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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진시황릉의 허실

진시황릉의 허실(6): '수은이상'은 외부오염때문이다.

by 중은우시 2018. 2. 7.

글: 진경원(陳景元)


<사기>에 "수은으로 강하대해를 만들었다"는 묘사가 있는데, 공사기술의 각도에서 본다면, 허구와 과장이 있지 않을가? 상용(常勇), 이동(李同) 두 선생은 1983년 제7기 <고고>잡지에 <진시황릉중 수은매장의 초보연구>라는 논문에서 "진시황릉 지궁에 대량의 수은이 매장되었다"는 문제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중국지질과학원 물탐연구소는 진시황릉의 봉토 1.2만평방미터의 토양에 대하여 수은함량을 측정했는데, 1곳의 수은함량이 1440ppb에 달했고, 마너지 53곳의 평균수은함량은 205ppb에 달했다. 그런데 봉토에서 2370미터 떨어진 어지부근의 토양에서는 수은함량이 5-65ppb였다. 이를 근거로 봉토의 수은함량이 이상적으로 높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봉토의 수은이상의 원인은 진시황릉의 지궁에서 왔다고 보았다. 이 글이 공표되자, 즉시 국내외에서 관심을 가진다. 어떤 사람은 이는 진시황릉이 '수은으로 강하대해를 만들었다'는 사료의 기록이 현대과학기술로 입증되었다고 말하기까지 하였다.


어떤 사람은 계속하여 이런 말을 했다. 그들은 진시황릉의 수은이상에 대한 탐측을 가장 선진적인 물탐기술을 이용하여 진행했다. 이것이 허구란 말인가. 이것도 조작했단 말인가. 당금의 과학기술도 믿지 않느냐. 너는 그럼 뭘 또 믿느냐고. 이렇게 얘기할 수 있다. 사람들은 그저 결과만 믿는다고 방법과 수단은 믿지 않는다고. 왜냐하면 보계(寶鷄)의 진공대묘, 서주 사자산한왕묘, 삼셥고구의 고묘등 모두 원격탐지기술로 지하묘장의 위치와 구조를 알아래고자 했지만, 그 결과는 모두 실망스러웠다. 1996년 5월, 중국과학원 지구물리연구소는 일단의 '매장물'로 의심되는 곳에 대하여 전기진동탐측을 시행했고, 깊이 1.5미터-2.5미터, 너비 1미터, 길이 3미터의 지점에 전기진동이상이 발견되었다. 그리하여 발굴을 시작했는데, 사람들이 1.5-2.2미터까지 팠을 때는 모조리 세황사(細黃砂)밖에 나오지 않았고, 2.3미터까지 파내려갔을 때는 이미 원시지층이었다. 소위 '매장물'은 1건도 발견되지 않았다. 이런 방법으로 지하에 정말 유적지, 기물이 존재하는지 판단하는 것은 실로 신뢰할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일부 전문가들과 과학자들은 이번 '수은이상'탐측성과의 진실성, 신뢰성, 적용성에 논리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서안에서 1986년에 개최된 "제2회 진용학술토론회"에서 어떤 사람이 진시황릉 봉토의 '수은이상'에 관한 견해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분석하고 논증했다: 만일 진용관측의 견해가 성립하려면, 먼저 이하의 여러가지 외부적인 수은오염의 가능성을 배제해야 한다. 하나는 진시황릉외성동쪽에 건설하는 섬서성봉인기계공장 전도공장에서 배출되는 수은이 포함된 폐수, 폐기가 진시황릉 봉토의 수은오염에 준 영향을 배제해야 하고, 둘째, 진시황릉 봉토상의 과일나무 및 봉토 부근이 농작물, 매년 사용한 각종 수은이 든 농약을 배제해야 하고, 셋째, 장기간 인근 진시황릉의 여산에서 진행된 각종 폭파공사 및 대량의 채석과정에서 사용된 수은이 포함된 폭발물의 영향도 배제해야 한다.


