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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한)

남월왕(南越王) 조타(趙佗): 중국에서 재위기간이 가장 길고, 가장 장수한 황제

by 중은우시 2016. 12. 23.

글: 대게비(大揭秘)

 

중국에서 재위기간이 가장 길고, 가장 장수한 황제는 누구일까?

 

한무제? 그는 70세까지 살았고, 재위기간이 54년이다. 충분히 장수했다. 그러나 가장 장수한 황제는 아니다. 최소한 강희의 손자 건륭은 90세까지 살았다. 한무제보다 장수했다. 강희제? 그는 21명의 공주, 24명의 황자를 두고, 61년간 재위했다. 보통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70세까지도 살지 못했다. 이들 황제는 이 글의 주인공과 비교하면 모두 약간 못미친다. 재위기간이 가장 길고 가장 장수하며, 진정으로 황제에 오른 적이 있는 사람은 단 1명이다. 남월국 무황제 조타. 그는 121세까지 살았고, 재위기간이 71년이다.

 

조타는 여러가지 직함이 붙는다: 그는 진시황의 대장으로 모택동은 그를 "남하간부제일인"이라고 불렀다. 그는 만황의 남방에 피비린내나는 살륙을 가져왔고, 문명과 진보도 가져왔다.

 

기원전221년, 진나라이 대장 왕비는 연나라를 멸망시킨 기세를 타서 제나라를 대거 공격한다. 40여년간 태평한 세월을 보내던 제나라는 이 철혈대군의 앞에서 조그만치도 저항하지 못하고 제왕건은 그냥 포로가 된다. 육국이 멸망하고 천하가 통일된다. 진시황은 돌연 무력을 쓸 곳이 없어졌다고 느낀다. 그렇다면 다음 목표는?

 

목표는 기실 2개였다. 북에는 흉노가 있고, 남에는 백월(百越)이 있다. 흉노는 기병이 강하여, 오랫동안 변방의 우환이었다. 백월은 오랑캐가 섞여 있어서 원시인과 같은 생활을 했다. 만일 만세기업을 건립하려면 둘 다 포기할 수가 없다. 남정북토는 이제 시간문제였다. 둘을 비교하면, 당연히 북이 강하고 남이 약하다. 그래서 흉노를 북벌하는 임무는 대장 몽염에게 맡긴다. 몽씨집안은 대대로 장수집안이고 충성심이 강하다. 그러나 백월을 남정하는 임무는 이름도 별로 알려지지 않은 도휴(屠睢)에게 맡긴다. 도휴라는 이 생경한 이름이 처음 사서에 나타날 때는 위도휴(尉屠睢)라고 불렸다. 위는 자주 보는 군대계급이다. 크다고 볼 수도 있고 적다고 볼 수도 있다. 진시황의 군사 위료(尉繚)는 국위(國尉)까지 되었다. 일반적인 위는 중간장교이다. 진나라가 육국을 멸할 때 맹장들이 구름처럼 많았다. 진시황인 이들 노장을 모두 내버려두고, 이런 사람을 고르다니 정말 이해할 수가 없다.

 

어쨌든 50만 남정대군을 도휴의 손에 넘겨준다. 이는 이 위급군관을 철저히 놀라게 만든다. 옛날에 진나라의 제일명장 왕전이 초나라를 정벌할 때도 겨우 60만인마였다. 그래도 진시황은 안심이 되지 않아서, 왕전으로 하여금 부동산을 구매해서 자신은 다른 욕심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게 했다. 도휴는 겨우 교위의 계급으로 어찌 이런 능력을 지니고 있겠는가. 그런데 수중에 중명을 가지고 한 지방을 정벌하러 나서다니 정말 몇대에 걸쳐 한번 나올까말까한 행운이다.

