. 그러면 얼마나 많아야 하는가? <중국상장사>를 보면 알 수 있다: 고대에는 32명이 드는 관, 40명이 드는 관, 64명이 드는 관이 있다. 서태후가 청동릉에 매장될 때는 128명이 드는 관을 썼다. 북경에서 준화까지 서태후의 영구는 '물 한사발이 넘치지 않는' 방식을 앞으로 천천히 이동했다. 비록 120킬로미터의 거리이지만 꼬박 5일이 걸린다. 평균 매일 24킬로미터를 갔다. 진시황의 관을 들고 행진하는 속도도 먼저 관목 자체의 중량이 관련된다. "비불발상"이라는 대전제하에서 진시황의 장례를 공개하지 않으면서 진시황의 만근무게의 관목을 수천킬로미터의 황무지까지 데려갔다가 안전하게 함양으로 모셔갈 수 있겠는가? 보기에 이는 조고집단이 전체 돌아오는 노선을 선택할 때 직면한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고 극복할 수 없는 최대의 난관이었을 것이다.
정변목적에 충실하기 위하여, 그리고 '비물발상'의 계획이 물거품으로 돌아가게 하지 않기 위하여, 이렇게 해서도 안되고, 저렇게 해서도 안된다. 심지어 관목도 찾을 수가 없고, 들 수도 없다. 만일 정말 진시황의 시신이 철저히 썩어버리면 썩어서 시수가 흘러내리고, 구더기가 돌아다니며, 이리가 따라오며 울부짖고, 들개가 쫓아오며, 개미가 가마에 기어오르고, 파리가 꼬여들면, 그리고 시신썩는 냄새로 백관들이 죽을지경이 된다면.어떻게 될까. 사망소식이 퍼져나가면 정변은 물거품이 된다. 그래서 이를 악물고 '비불발상'을 하는데, 시신을 썩게 만들고 자신도 악취를 맡아야 한다면 끝장인 것이다. 철저히 전체 정변계획을 포기해야 한다. 양자중 택일할 수밖에 업사. 날씨가 너무 더우므로, 시신을 매장대기상태로 너무 오래 둘 수는 없다. 이것은 아주 첨예하게 모순되는 것이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조고등 정변자들이 직면한 문제이다. 나갈 것인가 물러날 것인가. 반드시 결단을 내려야 했다. 반드시 최후의 결정을 빠른 시일내에 내려야 했다. 조고등은 과연 정변의 고수이다. 아이큐가 높고, 모략에 뛰어난 대음모가이다. 그들은 가장 긴급한 순간에 절묘한 방법을 하나하나 사용한다.
세상의 일은 아주 복잡하다. 여러가지 방안을 고민하다가 조고등은 정말 양수겹장인 처리대책을 찾아낸다. 첫째는 진시황이 사망한 후 시신이 부패되지 않도록 하고 설사 약간의 이상상황이 있더라도 약간의 긴급구조조치를 취할 수 있다. 관련각종 장례활동(예를 들어 얼음을 운송해오는 것이라든지, 수의를 만드는 것이라든지, 관목을 선택하는 것등)을 적시에 진행할 수 있게 한다. 둘째는 진정으로 '비불발상'을 진행하기 위하여 출순대를 계획대로 행진하게 하고, 백관이 평소와 같이 사안을 보고하게 하여 여하한 장레활동의 흔적도 나타나지 않게 한다. 약간의 시신썩는 냄새를 맡을 수 없도록 하고, 한 방울의 시수도 볼 수 없게 하고, 한 마리의 시충도 나오지 않게 한다. 외부인들이 보기에, 이것은 모순되고, 극단적이며 조화가 되지 않는 조치이다. 그러나 정변자들에게 있어서 심각한 형세, 복잡한 상황은 그들로 하여금 생존의 기로에 서게 만들었고, 스스로를 위기에서 벗어나게 하고 예정한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길을 찾아낸다. 이런 기발한 방법이 정말 존재할까? 대답은 총명한 사람에게 그런 길은 확실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석륵(石勒)은 15년간 재위했고,생전에 능묘를 '예수'해놓지도 않았다. 원인은 제왕의 능묘는 쉽게 도굴을 당하기 때문이다. 황제로서 대외적으로 능묘와 패위가 있어야 한다. 어떻게 이 두 가지를 조화시킬 수 있을까? 건상(建祥)의 <사평(史評)>에 그 해답이 있다: "붕어하자, 8개의 장례대오가 8개의 관을 8로로 나누어 갔다. 각각 빈관을 8곳에 묻는다. 진짜 시신은 비밀리에 깊은 산에 묻는다." <진서.석륵재기>에도 이렇게 쓰고 있다. 석륵은 "밤에 산골짜기에 묻어서, 그 장소를 알지 못한다. 그리고 문물을 준비하여 허장(虛葬)을 하고 고평릉(高平陵)이라고 불렀다." 사람들을 혼동시키기 위하여 여러개의 '허총'을 만들고 의장과 호위까지 준비해서 거대한 장례식을 치른다. 이것은 도굴황제로 유명한 석륵이 취한 일종의 '장례법'이다. 그런데, 진정한 석륵의 묘는 어디에 있을까? 당초 직접 능묘를 만들과 관을 들었던 사람들도 정확히 알 수가 없을 것이다. 삼국시대 조조와 명나라의 황제 주원장도 사후에 각각 성문을 크게 열고, 여러 갈래의 장례대오가 출동한다. 그리하여 여러개의 허총이 나타나고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이 진짜 능묘인지 외인은 아예 알 수가 없게 만들었다.