실제로, 진시황릉부근은 외부에서의 오염으로 인한 환경문제가 비교적 심각하다. <임동현지>는 명확히 말한다. 1978-1980년에 전체 현의 벤젠, 수은, 납 작업노동자에 대하여 일제조사를 실시한 결과 21개 공장(봉인기공장, 고풍기공장등)에서 중독자의 수가 1,193명에 이르렀다." <섬서성지>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장안, 임동, 난전현의 농약에서의 수은, 비소등 독성물질은 대부분 토양에 잔류되어 있고, 지하로 삼투되어 들어가서 지하수를 오염시킨다." 전기도금, 화공, 제지, 제혁, 염료등 기업은 생산과정에서 수은오염이 일어난다는 것이 보편적인 상식이다. 그외에 농약수은오염현상도 아주 심각하다. <섬서농목지>에 따르면, "1950년부터, 일찌기 유기염소살충제, 유기수은살균제 새력산, 서력생, 1950년대후기에 보편적으로 사용된 낙과, 새력산, 서력생, 1960년대의 살균제애도 여전히 유기수은인 새력산, 서력생이 위주였다; 1975년에 이르러 비로소 이들 유기수은살균제인 새력산, 서력생의 사용이 중단되었다."


저명한 토양학자인 웅의(熊毅) 선생의 <중국토양>이라는 책을 보면, 토양의 일반적인 수은항유량은 10-300ppb이다. 토지표먄의 수은함유량은 지하토지보다 높다. 토양이 수은오염되면, 수은함량은 40000-50000ppb에 이른다. 전문가들은 이렇게 의문을 제기한다. 만일 진시황릉 지궁에 짐중적으로 대량의 수은이 매장되어 있다면, 그것은 지하에서 큰 수은오염원이 있다는 얘기인데, 역사상 수은오염으로 인한 병력에 관한 기록이 있는지, 그리고 진시황릉에 인접한 몇 개의 우물에서도 수은이상의 데이타가 수집되어야 할 것이라는 것이다. 만일 추가로 확인해서 봉토 꼭대기의 1,440ppb가 있는 수은이상지점에서 계속 아래로 파내려가 묘의 바닥에서 흙을 채취하여 수은함유량을 측정하면, 이 수직방향의 수은함유량은 아래에서부터 위까지의 측정점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갈수록 수은오염치가 올라간다면, 그것은 봉토의 수은오염의 근원이 봉토외부에 있는 것이아니라 지궁의 깊은 곳에 있다는 증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24년의 시간이 지났지만 이렇게 간단한 일들조차 관련부문에서는 하지를 않고 있다


지구의 지각에서 수은의 평균수치는 0.08ppm, 토양은 0.03-0,3ppm.. 대기는 0.1-1.0ppt이다. 수은은 대기에서 증기상태이고, 빗물에도 수은이 있다. 평균농도는 0.2ppb이다. 물속의 수은은 원레 농도가 낮다. 내륙의 지하수는 0.1ppb, 해수는 0.03-2ppb이다. 샘물은 80ppb까지 된다. 그래서 진시황릉의 봉토토양의 수은함유량을 측정하는 과정에서 함류량이 1,440ppb에 달한 한 곳이 비정상적인 것을 제외하면, 나머지 53곳의 평균함류량은 205ppb이므로, 지각본체의 평균치인 0.03-0.3ppm(즉 30-300ppb)의 정상치 범위내에 들어온다. 이곳의 지하수 수은함량도 80ppb의 정상치를 초과하지 않았다. 진시황릉 봉토의 수은함량이 심각하게 높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만일 진시황릉의 ㅅ은이 지궁에서 왔다면 주위의 물, 하도 및 토양에 심각한 오염을 끼쳤을 것이다. 그리고 수은의 함량이 국가기준치인 60-200배를 넘었을 것이고, 205ppb의 정상치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서안의 한 학자는 <사기>의 "수은으로 강하대해를 만들고, 상기관수(相機灌輸)했다"는 기록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리하여, "진시항릉 지궁의 깊은 곳에 13,000여톤의 수은이 있고, 수천년동안 계속하여 흐르고 있다"는 견해를 내놓는다. 그의 눈에는 진시황릉 지궁안에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영구기관'이 있다는 말이다. 이런 '영구기관'이 존재한다는 주장이 과학적인 원리나 법칙에 부합하는지에 대하여 사람들은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다. 이 13,000톤의 수은이라는 말에 대하여도 할 말이 많다. 수은을 생산하는 것으로 유명한 진나라때의 "파과부(巴寡婦)"가 살던 사천 부릉의 수은광산은 명청양대에 이르기까지 조정에 수은을 진상했다. 매년 겨우 300여근이다. <중국고대광야업>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원나라때, 호남의 수은광산에서 매년 생산되는 수은은 2,200냥이다." <가정사남부지>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무천에 반장, 목유, 암전등의 갱이 있는데, 사광이 거기에 있다. 갱의 깊이는 약 15,6리인데, 모래를 태우면 수은이 되는데, 사람들이 생즙(生汁)이라고 한다. 매년 수은 160근을 공물로 바친다."