 

그러나, 진시황과 도휴는 모두 직면해야할 적을 경시했다. 오령이남은 그때 여러 원시부락이 흩어져 있었다. 이들을 합쳐서 백월이라고 불렀다. 비록 봉두난발에 몸에 문신도 있고, 문화도 없지만, 싸움은 잘했다. 중원보다 나았다. 도휴의 생각대로라면 남정에서 일거에 성공을 거두어야 하므로 속전속결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는 병력을 오로로 나누아 나란히 진격한다. 다만, 거의 거머쥐었다고 생각한 승리에 눈이 멀어진 도휴를 제외하고, 제대로 볼 줄 아는 사람이면 다 알 수 있었다. 이번 전투는 쉬운게 아니다. 영남지방이 무덥고 장독이 있다는 것이나 군수품조달이 어렵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단순히 정벌계획 자체만 보더라도 문제가 많았다: 오로로 병력을 나눈 것은 확실히 적을 경시한 것이다.

 

결과는 예상한대로이다. 제1로 제2로는 도휴가 친히 이끌고 친히 광서로 전진하는 진군은 서구(西甌)인들의 완강한 저항에 부닥친다. 서구는 백월의 한 갈래이다. 도휴는 첫번째 전투에서 서구의 추장을 죽인다. 다만 이들 토착민들은 갈수록 죽어라 싸워서, 진군이 오히려 숭산준령에 갇혀서 꼼짝을 못하고 있었다. 도휴는 화살에 맞아 목숨을 잃는다.그의 부하는 전사하거나 병사하거나 혹은 열사(熱死)했다. 총사령관이 죽으니 나머지 병사들과 장수는 전진할 수도 없고 후퇴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장마철을 맞이하여, 평지도 물이 몇 척이나 고여서 겨우겨우 버티면서 원군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들은 몰랐다. 이렇게 3년을 기다리게 될 줄은...

 

진시황은 장성을 쌓는 동시에, 또 다른 의미있는 공정을 계획한다. 그것이 바로 영거(靈渠)이다. 이 수도를 만들면, 남정대군은 보급품조달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 의미는 대일항전시기에 운남-버마도로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영거는 상수(湘水)와 이수(漓水)를 연결시킨다. 그리하여 물자는 순조롭게 남정의 전선까지 운송할 수 있었다. 도휴의 후임자도 결정된다. 그는 임효(任囂)이다. 그는 도휴와 마찬가지로 내력이 불명확하다. 그러나 분명히 대장의 재목일 것이다. 그의 부사령관이 바로 조타이다. 그는 하북 정정(正定)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이름을 떨쳤다. 19살에 이미 진시황을 따라 천하를 주유한다.

 

그러나 이때의 진군은 더 이상 육국을 휩쓸 때의 그 강력한 군대가 아니다. 진정한 정예병은 북방에 있고, 몽염을 따라 흉노와 싸우고 있었다. 남정대군은 완전히 망인(亡人), 췌서(贅婿), 고인(賈人)등 하층백성으로 구성되었다. 소위 망인은 바로 백수이다. 췌서(데릴사위)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남존여비의 사회에서 여자의 집에 사위로 들어가는 것은 바로 하층민의 대명사이다. 고인은 비교적 기괴하다. 이윤을 추구하는 상인은 놈업을 근본으로 하는 진나라에서는 태생부터 하층민이다. 힘든 일은 모조리 그들의 것이다.

 

이런 토벌군의 전투력은 안봐도 뻔하다. 그러나 임효와 조타에게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 그저 죽기살기로 싸우면서 전진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원래의 진군 잔여부대와 회합하고 월인들과 죽어라 싸웠다. 다행히 영거를 통하여 계속 보급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기원전214년 진군은 마침내 마지막 전투에서 우세를 점하게 된다.

 

정복당한 영남은 진나라에 남해, 계림, 상굼의 3개군의 영토를 확장하게 해주었다. 총사령관 임효는 자연스럽게 초대 남해군위가 되고, 계림과 상군 절제사가 된다. 남해군은 박라, 용천, 번우, 게양의 4개 현을 관할하고, 치소는 번우에 있었다. 지금의 광동성 광주이다. 조타는 임효에 의하여 용천현령에 임명된다. 그곳은 중원으로 통하는 도로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믿을만한 사람이 지키지 않으면 편안하게 잠을 잘 수가 없는 곳이다.

