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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한)

한질제(漢質帝): 말한마디 잘못해 죽임을 당한 9살짜리 황제

by 중은우시 2016. 4. 24.

글: 유병광(劉秉光)


독약을 써서 황제를 독살하는 사례는 역사상 아주 많다. 동한의 한질제 유찬(劉纘)도 그 중의 하나이다. 그 해에 그는 겨우 9살이었고, 말 한마디를 잘못하여 권신이 심어둔 심복에게 독떡을 먹고 죽었다.


유찬(138-146), 한장제(漢章帝)이 현손, 발해효왕 유홍(劉鴻)의 아들. 동한 제10대황제. 영가원년(145년) 나이 겨우 3살짜리 한충제(漢沖帝)가 사망한다. 한충제에게는 자식도 없고 형제도 없었다. 당시의 황위후보자는 2명이었다. 한 명은 청하왕(淸河王) 유산(劉蒜)으로 나이 17세였고, 또 한 명은 천승왕(千乘王) 유찬으로 8살이었다. 당시에 조정을 좌지우지하던 권신 양기(梁冀)는 권력을 탐하여 나이 어린 유찬이 쉽게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겨 양기가 앞장서서 유찬을 황제에 앉힌다.


양기는 전횡발호하고 무슨 일이든 하며, 자기와 가까운 사람은 기용하고, 말한 것은 해냈다. 동한 조정은 거의 그의 개인관창이 된다. 군정대권을 그 혼자서 쥐고 흔들었다. 그리하여 정치는 암흑이 되고, 갈등도 날로 심해졌다. 농민반란도 속속 일어난다. 양기의 전권과 시대을 역행하는 조치는 일부 정직한 관리들의 반발을 불러왔다. 태위 이고(李固)를 중심으로 한 관료들이 속속 상소를 올려 양기를 탄핵하고, 간신을 처벌하고 잘못된 폐해를 시정해달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양기의 보복과 타격을 받는다.


양기는 조정에서 자기가 하고싶은대로 했고, 다른 사람들을 기세로 눌렀고, 불가일세하며, 눈아래 아무도 두지 않았다. 나이어린 한질제 유찬은 그의 행동이 너무 지나치다고 여겼고, 그를 못마땅해 했다. 한번은 조회때 한질제는 여러 신하들 앞에서 양기를 가리키며, "이 자는 발호장군이다."라고 말한다. 양기에 대한 강렬한 불만을 드러낸 것이다. 당시 한질제는 겨우 8,9세였고 아직 어린아이였다. 말을 할 때 머리로 깊이 생각한 것이 아니다보니 아이같은 천진함이 있어서, 이런 말이 튀어나온 것이다. 그러나 양기는 참지 못했다. 특히 문무관리들 앞에서 그런 말을 들었으니, 창녀이지만 정절문을 세우고 싶어하는 권신은 눈이 동그래졌다. 이 어린 황제가 미쳤는가?


조회를 마치고 양기는 기분이 가라앉은 상태로 처소로 돌아간다. 마음 속으로는 분노가 끓어 올랐고, 한질제에 대한 원한이 가슴 속에 자리잡는다. 양기는 이렇게 생각한다. 어린 황제는 그가 직접 그 자리에 오려준 것이다.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은혜를 망각하고 그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기실 양기는 한질제를 무시하고 있었다. 어린아이에 불과하고 큰 역할을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생각해보니 한질제가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일국지군이고, 다시 이고등과 손을 잡으면, 형세는 낙관하기 어려웠다. 언제든 그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었다.


일단 일을 시작했으면 끝을 보아야 한다. 한질제를 죽여야 끝나는 셈이다. 양기는 한질제를 죽이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한질제는 어쨌든 황제이다. 양기도 감히 천하의 금기를 어기고 소황제를 직접 죽이는 것은 택하지 않고 다른 방법을 선택한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양기는 머리를 짜낸다. 곁에 있던 심복을 황제의 어선방에 집어넣고, 독약을 한질제가 가장 잘먹는 떡 속에 집어넣는다. 한질제는 나이가 어려서, 먹는 것을 탐했다. 양기의 음모는 알 도리가 없었다. 그 결과 떡이 배에 들어가자 기절하고 죽어버린다. 나이 겨우 9살이었으며 재위기간은 1년반이었다. 한질제가 죽은 후 양기는 새로 황제를 앉히는데 바로 한환제(漢桓帝)이다. 동한은 오명이 자자한 환령(桓靈)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멸망이 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