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문화/진시황릉의 허실

진시황릉의 허실(7): 진시황릉은 중국의 대피라미드인가?

중은우시 2018. 2. 7. 16:06

글: 진경원(陳景元)


어떤 전문가는 "과학적 실험"의 방법으로 원격탐지기술을 가진 인원을 지휘하였다고 한다. 그 방법은 먼저 원격탐지기술전문가를 부른 다음에 한 곳의 지하방어시설공상 대하여 원격탐지설비로 '과학적으로' 탐측을 한 후에, 다시 탐측의 각종 기술적 데이타로 그 지하공사의 평면, 단면도를 그린다. 그리고 서로 다른 구역에 놓아둔 물체의 수량과 질을 파악한다. 그 후에 실제상황과 비교하여, 만일 탐측이 완전히 정확하면 그 후에 사람들은 안심하고 채택하고 만일 탐측이 부정확하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진시항릉의 원격탐지고고과정에서 특히 지하건축공사에 대한 실측성과감정회에서 같은 편의 사람들이 참여한 것을 제외하고, 건축학자들이 건축학의 각도에서 평가하는 것이 아주 필요하다. 엄격한 건축공사실무경험만이 평가할 수 있도록 해주기 대문이다. 원격탐지기술의 일부 수치는 완전히 가치있는 건축과학의 성과로 이어지게 된다. 그리하여 이전에 진심으로 주최측에 맹목적으로 지하건축의 고고학적 뉴스를 발표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한 바 있다.


단청파의 '고루'견해가 나오자마자, 즉시 많은 학자 전문가들이 반박한다. 진시황릉의 봉토 아래에 30미터 높이의 고층건물이 들어서 있느냐는 문제에 관하여 어떤 기자가 저명한 고고학자인 양홍훈(楊鴻勛) 선생을 인터뷰한 일이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민간의 방식은 흙을 그냥 분묘 위에 덮는다. 때려서 다지지도 않는다. 봉분을 때리게 되면 자손이 끊어진다는 말이 있다. 이는 백성들이라면 다 아는 일이다. 진시항릉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그 봉토의 위에 다른 물건으로 눌러서는 안된다. 더더구나 30미터 높이의 건축물로 눌러서는 안된다." 양홍훈은 이렇게 강조한다: "설사 건축을 배우지 않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당연히 알고 있을 것이다. 큰 공간을 지닌 건축물이라면, 복도건축도 있는데, 어찌 그 위에 흙을 덮어서 가득 채운다는 말인가. 만일 복도를 먼저 흙으로 채운다면, 꼭대기부분은 어떻게 채울 것인가. 단청파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먼저 목조복도를 불태워버렸다고. 그러나 최근에는 그가 글을 쓰면서 안에서 목탄도 나오지 않았고, 홍소토(불에 탄 흙)도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한편으로 진시황릉은 먼저 목조건축을 태워버렸다고 하여 봉토내에 일찌기 목조건축물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려 하고 다른 한편으로 자신이 구층대계에 불에 타서 남은 목탄과 홍소토가 없다고 한다. 사람들은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만일 원래 불에 탄 증거가 없다면 그렇다면 당초 '진시황의 불에 탄 목조부분'이라는 주장은 무엇을 근거로 나온 것인가. 진릉고고팀의 팀장인 단청파선생은 이렇게 말도 안되고, 하고싶은대로 망상을 하여 엄숙해야할 고고학적 논증을 하고 있다. 고고팀이 신화창작의 대본영이 되기라도 한 것인가? 기실, 머리를 써서 생각해보면, '구층고루'의 연속한 9개의 작은 대계위에 작은 대계의 고도가 겨우 3미터이고, 작은 대계의 너비는 겨우 2미터라면, 이 2미터의 협소한 공간으로 시공인원이 흙을 운송하여야 한다. 수시비터높이의 항토에서 통로를 만들어내는 것은 건설자체에서 필요하다. 이렇게 협소한 2미터의 공간으로 목조구조물의 회랑을 만든다는 것은 기술적으로 비현실적이고 맞지 않는다.