 

정권이 건립되면 이제는 식민(殖民)이다. 만일 인구를 채우지 않으면 영남을 점령하더라도 오랫동안 안정적으로 통치할 수가 없다. 그래서, 진시황은 긴급히 1.5만의 미혼부녀를 뽑아서 영남으로 보낸다. 그리고 부정부패한 하급관리들을 귀양보낸다. 이것으로도 부족하여, 일찌기 상인이었던 사람을 보낸다. 마지막에는 상인의 부모, 조부모까지 보낸다. 이들이 바로 오늘날 영남인의 선조이다.

 

진시황은 스스로 바라던대로 천고일제(千古一帝)가 된다. 그러나 그의 강산은 만대에 전해지지 못했다. 진승, 오광의 난이 일어나면서 멸망했던 육국이 속속 되살아난다. 백성의 힘을 과도하게 사용했던 진왕조는 끝장이 난 것이다. 백성에 있어서 이는 난세이지만, 야심가에 있어서 이는 기회이다. 영남을 실제 통치하던 임효와 조타에게 있어서 그들은 3가지 선택이 가능했다.

 

1. 근왕(勤王)

 

영남은 세외도원이고 대군이 수십만이다. 근왕(황제를 보호하기 위하여 군대를 보내는 것)을 하려면 이런 자원은 있었다. 그러나 진나라는 포악무도했고, 천하가 힘들어하고 있었다. 바로 진나라는 남의 탓을 할 수 없었다. 하늘에서 신이 내려와도 구해줄 수가 없었다. 임효는 진나라와 함께 순장당하고 싶지 않았다.

 

2. 반란

 

누군가가 임효에게 융중대같은 것을 제안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이 '동남의 주인'이 북상하여 천하를 쟁패하려고 하면 기회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임효는 그런 웅심은 없었다.

 

3. 할거

 

영남은 방원 수천리로 충분히 독자생존할 수 있었다. 아예 중원과 교류를 끊고, 지내는 것이다. 재삼 생각해본 다음에 임효는 바로 이 길을 선택한다. 기원전208년, 그는 병이 들었다. 특별히 조타를 불러들여서 후사를 맡긴다. 유언은 아주 간단했다: 봉관절도(封關絶道), 보경안민(保境安民). 관문을 폐쇄하고 도로를 막는다. 국경을 지키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

 

조타는 당연히 소규조수(蕭規曹隨)한다. 그의 명을 받들어 그대로 행한다. 그는 남해군위의 관직을 이어받고, 원래 예정했던 계획대로 계림과 상군을 병합한다. 그 후에 병력을 나누어 관문을 봉쇄하고, 도로를 막는다. 문을 걸어잠그고 남월무왕이 된다. 천하대란시에도 태평하게 지낸다. 이는 영남인민에게는 큰 행운이었다. 당연히 각도를 바꾸어 보자면, 이런 조치는 국가를 분열시키는 것이다. 세상의 일이라는게 원래 아주 완벽한 것은 없다.

 