옛날 방식으로 1톤의 수은을 제련하려면, 갤략 60톤의 정진사(精辰砂)가 필요하다. 수은광산에서 캐낸 광석의 경우에는 품위가 0.34% 정도이다. 1톤의 수은을 제련하려면 286톤의 광석이 필요하다. 진시황릉 지궁에 13,000톤의 수은을 부어넣으려면, 지층에서 깊은 곳까지 372만톤의 광석을 캐내야한다. 명청시기에 공물로 바친 수량이 300근이라는 것으로 계산하면, 진시황은 사천의 '과부'로 하여금 9만년동안 생산해야만 하는 양인 것이다. 설사 어떤 학자는 지궁의 수은을 200톤으로 낮우긴 했지만, 이것도 그녀로 하여금 1,330년간 생산하게 해야하는 수치이다. 알아야할 것은 21세기가 된 지금도, 중국에서 각종 현대화설비를 이용하여 생산하는 수은이 매년 1000톤에 미치지 못한다는 ㅓㅅ이다. 즉, 설사 현재의 가장 선진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진시황릉의 수은을 공급한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13년의 시간이 걸리는 것이다. 어떤 각도에서 보더라도 진시황이 육국을 통일한 후 지하의 '강하대해'를 위하여 200톤을 생산하거나 심지어 13000톤이라는 천문학적 수치의 수은을 생산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천문학적 수치의 수은을 생산하지 못한다면 진정한 강하대해는 비교적 좁은 '제주지실'에 집어넣을 수가 없다. 다만, 고대의 총명한 장인이라면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수은으로 강하대해의 기묘한 광경을 만드는' 방법이. 1978년 4월의 <미국국가지리잡지>에는 이런 글이 발표된다: 진시황릉 지궁에 모형이 있다. 범전배(范傳培)는 대만의 <역사교학>에서 이렇게 썼다: 진릉의 '지하에 입체지도를 만들어 산과 강이 모두 구비되었다" 장문립은 <진용학>에서 이렇게 말한다: 진릉의 지하에는 진나라때의 지형모형이 있다." 그들의 이런 견해는 취해도 될 정도이다. 세계각국의 모형응용과 발전의 역사과정을 보면, 역대제왕은 모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외국 제왕들은 자주 손으로 건축모형을 들고 보는 것을 즐겼다. 중국황제는 친히 모형을 제작한 사례도 자주 발견된다. <습유기> <광박물지>에는 명확히 기록하고 있다. 진시황 원년, 건소국(騫霄國)에서 온 장인이 "사독오악(四瀆五嶽), 열국지도(列國之圖)"의 축소모형을 만들었다고.