"고루"를 발견했다는 글과 "고루"에 의문을 나타내는 글이 연이어 발표된 후, 단청파는 <북경과기보>와의 기자인터뷰에서 자신이 일찌기 "진시황릉내에 구층고루가 묻혀 있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고 부정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고루라는 단어는 기자가 나의 의견을 듣지 않고 고친 것이다." 그리고 "고루"보도는 신화사의 저명한 기자 풍국(馮國), 임가(任珂)가 했다. 현재 섬서성이 중대한 고고학적 발견은 대부분 그들의 손에서 쓰여진다. 설마 이번에 '고루'와 관련한 보도는 그들이 날조하고 허구로 만들어낸 것이라는 말인가? 설마 기자의 담량이 그렇게 커서 감히 이렇게 놀라운 고고학적 뉴스마저도 날조해낸단 말인가? 통상적인 이치로 생각해보면, "고루"설이 세상에 나온 것은 신화사기자가 스스로 말을 만들어서 함부로 추가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는 기자의 직업도덕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다행히 어떤 것도 항상 저차 인식하는 과정이 있다. "구층고루"가 의문을 받게 되니 단선생은 자신이 "고루"라고 말했다는 것을 부정한다. 이것은 그 자체로 어쨌든 발전한 것이다.


기실 단선생은 몇년전에 <고고>잡지에서 <진시황릉봉토건축>이라는 글을 발표한 바 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진시황릉의 봉토는 대계(臺階) 모양을 하고 있다. 이 체적이 거대하고 지면에서 30미터 높이의 건축이 묘광주변을 누르고 있다. 항도대의 꼭대기에는 목조구조의 기와건축이 있다. 멀리서 보면 높이 9층의 높은 대를 가진 목조건축물같다. 비록 그는 기자에게 '고루'라는 두 글자를 말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이 "기와지붕, 구층고대, 목조건축"과 "구층고루"간에는 아무런 실질적 구분이 없다. 기자가 그것을 '구층고루'라고 하더라도 일부러 왜곡하거나 작자의 의도를 고친 것은 아니다. 단청파 서생은 이를 통하여 자신과 '고루'의 관계를 단절시켰는데, 그건 맞지 않는다. 각종 자료가 이미 대중들에게 알려져 있는데, 단청파 선생이 '고루'라는 두 글자를 말한 적이 있는지 없는지는 이미 중요하지 않다. 이전에 그가 무슨 말을 했던지 간에, 결국 최종적으로는 컨센서스를 이룬 것이다: 진시황릉의 봉토무더기 안에 진정한 의미의 9층고루는 존재하지 않는다.