이 새로 굴기한 남방정권에 대하여 진나라의 뒤를 이은 한왕조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유방의 첫번째 임무는 전쟁의 상처를 치료하는 것이고, 다른 일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사마천은 <사기>를 쓰면서 유씨황제의 체면을 봐서 유방은 "중국이 힘들고 고생하고 있어서 조타를 놓아두고 죽이지 않았다"고 적었다. 그 말에 숨은 뜻은 유방의 마음이 너무 좋아서 조타를 죽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진 군주의 이미지를 글로 나타냈다. 그러나, 기실 유방은 이성왕(異姓王)을 제거하는 작업을 한시도 멈춘 적이 없었다. 그가 조타를 놔둔 것은 순전히 마음은 있지만 힘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무력으로 정벌하는게 안되니 설득할 사람이 필요하게 되었다. 유방은 선택은 육고(陸賈)였다. 그는 한왕조의 직업외교관이다. 말솜씨가 출중했다. 일찌기 유방에게 "말 위에서 천하를 얻을 수는 있지만, 말 위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는 없다"는 이치를 설명한 사람이다. 그가 사신으로 나서는 것은 더 이상 적합할 수 없는 인선이다. 기원전196년, 육고는 남월로 간다. 그리고, 조타와 아주 재미있는 대화를 나누게 된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육고는 조타의 심리에 대하여 상당히 자세히 연구를 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말은 점진적으로 나아가는 식이었다. 먼저, 육고는 조타의 신분인정문제를 해결해준다. 너는 중국인이다. 천하가 크게 어지럽기 때문에 한 지방에 할거하였지만, 그것은 오래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음으로 육고는 유방을 치켜세운다. 5년내에 군웅을 모두 없앴으니 바로 진명천자이다라고. 마지막으로, 육고는 강경책과 회유책을 함께 쓴다. 유방은 백성들을 사랑하여 무력을 쓰고 싶어하지 않는다. 다만 만일 조타가 끝까지 말을 듣지 않으면 십만명을 보내어 너를 멸하는 것은 애들 장난같이 쉬운 일이다.

 

그러나 조타는 그의 말에 바로 설득당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을 조참, 소하, 한신과 비교하면 어떤지 묻는다. 육고는 그를 치켜세운다. 당신은 그들과 비교하면 훨씬 강하다고.

 

조타는 다시 묻는다. 나와 유방을 비교하면 어떠냐고? 자신을 천자와 비교하다니 이건 보통 일이 아니다. 육고는 슬쩍 돌려서 말한다. 한왕조는 영토가 만리에 달하고, 인구를 억으로 계산해야 하지만, 남월은 지방이 천리에 달하고 인구는 만으로 계산해야 한다.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느냐라고. 조타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내가 만일 유방과 중원을 놓고 싸우면 누가 이기고 누가 질지 알 수 없는 일 아니냐.

 

두 사람은 서로 허풍도 떨고 서로 협박도 한다. 그리고 둘 다 바라던 것을 얻는다. 마지막으로 조타는 한왕조에 귀순하겠다고 밝히고 육고도 자연스럽게 그의 뜻을 받아들이며 유방을 대신하여 그를 남월왕에 봉한다. 이렇게 서로 주고 맏은 것을 보면 유방과 조타가 모두 노련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로 상대방을 없앨 수 없다면 같이 지내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정치적 지혜의 최고경지이다. 아쉽게도 평화는 겨우 십여년간 지속되었을 뿐이다. 여후가 권력을 잡으면서 세상이 바뀌게 된다.

 

황후에서 태후로 승격한 여치(呂稚)는 조타가 거들먹거리는 것을 더 이상 참고 보지 못하고, 융여후 주조에게 10만의 병력을 이끌고 토벌하게 한다. 결과는 주조가 오령도 넘지 못하였을 때 여치는 병사한다. 유씨자손이 성공적으로 권력을 되찾아 오고, 주조는 그때 조용히 퇴각한다. 알려진 바로는 조타가 주조에게 서신을 보내어 싸우지 말자고 한다. 그러나 이 뜻은 중앙정부에까지 전해지지는 않는다. 나중에 주조가 군대를 되돌리자 조타는 가만히 있지 않는다. 이전에 장사국을 공격하여 점령하였고, 이제는 다시 인근의 민월과 구월을 공격하여 점령한다. 완전히 동남의 주인이 된 것이다. 그리고 조타는 더 이상 무슨 남월왕이라 칭하지 않고, 무황제(武皇帝)를 칭한다.

 

강경했던 여씨세력은 이미 무너졌다. 여러가지 폐해를 해결하고 다시 흥성하는 한왕조는 조타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이 문제는 막 즉위한 한문제에게 숙제로 남겨진다.