외인들에게 어느 것이 진짜능묘이고 어느 것이 가짜능묘인지 알 수 없게 하려면 전제조건은 이들 제왕이 새언에 공개적으로 자신의 능묘를 '예수'하지 않아야 한다. 만일 능묘를 모두 사후에 건조한다면 동시에 건조하는 능묘의 규모도 당연히 같을 것이다. 같은 능묘에 같은 관목에 같은 장례를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은 그 중에 차이를 보고 어느 것이 진짜인지 알아차릴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진장, 가장, 진묘, 가묘는 쉽게 구분이 되고, 이런 일은 주도면밀하게 해내지 않으면 의미가 없을 것이다. 비밀리에 매장한다면 가능성은 있다. 역사적으로 확실히 적지 않은 군왕이 생전에 능묘를 '예수'하였지만 여러가지 변고로 사후에 원하는대로 매장되지 않은 경우도 있다. 그리하여 '공묘(空墓)'가 나타난다. 만일 제왕이 급하게 병사했다면, 그리하여 새로운 능묘를 건조할 시간이 없다면, 이런 높은 등급의 '공묘'는 자연스럽게 주인을 바꿔서 사용하게 될 것이다.
명나라때의 명광종 주상락(朱常洛)은 등극후 1개월만에 붕어한다. 새로운 능묘를 만들려면 여러 해가 걸린다. 어떻게 할 것인가? 상의를 거친 후에, 일찌기 당대종 주기옥이 '예수"해놓은 능묘에 안장하기로 한다. 당대종은 내란으로 황제의 자리에서 폐위되었고, 지어놓은 능묘는 버려두고 사용하지 않았었다. 명광종 주상락의 사후에 그것을 수리하여 자신의 경릉(慶陵)으로 삼는다. 중국역사상 처음 자기의 능묘를 '예수'한 사람은 조나라의 숙후이다. <거사기.조세가>의 기록에 다르면, "숙후15년(기원전335년), 상산에 무덤을 만들기 시작한다. 24년 숙후가 죽고, 진, 초, 연, 제, 위에서 정예병사 각각 만명을 보내어 안장한다." 상산은 즉 항산(恒山)이다. 중국의 오악중 하나이다. <한서.교사지>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한선제는 "북악 상산의 상곡양에 제사지냈다" 상곡양은 바로 현재의 하북성 곡양현이다. 성의 동남쪽에 평지가 있고 높은 산이 솟아 있는데 가로로 십리이며 기세가 웅위하다. 정면은 개활지여서 아주 보기드문 풍수의 길지이다. 제왕이 능묘를 예수하기 이상적인 장소이다.
.
'중국과 문화 > 진시황릉의 허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CCTV <국가기억-진병마용탐비: 병마용주인>은 착오백출(錯誤百出)이다. (0) | 2018.12.30 |
---|---|
진시황릉의 허실(10): 여산북록에는 진시황이 묻혀 있지 않다. (0) | 2018.02.07 |
진시황릉의 허실(8): 비불발상(秘不發喪)은 조건이 필요하다. (0) | 2018.02.07 |
진시황릉의 허실(7): 진시황릉은 중국의 대피라미드인가? (0) | 2018.02.07 |
진시황릉의 허실(6): '수은이상'은 외부오염때문이다. (0) | 2018.02.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