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삼국)

삼국시대에 누가 극(戟)을 잘 썼는가?

중은우시 2017. 4. 26. 16:35

글: 살소(薩蘇)


삼영전여포(三英戰呂布)는 <삼국연의>의 멋진 장면이다. 유비,관우,장비의 삼형제가 호뢰관에서 온후(溫侯)포와 악전고투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은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을까? 여봉선(여포)이 적토마를 타고, 손에는 방천화극(方天畵戟)을 들고 있는 모습은 삼국제일무장의 이미지로 이렇게 확정되었다. 삼국시대에 누가 극을 잘 썼을까에 대해서는 이미 해답이 나온 것처럼 보인다.


여포는 자가 봉선(奉先)이고, 오원(五原) 사람이다. 전후로 정원(丁原), 동탁(董卓), 유비(劉備)에 의탁했다가 배신하였으므로, 정치적인 품성이 높지 않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그의 개인적인 매력은 출중하다. 그래서 "인중여포(人中呂布), 마중적토(馬中赤兎)"라는 말도 있다. <삼국지>에는 그에 대하여, "활과 말을 잘 다루고, 팔힘이 다른 사람들보다 강해서 비장(飛將)이라고 불렀다"고 하였다.


정사에도 확실히 그가 전투에서 적장과 1대1로 싸운 기록이 있다. <영웅기>에는 그가 장안에서 곽사(郭汜)와 성북에서 싸운 것을 기록하고 있다. "곽사, 여포는 단독으로 대전했다. 여포의 모(矛)가 곽사를 찔렀다. 곽사의 뒤에 있던 기병들이 앞으로 나와서 곽사를 구해준다." 이를 보면 여포의 용맹함은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비록 여포가 정치적으로는 "삼성가노(三姓家奴)"라는 비아냥을 받지만, 민간에서는 그를 숭배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시내암은 <수호전>에서 여포의 팬을 한 명 만들어 낸다. "여포의 사람됨을 숭배하는" 소온후(小溫侯) 여방(呂方)이 바로 그이다.


정사에 나오는 여포는 나관중의 <삼국연의>에서 그려진 여포와 약간의 다른 점이 있다. 그가 호뢰관에서 유비 관우 장비으ㅢ 삼형제와 싸울 때 사용한 병기는 방천화극이 아니다.


극은 중국고대에 자주 쓰이는 병기이다. 중국에서는 대량의 청동기시대의 병기가 출토되었는데, 그중 장병기(長兵器)는 주로 3가지이다. 공격용의 모(矛), 수비용의 과(戈), 그리고 모와 과를 결합한 공수겸용의 극(戟).



아래는 과(戈0, 위는 모(矛)이다.



방천화극은 '극'을 변형시킨 것이다. 전방은 창(槍)과 같고, 측면에는 월아형(月牙形) 과인(戈刃)이 있다. 겉으로 보기에 위풍당당해 보이지만, 실제 전투에서 사용하기에는 불편하다.


첫째, 방천화극은 중심이 지나치게 앞쪽에 있다. 그래서 통제가 힘들다. 둘째, 방천화극의 측면에 커다란 월아향의 날이 붙어 있어서 사용하 ㄹ때 머리부분의 좌우가 평형을 이루지 못한다. 그래서 쉽게 지렛대작용하에 사용자의 팔에 상처를 입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방천화극은 구조가 복잡하다. 당시의 금속공예로 용접을 하든 끼워맞추든 전체적인 강도를 보장하기 힘들다. 그래서 전투중에 쉽게 힘을 받으면 파괴되고 부러진다.


<삼국지>와 <삼국연의>에는 모두 여포의 원문사극(轅門射戟)에 관한 기록이 있다. 그가 쏜 것은 아마도 의장용인 방천화극일 것이다.


그래서, 방천화극은 세상에 나왔을 때부터 의장용 무기였다. 앞에 언급한 여포와 곽사의 대전에서도 그가 전투에서 사용한 무기는 '모'였다.



여포가 모를 쓰는 것은 당시의 군사발전조류에 부합한다. 삼국시대, 춘추전국의 차전(車戰)은 이미 도태된다. 무장들은 대부분 말을 타고 전투를 했다. 그리고 이때는 아직 완비된 등자가 없었다. 그래서 쌍방의 교전때 유럽의 기사들의 결투에서와 마찬가지로 그저 앞으로 돌진할 수밖에 없었다. 여러가지 동작을 하기가 힘들었다. 이렇다보니 단지 한쪽에 칼날이 있는 환수도(環首刀)나 그저 찌르는 기능만 있는 모(矛)가 극보다 훨씬 실용적인 무기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여포와 그의 방천화극은 그저 강호에 전해내려오는 전설일 뿐이다.