 

23살의 한문제 유항은 성격이 온화했다. 그는 신분과 연령과는 맞지 않는 사회적인 경험이 많았다. 당시의 국력으로는 조타를 어떻게 할 수 없다느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를 다독거리기로 결정한다. 당연히 전제는 조타가 반드시 황제의 칭호를 포기해야 하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가장 적당한 방식으로 그의 뜻을 전달할 수 있을까? 한문제는 친필서신을 쓰기로 결정한다. 이는 아주 보기 드문 의사소통방식이다. 조서를 쓰지도 않고, 말로 전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서신의 말투는 매우 저자세로 태도는 진지했다. 깜짝 놀랄만한 일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한문제가 직접 썼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첫째, 서신에서는 쌍방의 신분을 명확히 했다. "황제근문남월왕(皇帝謹問南越王)", 황제가 남월왕에게 삼가 묻는다. 조타가 황제를 칭한 일은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그래서 가장 민감한 이슈는 피해간 것이다. 쌍방 모두 체면을 살리면서 대립된 정서를 완화시켰다.

 

한문제는 간단하게 유방의 사우 정권교체된 상황을 설명한다. 글의 행간에는 모두 겸손한 모습을 보인다. 심지어 스스로에 대하여 "옹폐박우(壅蔽朴愚)"하여 바로 조타와 연락하지 못했다고까지 한다. 그 후에 한왕조와 남월의 사이가 나빠진 책임을 모조리 죽은 여후에게 떠넘긴다. 이어서 한문제는 두 가지 조치를 취하며 태도를 나타낸다. 첫째는 남월을 방비하는 부대를 철수시킨다. 둘째는 조타의 하북 정정에 있는 친척들을 위문하고 조씨집안 선조의 분묘를 정비해준다.

 

선의를 나타낸 후에는 다시 이치를 밝힌다. 도리를 아주 명쾌하게 설명한다. 병력을 동원해서 싸우면 쌍방 모두에게 좋은 일이 아니다. 천자는 사해를 가지고 있어 부유하고, 남월국의 부와 토지는 신경쓰지 않는다. 그러나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수 없고, 나라에 두 명의 군주가 있을 수는 없다. 중앙에 귀순하면 천하가 태평할 것이다. 이것이 바른 이치이다.

 

이 성의가 충분한 서신은 한문제의 고심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 서신을 가져가는 사람은 바로 조타의 옛친구인 육고이다. 당연히 이는 모험적인 서신이다. 만일 조타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황제의 귀한 몸으로 유항이 뒷처리를 하기 곤란해진다. 그는 즉위한지 얼마 되지 않았고, 대권은 아직 원로들의 수중에 남아 있었다. 그가 천하를 제대로 장악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 생길 것이다.

 

기원전180년, 이미 이순의 나이가 된 육고는 명을 받고 두번째로 남월로 간다.

 

이번에 조타는 정말 마음이 움직였다. 그는 즉위한지 이미 49년이 되었고, 자손들이 많아서, 만년을 즐길 때였다. 한왕조와 싸운 것은 그저 화가나서이다. 지금 유항이 스스로를 낮추면서 요청하는데 굳이 고집을 부릴 이유가 없다. 성의를 표시하기 위하여, 조타는 황제의 칭호를 포기한다. 그리고 육고에게 회신을 가지고 가도록 한다.

 

이 서신도 수준이 높다. 유항은 스스로 겸손하였지만, 조타는 더욱 저자세를 보인다. 스스로를 만이대장(蠻夷大長)이라고 칭한다. 그리고 매사상서(昧死上書)라는 표현까지 쓴다. 서신에서 조타는 한고조, 한혜제 두 황제의 '은덕'을 회고하고, 그 후에 유항의 설명을 받아들여 관계가 파열된 모든 책임을 여씨에 떠넘긴다. 마치 황제를 칭한 것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던 것처럼..