<술이기>를 보면, "노반(魯班)은 돌로 우구주도(禹九州圖)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후한서.마원전>에는 "쌀을 쌓아서 산을 만들고 손가락으로 지형을 그렸다"는 기록이 있다. <청이록>에는 오대시기에 "손승우(孫承祐)가 용뇌전소(龍腦煎酥)로 작은 여산, 산과 물, 집, 사람과 가축, 나무와 숲을 모조리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작은 비율로 축소시킨 입체모형을 말한다. 기실 신석기시대부터 명청에 이르기까지 중국고대에는 모두 모형을 가지고 건축설계를 진행했다. 진시황시기에도 산천의 모형, 건축의 모형을 제작하는 전통기법이 있었다 그렇다면 이런 모형을 묘에 넣어서 배장품으로 삼는 것은 정상적인 일일 것이다. 모형을 잘 만드는 사람은 다 알고 있다. 유한한 공간내에 강과 바다의 형태를 사실대로 만드는 것은 상응한 부위에 은가루를 약간 바르고, 수은을 한층 입히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은가루를 붇히고, 수은을 바르는 것으로 '수면(水面)'을 표시하는 방법은 예전에 서안건축공정학원의 모형공장에서 공부했던 학생이라면 다 알고 있는 일이다..


진시황릉의 고고학적 연구는 계속하여 각종 수수께끼와 논쟁에 휩싸여 있다. 섬서성의 고고학자들은 얼마전에, 다시 전세계에 발표했다. 진시황릉의 거대한 봉토 아래에는 높이 30미터에 달하는 '건축물'이 매장되어 있다고. 저명한 고고학자이자 사회과학원의 원사인 유경주(劉慶柱) 선생까지도 거들었다. "진시황은 항상 보통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방법을 넘어섰다. 그 자신의 능묘를 조성하는 과정에서 이렇게 보기드문 건축형식이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이를 보면 고고학계의 인사들은 "구층고루(九層高樓)"라는 주장을 높이 인정하고 잇는 것같다.고고학자들이 이렇게 대담하게 건축문제를 논하는 것을 보고 건축학자로서 부득이 나서서 한마디 해야겠다. 이 '구층고루"는 외부에서 보이지 않고 만져볼 수도 없다. 현재 말하기로는 봉토의 아래에 고루가 매장되어 있다는 것이다. 설마 누군가가 원격탐지의 방식으로 확인한 것인가, 그런 탐측에 의한 과학적인 연구성과인가? 원격탐지기술로 진정 정확학 지하건축물의 평면, 입면, 단면을 그려낼 수 있단 말인가?


무엇이 건축인가? 각종 건축재료를 채용하여 건조한 도로, 교량, 건물, 능묘, 성보등을 '건축'이라고 한다. 무엇이 '건물'인가. 벽이 있고 지붕이 있고 사람이 생산활동이나 거주할 수 있는 곳을 건물이라고 한다. 무엇이 '루(樓)'인가. 수직방향으로 위를 향하여 여러 층으로 나누어 건축한 건물을 '루'라고 한다. 무엇이 '고루'인가? 고층, 초고층의 건물을 고루라고 한다. 사람들은 일종의 공인된 전문용어정의가 있다. 그것으로 '의심스러운 물건'의 공사속성을 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진릉봉토내에 하나의 '고루'가 매장되어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은 섬서성 고고연구소의 연구원이자, 진시황릉고고팀의 탐장인 단청파(段淸波) 선생이다. 몇년전에 단선생은 매체에 경악을 금치못할 뉴스를 던진다. 그들은 일종의 원격탐지기술을 이용하여, '고루'하나가 진시황릉의 높이 50여미터의 봉토안에 있는 것을 발견했고, 이 '고루'의 지붕부분과 봉토의 꼭대기는 약20미터의 거리가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 '구층고루'를 만든 목적은 진시황의 영혼이 돌아다닐 때 쓰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단청파 선생이 말하기를 이 '고루'의 바닥부분은 동서방향으로 168미터이고, 남북방향으로 142미터이며, 외측은 위에서 아래로 9개의 대계(臺階)가 있다고 한다. 매 대계는 너비가 2미터이고 높이가 3미터이다. 꼭대기의 너비는 겨우 16-19미터이다. 안에는 위에서 아래로 6개의 대계로 나누어져 있고, 계단배치방식을 보인다. 사람들은 2003년 11월에 이 단선생이 동경에서 개최된 "진시황릉고고원격탐지및지구물리기술성과검수회의"에서 '진시항릉지궁단면도'를 제시한 적이 있다는 것을 기억한다. 이 지궁단면도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전체 지궁을 둘러싸고 수직의 '궁장(宮墻)'이 있다. 그것은 동서로 168미터, 남북으로 141미터, 너비 16-22미터이다. '궁장'의 지면이하부분은 35미터이고, 지면이상부분은 약 15미터이다. 사람들이 놀라는 것은 마찬가지로 진시황릉의 지궁에 대하여 마찬가지로, 원탐지기술로 측정하고,, 마찬가지로 단청파 선생이 나타나서 발표하기를 두 장의 서로 다른 단면도를 내놓은 것이다. 이 두 장의 단면도중 도대체 어느 것이 맞는 것이고 어느 것이 틀린 것인가?,