2007년 7월 23일 <북경과기보>에는 놀라운 고고학적 발견이 소개된다. 저명한 고고학자인 양홍훈 선생이 50여년의 시간을 들여서 찾아낸 끝에 마침매 놀라운 비밀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이제 그는 자신의 연구성과를 세상사람들에게 알린다: 임동 여산의 북록에 있는 진시황릉 지면에있는 그 봉토무더기는 2000여년이전의 진나라때 월내는 이집크의 쿠푸피라미드보다 거대하고 장엄한 "피라미드"였다! 그의 겉면에 목조구조의 형식이 존재하므로, 그것을 구층대계위의 중화토목 '대피라미드'라고 말할 수 있다. 이에 상응하여, 봉토의 아래에는 마찬가지 규모의 '역피라미드'가 있다. 왜 그것을 '역피라미드'라고 하는가? 그것은 바로 지궁을 만들기 전에 수혈토갱을 파내는데 점차 아래로 가면서 줄어드는 과정에서 9개의 시공 대계(臺階)를 남겼고 양선생은 그것을 '역피라미드'라고 부른 것이다. 이 정,반의 두 개의 '피라미드'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피라미드'를 얘기하자면 항상 사람들은 기운이 난다. 특히 세계7대불가사의를 새로 확인한 후, 중국장성이 정식으로 랭크되면서, 계속하여 제8대불가사의라고 높이 소리치던 것은 이름이 오르지 못했다. 그래서 이 '제8대불가사의'의 열렬한 추종자들은 공허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양선생이 진릉의 봉토무더기가 목조피라미드라는 관점을 내놓자, 그것의 특별한 강심제작용은 아주 컸다. 왜냐하면,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세계의 불가사의중에서 랭킹1위의 지위와 영예를 가졌다. 세계의 수억명의 사람들 마음 속에 그것은 움직일 수 없고, 부정할 수 없고, 없앨 수도 없다. 만일 누군가 진시황릉이 피라미드라는 것을 증명하고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면, 이집트 피라미드와 동일한 광환이 언젠가 여산으로 내려올 수도 있다. 만일 누군가 진시황릉이 피라미드라는 것을 증명한다면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넘어서서 언젠가 세계의 첫번째 불가사의가 될 수도 있다.


무엇이 '피라미드'인가? '피라미드'의 원뜻은 일종의 체형이 방대하고 인력으로 만들어진 공사물이다. 그것은 고대에 일종의 하부는 사방형을 이루고, 측면은 삼각형을 이루고 석재재료로 만든 거대한 능묘이다. 사람들이 만일 멀리서 조망한다면, 마치 중국어의 "금(金)"자 모양과 비슷하다. 그래서 이것을 번역할 때는 "금자탑"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고대에 묘장에 쓰인 '피라미드'는 이집트 나일강변의 70여곤 이외에 유럽의 발칸지구, 아메리카의 멕시코, 온두라스, 과테말라지역에도 대량으로 발견된다. 중국에도 어떤 사람은 "의산위릉(依山爲陵)"한 당나라때의 소릉, 건릉등을 피라미드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것은 당연히 부적절하다. 왜냐하면 각종 산의 모양 자체는 대자연의 생성물이기 때문이고, 인공으로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산체을 배경으로 한 능묘는 피라미드라고 불릴 요건이 되지 않는다. 만일 반드시 비교하고 다퉈야한다면 그것은 통상적인 이치에 어긋나는 일일 것이다.


양홍훈이 제기한 진시황릉이 피라미드라는 것은 대체로 이러하다: 첫째. 지상의 피라미드외형의 길이 -- 초보적인 계산에 따르면 이 '피라미드'의 하부는 길이가 500미터이고 정방형을 이룬다. 총 점유면적은 약 25만평방미터이다. 봉토의 높이, 즉 피라미드의 고도는 115미터이다. 2. 피라미드의 대계구분 -- 그것은 위에서 아래로 3개의 큰 대계로 나뉘고, 매 대계는 다시 3개의 소대계로 나뉜다. 그리하여 9층대계가 층층이 중첩되어 있게 된다. 3. 피라미드의 내부구조방식 -- 외지에서 옮겨온 우량한 마란토(馬蘭土)를 정교하게 걸른 다음에 잡질을 제거하고 모든 생토에 열을 가한 다음에 층마다 채워넣었다. 그리하여 '피라미드'의 큰 골격을 이룬다; 4. 피라미드의 외부배치 -- 이 9층의 대계를 둘러싸고 9개의 대형 목조로 된 복도건축물이 둘러싸고 있었다. 꼭대기의 가장 높은 곳에는 '향당'을 건설한다. 멀리서 바라보면 그것은 층층이 이어진 극히 아름다운 목조구조의 궁전건축이다.





