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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삼국)

동오(東吳)는 손권의 후궁다툼으로 멸망한다.

by 중은우시 2018. 2. 26.

글: 풍기장림(風起長林)


221년, 위나라 황초(黃初) 2년, 황제를 칭한지 얼마 되지 않은 유비는 한편으로 관우의 복수를 부르짖으며 다른 한편으로 형주를 되찾아가기 위하여 온나라의 역량을 모아서 동오를 정벌하러 온다. 오나라의 군주 손권(孫權)은 결단을 내려 젊은 육손(陸遜)을 대장으로 하고, 효정(猇亭)에서 기세등등하게 밀려오는 촉한의 군대와 결전을 벌이게 한다. 육손은 유비의 날카로운 공격을 피하고, 촉군이 나태해지기를 기다려, 그들의 군영이 수백리 이어진 치명적 약점이 있는 것을 보고는 이릉지전(夷陵之戰)이라는 이소승다(以少勝多)의 전형적인 전투사례를 남긴다.


그이후 유비는 백제성에서 탁고(托孤)하고 세상을 떠난다. 제갈량이 촉한의 권력을 넘겨받아, 즉시 다시 동오와 우호관계를 건립하고, 함께 조위에 대항한다. 이후에는 삼국의 무대가 전부 제갈량과 사마의라는 두 '대군사'의 용쟁호투로 옮겨간다. 일찌기 화소적벽(火燒赤壁)등 장거를 만들어냈던 동오는 후삼국시대에는 그다지 내세울 것이 없다. 단지 육손이 석정에서 주방(周舫)을 거짓항복하게 하여 조휴(曹休)를 이긴 전투만이 세상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뿐이다. <삼국연의>에는 동오의 후기 정권교체는 기본적으로 내부투쟁에 속하고, 위,촉의 두 나라와는 관계가 거의 없다. 그래서 나관중은 동오를 거의 언급하지 않게 된다. 그래서 독자들의 마음 속에 깊은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그러나, 정사를 보면, 후삼국시대의 동오 조정은 가히 '파궤운휼(波詭雲譎)"이라 할 만하다.


손권이 처음 세운 태자(太子) 손등(孫登)은 모친의 출신이 미천했다. 그리하여 보부인(步夫人)처럼 강표(江表, 강남)의 명문집안출신과 비교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손권은 정실부인인 서부인(徐夫人)으로 하여금 손등을 양육하게 한다. 그리고 221년 조비(曹丕)가 그를 오왕에 봉할 때, 손등을 왕세자로 봉한다. 손등은 주유(周瑜)의 딸을 맞이하여 태자비로 삼는다. 그리고 장소(張昭)등 중신을 스승으로 모신다. 손등은 아랫사람들에게도 예로 대하고 자신이 태자의 지위에 있다고 하여 오만하지 않았다. 제갈근의 아들 제갈각(諸葛恪), 고옹의 아들 고담(顧譚), 장소의 아들 장휴(張休)등이 모두 그와 친하게 지냈다. 만일 동오의 정권이 평온하게 손등에게 넘어갔다면, 손등은 부친 손권이 위업을 그대로 이어받아 큰 업적을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늘이 이를 허용치 않았다. 손등이 나이 겨우 33살로 병사하고 만다. 손권은 백발인이 흑발인을 보내게 되니 비통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조서에서 이렇게 쓴다: "국상명적(國喪明嫡), 백성하복(百姓何福)" 손등의 사망은 동오가 쇠퇴의 길로 접어드는 전환점이 된다.


손등이 죽은 후, 손권의 여러 아들 중에서 나이가 가장 많은 셋째아들 손화(孫和)가 된다. 둘째아들 손려(孫慮)는 요절했다. 그외에 넷째아들 노왕(魯王) 손패(孫覇)가 있다. 입적입장(立嫡立長)의 원칙에 따라 자연히 손화를 태자로 세운다. 역대이래로 태자의 자리는 피바람이 일어났다. 특히 동오와 같이 명문거족의 지지에 의존하는 정권이라면 태자의 자리는 단순히 손권의 여러 아들만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후궁과 각 집안이 관련되는 일이다.