중국은 2003년부터 863이라는 "진릉원격탐지및지구물리종합탐사기술"공정을 시작했고, 그 공정의 임무는 기존의 물리학적 탐측기술과 화학적 탐측기술을 사용하여, 진릉지궁의 구조등 관련문제를 검증하는 것이다. 이 프로젝트 연구에서 중점은 진시황릉의 봉토아래부분을 확인하는 것이다. 규모가 큰 묘실공간이 확실히 존재하는가이다. 단성생은 일찌기 이렇게 토로한 바 있다. 진시황릉의 원격탐지고고는 국제적으로 두번째 채용된 것이다. 그리고 국내에서는 최초이다. 여기서 설명해야할 것은 섬서성 고고연구소는 몇년동안 고고원격탐지기술에 대한 일련의 연구를 진행했다. 다만 고고원격탐지기술의 운용은 아직 초보적인 단계이고 모색하는 단계이다. 어떻게 원격탐지기술을 운용할 것인지는 과학적인 결론이 나지 않았다. 반드시 조심스럽게 진행해야 한다. 원격탐지기술이 만능이라고 여겨서는 안된다. 그것이 지하의 모든 미지상황을 탐측해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원격탐지, 물리탐사는 광산분포에 응용되고, 매장량을 조사하는데 일정한 작용을 한다. 다만 고고학에서의 영향력은 아직도 제한적이다.


설사 원격탐지기술이 선진적이라 하더라도, 이런 기술을 운용하여 고대지하건축유적지를 탐사하는 것은 조작자 자신이 필요한 건축전문지식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지하건축의 원격탐지측량은 실질적인 좋은 성과를 거두기가 어렵다. 원격탐지기술로 지하건축유적지를 탐측하려면 가장 중요한 기술성과는 국가에서 통일적으로 제정한 지도작성표준이다. 일련의 진실하고 정확하게 유적지의 전모를 반영하는 공정도이다. 그러나, 표준적인 건축도를 그리는 것은 원격탐지인원이 잘하는 분야가 아니다. 고고학자의 장점이 있는 분야도 아니다. 예를 들어, 저명한 고고학자인 원중일 선생은 진용박물관 1호갱 전시청의 현황에 대하여 그 평면, 입면, 단면을 모두 일정한 비율로 그려내는 업무를 맡긴다면,. 그는 건축제도의 기본을 훈련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업무를 맡기 어려울 것이다. 단청파도 마찬가지이다. 진릉고고팀이 발표한 두 장의 "진시황릉지궁단면도"는 도면에 표시된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비례가 혼란스럽고, 실수가 아주 많다. 품질이 열악한 제품에 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