 

이렇게 한 후에 조타는 생동감있게 한왕조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다. 그는 스스로 눈은 있지만 좋은 색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지만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살아도 재미가 없고, 이는 모두 천자를 모시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마지막에 조타는 즉시 황제칭호를 쓰지 않겠다고 한다. 그리고 '노부가 죽어도 뼈가 썩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는 자신이 한 말은 반드시 지키겠다는 의사를 표시한 것이다.

 

그리고 서신과 함께 보낸 것은 백벽(白璧) 한 쌍, 취조(翠鳥) 천, 서각 십, 자패 오백, 계두 일기, 생취 사십쌍, 공작 이쌍을 보낸다. 이렇게 고심해서 보낸 것 때문에 유항은 체면이 충분히 선다. 둘 다 만족한 결과라 할 수 있다. 두 사람은 서로 만리나 떨어져 있으면서 공동이익에 대하여 서로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정치가들이 가질 수 있는 묵계이다.

 

조타에 있어서, 그가 한왕조의 종주지위를 인정함으로써, 안정적인 쌍방관계를 얻어낼 수 있었다. 유일한 손실은 체면이다. 어쨌든 번신의 본분을 해야 한다. 유항도 기뻐할 이유가 있었다. 그는 서신 하나로 10만대군이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국가를 위하여 휴식하고 힘을 기를 기회를 얻은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정치적 지위도 확고히 했다.

 

비록 이것이 윈윈의 결괄ㄹ 가져왔지만, 그래도 불만을 가진 사람도 있었다. 특히 "범강한자(犯强漢者), 수원필주(雖遠必誅)" 강한 한나라에 덤비는 자는 비록 멀리 있더라도 반드시 죽인다는 원칙을 금과옥조로 삼는 사람이다. 그들이 보기에, 무력은 문제를 해결하는 최선의 방법이다. 다른 한편으로, 나중의 월남인들중에서도 유사한 생각을 가졌다. 월남 여조(黎朝)의 공식 사서인 <대월사기전서>에서는 조타를 미친듯이 칭찬한다. 그가 영토를 개척하여, 한왕조와 항거하여, 북방한인이 이익을 얻어가지 못하게 하였으니 공덕이 무량하다는 것이다. 여기에 숨은 의미는 한왕조를 격패시킬 수 있다면 더욱 이상적이라는 것이다.

 

조타는 당연히 이런 생각은 없었다. 그는 나이가 이미 많고, 더 이상 욕심이 없었다. 그저 자손들 및 백성과 편안하게 살고 싶었다. 이런 심리상태를 가지고, 그는 기원전137년까지 산다. 즉 한무제 건원4년이다. 121세의 고령으로 그는 세상을 떠난다. 그가 죽은 후, 남월왕국은 다시 4대까지 전해진다. 기원전111년, 마침내 한무제에 의하여 멸망당한다.

 

많은 사람들은 조타를 어떻게 평가할지에 대하여 머리아파한다. 그러나 그럴 필요는 없었다. 단순히 국경을 지키고 백성을 편안하게 살게 하였다는 것만 해도 엄청난 일이다. 조타의 행동중 가장 논쟁이 되는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거진(去秦). 진왕조를 버린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귀한(歸漢). 한왕조에 귀순한 것이다.

 

전자는 진나라의 팬이라면 기분이 나빠할 일이다. 그들은 이런 상황에 환상을 가지고 있다. 진나라의 북벌군과 남정군이 동시에 되돌아와서 항우와 유방을 멸했다면.... 물론 이것이 이론상으로는 가능하다. 그러나 한 가지를 고려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진나라의 양대폭군에 조고까지 더하면,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는데, 조타가 왜 그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겠는가. 다음으로 한나라에 귀순한 것은 대의를 따른 조치이다. 당시의 상황으로 보면, 싸울 힘이 없는 쪽은 한왕조이다. 조타가 만일 중원으로 북진하였다면, 거기에 흉노의 위협까지 더해져서 한무제의 휘황함도 없을 것이고, 문경지치도 아마 나타나기 힘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