손권이 일생동안 가장 사랑한 부인은 보부인이다. 그 다음이 왕부인인데 바로 손화의 모친이다. 보부인은 전공주(全公主) 손노반(孫魯班)과 주공주(朱公州) 손노육(孫魯育)을 낳아서 기른다. 손화가 태자로 세워질 때 보부인은 이미 사망한 후였다. 왕부인은 점점 황후로 세워질 흐름이 된다. 만일 왕부인이 황후에 오른다면, 보부인 일파가 탄압을 받을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자연히 각종 수단을 동원하여 왕부인이 황후에 오르는 것을 막아야 했다.


손권이 병석에 누워 있을 때, 태자 손화에게 명하여 종묘에 제사를 지내게 한다. 태자비 장씨이 숙부 장휴(張休)의 집이 마침 종묘 부근에 있었다. 그래서 지나가는 길에 집에 들렀다 가도록 청한다. 이 일을 전공주가 알게 되어 태자가 장휴와 '대사를 공모하고 있다'고 무고한다. 그리고 왕부인은 손권이 병석에 누운 뒤에 '얼굴에 기쁜 기색을 띄었다'고도 한다. 말년의 손권은 젊었을 때처럼 영명하지 못했다. 특히 손등이 사망한 후에는 더욱 의심이 많아졌다. 손권은 일이 경위를 따져보지도 않고 바로 왕부인을 욕한다. 무고한 왕부인은 우울하게 생을 마친다. 손권과 손화 부자의 사이도 이로 인하여 점점 소원해진다.


손화의 태자 자리가 흔들리게 되니, 예민한 조정대신들은 신속히 양파로 나뉜다. 일파는 동오의 4대성 육(陸), 고(顧), 주(朱), 장(張)을 우두머리로 하는 태자파이다. 다른 일파는 보즐(步騭), 여대(呂垈), 전종(全琮)등을 우두머리로 하는 노왕 손패를 지지하는 노왕파이다. 동오의 신하중 명망이 가장 높은 육손은 비록 태자쪽으로 기울어져 있기는 하지만 정국의 안정을 위하여 중립을 유지한다. 그리하여 노왕파를 탄압하지 않는다.


마음을 정하지 못한 손권은 신하 양축(楊竺)과 밀담을 나눈다. 양축은 노왕 손패에 기울어져 있는 사람이다. 손권도 그의 의견에 동의를 표시한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태자 손화의 밀정이 이 대화를 엿들었다. 손화는 이로 인하여 두려움에 쌓인다. 그리하여 육손의 아들 육윤(陸胤)에게 부친 육손이 손권을 설득해줄 것을 부탁한다. 손권은 밀담을 나눈 일이 누설된 것을 알고는 크게 진노하고, 육손을 엄히 질책한다. 이때 노왕 진영의 전종이 다시 시기를 놓치지 않고 육손의 조카가 이전에 전투에서 공로를 과장했다는 등의 말을 한다. 육손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바로 병이 들고 결국 일대공신은 이렇게 급사하고 만다.


육손이 사망한 후, 손권은 점점 냉정해지고, 이전의 일에 회한이 밀려온다. 그는 원소의 아들 원담, 원상이 원소의 사후에 서로 공격해서 하북이 분열되고 결국 조조에게 멸망당한 일을 떠올린다. 이번에 양궁지쟁은 바로 예전 원씨형제의 싸움과 다를 바가 없었다. 손권은 결국 결심을 내린다. 손화를 폐위시키고, 손패는 사사한다. 이렇게 하여 동오조정을 석권했던 투쟁은 끝이 난다. 그리고 막내아들 손량(孫亮)이 태자에 오른다. 몇년 후 손권은 사망한다. 


나이어린 손량이 당시 복잡한 조정을 장악할 방법이 없었다. 중신 손준(孫峻), 제갈각, 손침(孫綝)등이 차례로 등장하고, 양궁지쟁을 일으켰던 손노반도 그 속에 들어 있어, 국면은 더욱 혼탁해진다.


동오는 강적에 의하여 망한 것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부식되어 붕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