다만 삼국시대에 극은 여전히 광범휘하게 사용된 중요병기였다. "절극침사철미소(折戟沉沙鐵未銷), 자장마세인전조(自將磨洗認前朝)". 두목의 이 칠율은 이미 적벽대전을 그린 절창이 된다. 또한 문화재발굴의 각도에서 보더라도 삼국시대에 극이 대량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누가 삼국시대에 진정 극을 잘 사용한 사람일까?


<삼국지>에는 여포의 의부인 동탁이 극을 사용한 기록이 있다. 한번은 여포가 작은 일로 그를 분노하게 한다. 동탁은 곁에 있는 극을 들어서 여포에게 던진다. 다행히 여포는 용맹하고 기민하여 급히 피해서 상처를 입지 않았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여포도 극을 사용한 적이 있다. 진등(陳登)을 만났을 때, 그는 일찌기, "발극작궤(拔戟斫几. 극을 뽑아들어 책상을 베다)"하여 분노의 뜻을 표명한다. 여기서 말하는 극은 모두 수극(手戟)을 가리킨다.





춘추전국시대에 번성한 극은 삼국시대에 이르러 이미 도태되는 상황에 처한다. 그렇지만 여전히 장단의 두 가지 형태는 보존되어 오고 있었고, 수극은 단극(短戟)의 간화된 형이다.


긴 것은 마극(馬戟)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기병이 쓰는 장병기이다. 머리쪽은 간화되어 "복(卜)"자형이 되고, 나무막대기에 묶는다. 마치 측면에 갈고리(鉤)가 달린 장모(長矛)와 비슷하다. 이것이 보존되어 내려온 이유는 바로 갈고리 때문이다. 극의 용법을 장모보다 훨씬 신축성있게 만들어준다. 이는 전투때 찌르는 것만이 아니라, 찍을 수도 있었다. 상대방을 말에서 끌어내릴 수 있다. 이런 병기는 마상술이 뛰어난 인물만이 제대로 사용할 수 있었다.


보병이 장극을 사용하면 불편하므로 단극으로 발전한다.


단국의 머리부분은 두개의 상호 수직으로 된 비수가 있다. 하나는 전방을 향하고 하나는 측면을 향한다. 뒤에는 손잡이가 있다. 이런 극은 또 간화된 축소판도 있다. 즉 투척하는 수극이다. 이런 수극은 머리부분의 중량이 무거우므로 방향을 통제하기 쉽다. 삼국시대에는 표창(標槍), 비도(飛刀)보다 더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수극'이었다.


그러나, 수극은 고급장수의 전용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금속의 가격이 아주 비싸기 때문에, 적을 만나서 수극 하나를 던저버린다는 것은 엄청난 돈을 던져버리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누구나 쓸 수 있는 무기가 아니다.


후인들 중에서 어떤 사람은 수극이 비수(匕首)의 기원이라고 말한다. 고인들 중에서 수극을 몸에 지니는 것은 단순히 방어를 위한 것만은 아니다. 식사할 때 고기를 자르는데도 썼다. 여포의 "발극작궤"는 아마도 손으로 쓰는 이 '찬도(餐刀)'로 탁자를 벤 것일 것이다.


그리고 전투시 육박전을 할 때 어떤 장수는 극과 같은 복고풍의 병기를 지니고 다녔는데, 예를 들면 조위의 대장 장료(張遼)가 있다.


장료는 자가 문원(文遠)이고, 마음(馬邑) 사람이다. 원래 여포의 부장이었고, 관우등과도 교분이 깊었다. 조조에 투항한 후, 오랫동안 동오를 방어하는 임무를 맡는다. 그는 조위의 강회지구의 정해신침(定海神針)이었다.


건안20년, 손권이 대군을 이끌고 합비를 공격해 들어간다. 장료는 밤을 틈타서 적극적으로 출격하자고 한다. 손권이 도착하여 군영을 설치하자, "새벽 장요는 갑옷을 입고 극을 쥐고, 먼저 말에 올라 적진으로 돌파해 들어가며 수십명을 죽이고, 장수 2명을 베며 큰 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말한다."


이 전투에서 장료가 사용한 것은 극이다. 오나라병사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면서 장료의 위명을 확립한다. 여기서 언급해야할 것은 이 전투에서 손권이 장료의 기습을 받았을 때, 역시 "높은 언덕에 올라가서 장극을 들고 스스로를 지켰다"는 것이다. 쌍방이 모두 극으로 상대방을 찌르고 찍는 전투를 한 것이다. 이는 삼국에서 자주 발생했던 일일 것이다.


