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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삼국)

위촉오 삼국의 영토와 인구비교

by 중은우시 2017. 12. 22.

글: 문철(文哲)


1. 영토수치





위나라의강역은 전체 화북지역을 점유하고 있다. 북으로는 산서, 하북 및 요동에 이르고 남흉노, 선비 및 고구려와 이웃하고 있다; 동남으로는 손오와 장강, 회하일대 및 한강, 장강 일대에서 대치하고 있고; 서로는 감숙에 이르러 하서선비, 강(羌), 저()와 접경하고 있다. 서남으로는 촉한과 진령, 하서일대에서 대치하고 있다. 나라를 세운 후 87군 및 12주를 가졌다. 12주는 각각 사례(司隷), 서주(徐州), 청주(靑州), 예주(豫州), 기주(冀州), 병주(幷州), 유주(幽州), 연주(兖州), 양주(凉州), 옹주(雍州), 형주(荊州)북부, 양주(揚州)북부이다. 관련문헌의 기록에 따르면, 262년, 위나라의 국토면적은 291평방킬로미터에 달하여 삼국중 통치면적이 가장 넓은 국가였다.


촉나라는 형주를 잃은 후, 통치지역은 촉중(蜀中), 남중(南中)과 한중(漢中)이다. 북방으로는 조위와 진령에서 대치하고, 한중은 촉한의 북대문이다; 동으로는 손오와 삼협에서 이웃하고 있으며, 파서(巴西)는 촉한의 동대문이다; 서남으로는 민강, 남중에 이르고 강, 저 및 남만과 접경하고 있다. 촉한은 모두 22군을 가지고 있으며 익주(益州) 1개주만 갖고 있다. 통계에 따르면 262년 촉국의 국토면적은 107만 평방킬로미터로, 삼국중 국토면적이 가장 적었다.


오나라는 적벽대전후 형주서부, 교주(交州)를 차지한다. 관우를 격패시킨 후에는 형주남부를 전부 차지한다. 손권이 황제를 칭한 후, 북으로는 조위와 장강,회하일대 및 한강,장강일대에서 대치했고, 서로는 촉한과 삼협을 경계로 했다. 동쪽과 남쪽은 바다에 까지 이른다. 그중 가장 남쪽은 월남의 중부에까지 이른다. 손오는 원래32군 및 3개주를 가졌다. 형주, 양주, 교주이다. 226년에 광주를 설치하나 나중에 교주에 병합된다. 통계에 따르면, 262년 오나라의 국토면적은 145만평방킬로미터에 달한다.


2. 시대배경


동한 말기, 황건적의 난이 일어난다. 이어서 군벌혼전이 벌어지고, 게다가 천재지변이 빈번했다. 그리하여 인구가 사상유례없이 감소한다. 나중에 동탁이 경성으로 들어와 어지럽게 만들고 낙양을 불로 태운다. 기록에 따르면, "명도(名都)는 비어있고 사람이 살지 않는다. 백리를 가도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 수두룩했다." "청주읍의 만호는 실제로 수백을 채우지 못했다." "(기주)는 30만호이다."(이는 동한때의 20분의 1이다) 인구가 얼마나 많이 줄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3. 인구통계


조조가 득세한 후, 널리 둔전을 하고 수리사업을 벌이며 유민을 모은다. 이렇게 하여 황건적의 난으로 일을 할 수 없었던 농민들이 농업에 투신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농업생산이 신속히 회복되고 발전했다. 기록에 따르면, "수춘에서 경사까지, 농민, 관료, 병사의 밭에서 닭소리와 개소리가 들렸다." "먹을 음식을 보관까지 하고 수해도 없었다." 조조는 농민으로부터의 세수도 낮게 유지하여 농업생산발전을 촉진했다. 그외에 방직업도 회복된다. 동탁이 불태워버렸던 고도 낙양은 240년에 이미 "그 백성이 사방에 잡거하며 여러 호족 가족, 상인, 호인등이 천하사방에서 이익을 쫓아 모여들었다."고 할 정도로 번화한 대도시가 된다.


촉국이 소재하는 곳은 소위 "천부지국(天府之國)"이라는 익주이다. 제갈량이 "농업을 권장하여, 농사때에는 일을 시키지 않고, 세수를 적게 하여 백성의 재물을 빼앗지 않는다"는 정책하에 농업생산량이 크게 올라간다. 방직업도 크게 발전하여, 원래 명성이 있던 촉금(蜀錦)은 멀리 위나라 오나라까지 팔린다. 성도는 이미 "시장이 모여있고, 여러 상인들이 백리나 대열을 지어 서 있고, 가게가 천에 이르고 물건이 산처럼 쌓여 있다"는 대도시로 변모한다. 유선이 등애에게 투항할 때, 항서(降書)에는 "백성포야(百姓布野), 여량서무(餘糧棲畝)", "쌀 사십여만곡, 금은 각이천근, 금,기,채,견 각 이십만필"이라고 하였다.  


오나라는 나라를 세운 초기에 북방의 주민들이 전란을 피해 남하하면서 선진적인 농업생산기술을 가져와서 경지면적이 확대된다; 그리고 둔전을 시행하고 수리를 개간하여, 농업생산이 발전한다. 그외에 무창의 야주업(冶鑄業), 사중(沙中, 지금의 강소성 상숙)의 염업(鹽業), 삼오(三吳)의 사직업(絲織業), 후관(侯官, 지금의 복주시)의 조선업이 모두 큰 발전을 이룬다. 오나라의 수도 건업에도 대시, 동시가 있고, 상업이 번성했다.


인구는 촉국이 약 28만호, 사병인구는 약 10만이고, 오나라의 인구는 62만호, 사병 약 23만명이며, 위나라의 인구는 약 103만호, 사병은 약 50만이었다. 자고이래로 이런 말이 있다: "중원을 얻는 자가 천하를 얻는다." 지금 보니 그 말이 허언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