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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한)

서한 황태태후(皇太太后)와 태황태후(太皇太后)의 대결

by 중은우시 2016. 8. 14.

글: 유병광(劉秉光)


한원제(漢元帝)의 후비는 아주 많았다. 그중 영향력이 있는 사람은 3명이다. 첫째는 황후인 왕정군(王政君)이고, 둘째는 소의(昭儀) 부요(傅瑤)이고, 셋째는 소의 풍원(馮媛)이다. 당연히 이는 모두 한원제 시대에 그녀들이 얻었든 최종 봉호(封號)이다.


한원제는 평생동안 아들 셋을 두는데, 각각 이 세 명의 여인에게서 나온다. 그중 왕정군은 유오(劉驁)를 낳고, 부요는 유강(劉康)을 낳았으며, 풍원은 유흥(劉興)을 낳았다. 유오는 태자가 되는데 나중의 한성제(漢成帝)이다. 유강은 정도왕(定陶王)에 봉해지고, 유흥은 신도왕(信都王)에 봉해지는데 나중에 중산왕(中山王)이 된다. 비록 명분과 지위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총애를 받는 정도를 보자면 부요가 가장 앞서고, 풍원이 그 다음이며, 왕정군은 보통이었다. 총애를 독점하기 위하여 부요는 적지않게 머리를 썼다. 그러나 다른 두 사람의 한원제의 마음 속에서의 위치를 흔들 수는 없었다.


한원제는 16년간 재위했고, 한성제가 즉위한 후, 왕정군은 황태후가 된다. 부요, 풍원은 아들을 따라 봉국으로 가서 봉국태후(封國太后)가 된다. 한성제는 26년간 재위하였는데 아들이 없었다. 이때 유강과 유흥은 이미 죽었다. 그러나 모두 자식을 두었다. 각각 유흔(劉欣), 유기자(劉箕子, 나중에 유간(劉衎)으로 개명한다)이다. 왕정군은 유강의 아들 유흔을 황제로 앉히자고 주장한다 그가 한애제(漢哀帝)이다. 왕정군이 전혀 생각도 못했던 일은 그녀의 이 결정이 나중에 여러가지 골치거리와 충격을 가져오고 그녀에게 막대한 치욕을 가져다주게 된다는 것이다.


한애제의 조모는 부요이고 생모는 정희(丁姬)이다. 한애제의 즉위후, 왕정군은 태황태후가 된다. 한성제의 황후인 조비연(趙飛燕)은 황태후가 된다. 그러나 그의 조모인 부태후, 생모인 정희는 아무런 존호를 받지 못한다. 왕정군은 마음이 선량한 편이어서, 부요, 정희가 매 십일에 한번씩 미앙궁을 한번 방문하도록 해주어 한애제와 정을 나눌 수 있게 해준다. 다만, 한애제는 이렇게 생각한다. 자신이 이미 지고무상의 황제이므로, 그의 조모와 생모의 지위도 당연히 올려주어야 하며, 부귀를 나눌 권리와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당시, 누군가 한애제에게 정희를 제태후(帝太后)에 봉하도록 상소를 올린다. 그러나 대사마 왕망(王莽)등의 저지와 박해를 받는다. 한애제도 속수무책이었다.


한애제와의 조손관계를 이용하여 부요는 한애제에게 자신에게 존호를 주도록 요구한다. 한애제는 방법이 없었다. 그저 왕정군을 찾아갈 수밖에는. 왕정군은 동의하지 않는다. 그저 정도왕 유강을 정도공황(定陶恭皇)으로 하고 부요를 정도공황태후(定陶恭皇太后)로 삼는다. 한애제는 문학, 법률을 종하하여, 그 가운데에서 근거를 찾는다. 그는 "한가지제(漢家之制), 추친친이현존존(推親親以顯尊尊)"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이 이미 황제가 되었으니, 당연히 조상들을 빛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조정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직접 조서를 내려, 부친 유강을 공황(恭皇)으로 삼고, 조모 부요를 제태태후(帝太太后)로 삼는다. 생모는 제태후(帝太后)로 삼는다. 얼마후 한애제는 제태태후를 황태태후(皇太太后)로 고친다.


이렇게 하다보니 궁중에는 4명의 태후가 병존하는 국면이 나타난다. 이는 역사상 보기 드문 기이한 광경이었다. 구분을 위하여 한애제는 조서를 내려 태황태후 왕정군을 '장신궁(長信宮)'으로 칭하고, 황태후 조비연을 '중궁(中宮)으로 칭하고, 황태태후 부요를 '영신궁(永信宮)'으로 칭하며, 제태후 정희를 '중안궁(中安宮)'으로 칭한다.


한원제, 한성제를 거쳐 한애제에 이르러, 왕정군 부요는 이미 육순이 넘었다. 나이가 들다보니 얼굴에 주름이 가득했다. 다만, 황태태후라는 존귀한 봉호를 갖게 되고 한애제라는 손자가 뒤를 받쳐주니 부요는 아주 교만해진다. 정통의 태황태후 왕정군조차도 눈에 두지 않는다. 그녀는 얘기할 때마다 그녀를 "노구(老軀)"라 칭한다. 그외에 부요는 친정집의 조카들을 발탁하고 왕씨가족세력을 극력 배척한다. 일시에 서한왕조는 부씨집안의 천하가 된다.


부요는 출발은 늦었지만 앞서가게 된다. 그러나 왕정군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그리하여 두 나이든 여인들이 황궁에서 싸움을 벌이게 된다. 비록 봉호에서는 부요보다 존귀하지만, 왕정군은 악독한 부요를 이겨낼 수 없었다. 어쨌든 부요는 한애제의 친할머니이다. 당시, 왕정군은 왕씨집안이 조정에서 세력이 쇠약해지고, 한애제가 실권을 장악하는데 대하여 분노하였지만, 그저 꾹 참고 인내할 수밖에 없었다. 부요와 다툴 수가 없었다. '참는 것' 이것이 왕정군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원수2년(기원전2년), 부요가 병사하고, 한원제와 함께 위릉(渭陵)에 합장된다. 역사에서 효원부황후(孝元傅皇后)라 부른다. 한애제가 죽은 후, 왕정군은 풍원의 아들인 유간을 황제로 앉히고 왕망이 정권을 장악하여 부씨세력을 일망타진한다. 그리고 왕정군에 글을 올려 부요를 정도공왕모(定陶恭王母)로 격하시킨다. 정태후는 정희(丁姬)로 격하시킨다. 최종적으로 웃은 사람은 그래도 왕정군이었다. 그때 부요가 세력을 얻은 후에 교만해져서 왕정군과 왕망에게 죄를 짓게 된다. 결국 그녀의 가족은 치명적인 재난을 당한다. 이는 악을 쌓은 집안은 반드시 남는 재앙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