"초토(炒土)설"에 대하여, 양홍훈 선생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진시황릉의 봉토는 채워넣기 전에 흙을 거른 다음에 불로 익혔다. 이는 현지의 농민이 직접 말해준 것이다. 그는 농민이 아주 독실하고, 절대로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 믿게 되었다는 것이다." 봉토에서 발견된 '와당'의 근거는 양선생이 이렇게 말한다: "한번은 이미 고인이 된 고건축학자 유치평(劉致平)과 함께 출장을 갔는데, 기차에서 두 사람은 봉토에 대하여 얘기했고, 그때 유선생에게 진릉 피마리드의 실증적인 증거가 있는지 물었을 때, 유선생은 이렇게 대답했다; '몇년전에 나는 진시황릉의 일부 흙에서 진나라때의 와당 하나를 발견했다' 이는 진시황릉의 봉토에 정말로 건축물이 있었을 가능성을 으미ㅣ한다." 봉토에서 발견한 목탄, 홍소토를 발견한 것에 대하여 양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진시황릉의 고고팀이 발표한 글에서 봉토구층대를 둘러싸고, 기와잔편, 목탄, 홍소토와 주동(柱洞)등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모두 진시황릉 봉토에 목조 '피라미드'가 있었다는 유력한 증거로 말한다.


양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흙을 불로 굽는 것은 공사품질을 보증하기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 황토에는 개미도 있고, 벌레알도 있으며, 풀의 씨도 있다. 그래서 항토하기 전에 반드시 벌레와 알을 죽여야 하고, 풀의 씨도 없애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일단 자라났을 때 대전의 위에는 긴 풀이 나오거나 벌레가 기어나올 것이다. 이것은 죽임을 당항 링이다. 그런 공사의 방법은 역사에 전례가 없다." 수천만입방미터의 흙을 가마솥에 넣고 굽는다니 이는 시간도 많이 걸리고 일도 많으며 더더구나 나무도 많이 필요하다. 설마 개미, 벌레알, 풀의 씨가 층층이 꽉채운 115미터의 항토를 뚫고, 향당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 더욱 기괴한 것은 양선생이 서안시 서부교외의 그 아방궁 전전의 항토 대기를 얘기할 때, 역시 현지의 농민이 그에게 말해주었다고 한다. 거기의 항토는 마란토라고. 항토하기 전에 반드시 걸르고 구웠다고. 이유는 풀씨가 발아하는 것을 막고 벌레알이 깨어나서 기어오르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고. 양선생은 어디를 가든지 똑같은 말을 해주는 늙은 농민이 거기로 따라오는 모양이다. 소위 늙은 농민이 제공한 그 "흙을 거르고 흙을 구웠다"는 류의 말은 실로 크게 의심이 가는 말이다.


마란토는 지리학적인 명칭이다. 그것은 몽골의 모래먼지가 불어온 후에 섬북, 예북지구에 내려앉아서, 퇴적된 일종의 황토이다. 이런 황토는 느슨하고 공간이 많다. 회황색을 띄고 토질이 비교적 가늘다. 거를 필요가 없이 직접 쌓을 수 있다. 양홍훈은 어떤 때는 진시황릉의 마란토를 구웠는데 이것은 역사에 유례가 없고 유일무이한 것이라고 하다가, 어떤 때는 아방궁을 건축할 때 대량으로 구운 마란토를 사용했다고 한다. 이게 도대체 유일한 것이란 말인지 유이한 것이란 말인지 이미 불분명해졌다. 그리고 "분묘는 때릴 수 없다. 때리게 되면 자손이 끊어진다. 진시황릉의 봉토무더기 위에 다른 물건을 누를 수가 없다"고 한 말은 잊었는가? 진시황릉의 봉토는 도대체 다졌다는 것인지도 불분명하다. 기실, 1962년 제8기 <고고>잡지에 <진시황릉조사간보>가 실맀고, 일찌기 사람들에게 알려주었다: 진시황릉의 봉토는 아무런 '항실(夯實)'을 한 바 없다고. 이를 보면, 양선생이 "거르고, 굽고, 다졌다(항실)"고 한 것은 모두 사실과 부합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봉토 위에서 유선생이 말한 와당이 발견된 적이 있는가? 이 일은 인증하기 위하여, 어떤 사람은 여러번 섬서의 고고부문의 전문가에게 물어봤다. 진릉의 "봉토"에서 진나라때의 와당이 발견된 적이 있느냐고. 얻은 대답은: "이는 순전히 유언비어이다. 근본적으로 그런 일은 없었다."는 것이다. 진시황릉의 지면에 만일 침전이 있고, 관리의 주소가 있다면 모두 와당을 남겼을 것이다. 누가 감히 유치평이 말한 '와당'이 반드시 봉토 위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단 말인가? 그외에 봉토의 각 대계에서 정말 대량의 목탄, 회신과 홍소토가 발견되었는가? 진릉고고팀의 팀장인 단청파는 가장 권위있게 말해줄 수 있을 것인데, 그는 이렇게 말했다: "탐측조사를 거쳐 각 대계에서는 홍소토와 목탄의 유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항토대계외측의 각층 대계에서도 목조구조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진시황릉의 봉토는 목조의 피라미드라는 전제조건이 모조리 부정되는데 양홍훈의 목조피라미드라는 주장이 유지될 수 있을 것인가?


양홍훈이 제기한 9층의 피라미드는 하단부분의 크기가 500미터의 정방형이라고, 총면적이 25만평방미터이며 높이가 115미터이고, 위에서 아래로 9개의 대계가 있고, 매 대계의 고도는 10미터이고 꼭대기에는 목조구조의 향당이 건축되어 있다는 것이다. 단청파가 말한 9층 '고루'의 하단부의 크기는 동서가 345미터, 남북이 350미터, 총면적 12만평방미터이고, 높이는 지면에서 30미터이며, 위에서 아래로 9개 대계로 되어 있고, 매 대계의 높이는 3미터이다. 진시황릉의 현재 봉토의 높이는 51.3미터이므로 양홍훈이 말한 115미터의 피라미드꼭대기는 현재의 봉토꼭대기에서 64.7미터를 더 올라간 고공이 된다. 만일 이런 피라미드가 확실히 존재했다면, 현존하는 진시황릉의 봉토무더기는 모조리 이 금자탐의 안에 들어가버려야 한다. 그리고 단청파가 말한 30미터 높이의 "고루"는 전부 이 51.3미터의 봉토무더기내에 매장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나는 봉토의 위에 있고 하나는 봉토의 아래에 있다. 양자를 섞어서 혼동되게 논의해서는 안된다.


더 나아가, 진릉고고팀이 설사 정말 9층의 "고루"에서 목탄, 홍소토, 주동등 흔적을 찾았다면, 그래서 목조건축의 존재를 증명했다면 그가 말한 봉토내에 9층고루가 묻혀있다는 것과 봉토 위에 64.7미터나 더 고공에 피라미드가 있다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사람들은 생각을 해봐야 한다. 하부면적이 25만평방미터이고 높이가 115미터인 피라미드에 현재는 그저 하부면적이 12만평방미터에 높이가 51.3미터인 흙무더기만 남았다. 옛날 "거르고 굽고"해서 다져넣어 만들었던 9층탑신은 일찌감치 사라져 없어진 것이다. 누가 약간의 목탄과 홍소토를 찾을 수 있겠는가? 양선생이 말한 115미터의 목조 피라미드는 그 체형으로 보면, 높이가 110미터에 달하고, 외관상 13층이며 50여년간 건설해서 완공한 티벳의 포탈라궁보다 크다. 피라미드 산형에 인공으로 흙을 구워서 다져넣고, 목조건축이 매층마다의 높이는 모두 12미터 이상이 되어야 한다. 태화전보다도 높다. 공사량이 포탈라궁보다도 많다. 그을 진시황이 생전에 "예수"했다는 것은 조그만치의 설득력도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