장료의 극 운용은 출신입화(出神入化)의 경지였다. 다만 <삼국지>에서 극을 가장 잘 쓴 사람으로는 전위(典韋)를 2위로 꼽는다. 그리고 아무도 1위라고 한 사람은 없다.


전위는 진류(陳留) 사람으로, 조조의 부장이다. <삼국지>에는 이렇게 말한다: "대쌍극과 장도(長刀)등을 들기 좋아했고, 군대내에서 말하기를 휘하의 장사중에 전군(전위)가 있는데, 쌍극을 드는데 팔십근이다." 한나라시대에 1근의 실제중량은 현대의 반근(250그램)이다. 그래서 전위가 사용한 쌍극을 오늘날의 중량으로 한다면 40근이다. 전형적인 중무기이다. 전위는 전투때 두 겹의 갑옷을 입었고, 거기에 위력이 대단한 대철극까지 들었으니, 말그대로 사람모양의 탱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맹장 전위는 일생동안 여러번의 멋진 육박전이 정사에 기록되어 있다. 매번 거의 모두 '극'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여포와의 교전에서, 그는 수십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무거운 갑옷을 입고, 장모, 대극을 들고 여포군으로 돌격해 들어간다. 적군이 반격할 때 그는 십여개의 수극을 품고 적이 자신의 곁 오보까지 오면 수극을 던지면, 바로 소리가 나면서 죽었다. 그렇게 하여 전선을 안정시켰다.


특히 최후의 일전에서는 더더욱 사방을 놀라게 만든다. 건안2년, 장수가 반란을 일으켜 조조의 군영으로 쳐들어온다. 전위는 영문을 사수하고, 조조가 포위망을 뚫을 수 있도록 엄호한다. 결국 전위는 수십창을 맞고 죽는다. 그러나 그가 대극을 들고 혈전을 벌인 용맹함에는 적군마저도 경외했다.


그러나, 삼국시대에 극을 사용한 인물들 중에서 직급으로 따지자면, 전위는 명함을 내밀 수도 없다. 위,촉, 오 삼국의 황제들도 모두 극을 병기로 썼다.


삼국의 황제중 전쟁터에서 극을 사용하여 전투를 한 기록이 있는 사람은 동오의 개국군주 손권이다. 그리고 그는 아주 잘 썼다. 그의 형인 손책은 일찌기 태사자와 악전고투를 벌일 때 태사자의 수극을 빼앗을 바 있다. 무술동작으로 말하자면 공수입백인(空手入白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손구너은 사냥에서도 극을 사용하여 호랑이를 잡는다. <삼국지>에는 손권이  "능정에서 호랑이를 쏘았고, 말이 호랑이에게 부상을 입는다. 손권은 쌍극을 던졌고, 호랑이가 쓰러졌다." 그가 호랑이를 쓰러뜨릴 때 쓴 것은 아마도 수극일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조비가 쓴 것과 유사한 단극일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손권이 장료와 전투를 벌일 때 장극을 들고 있었다는 것을 보면, 이 황제의 극을 쓰는 수준이 대장에 못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횡삭부시(橫槊賦詩)를 보면, 위무제 조조가 잘 쓴 병기는 분명히 마삭(馬槊)일 것이다. 그러나 그도 극을 썼다. <삼국지>에 이런 기록이 있다. 조맹덕이 어렸을 때, "일찌기 몰래 중상시 장양의 집에 들어갔다가 장량에게 들킨다. 그는 수극을 마당에서 휘두르며 담을 넘어 나왔다." 조조의 개인무술실력은 그의 아들 조비에게 전해진 것같다.


역사에는 조비의 무예가 상당히 뛰어났다고 적혀 있다. 일찌기 감자로 분위장군 등전이 어쩔 줄 모르게 만든 적이 있다. 그도 극의 대가였다. <삼국지>에는 조비의 이런 자술이 기록되어 있다: "속명쌍극위좌철실(俗名雙戟爲坐鐵室), 양순위폐목호(鑲楯爲蔽木戶)" 그리고 극법에 대하여 토론도 한다. 조조, 손권과 달리, 조비가 극의 사용법에 대한 견해를 낼 정도였다는 것은 그의 이론수준이 이미 대가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조비의 무예는 전쟁터에서 펼쳐지지는 못했다. 그와 그의 부친 조조의 극법은 유협의 풍격에 더욱 가깝다.


재미있는 것은 역사에 촉한의 개국황제 유비도 극을 사용했다고 적혀 있는 것이다. 삼국에서 아무도 무예가 고강하다든지 하는 말을 유비에게 한 적은 없다. 그러나 그는 역사상 삼국의 군주중에서 전쟁터에 가장 많이 나선 황제이고, 일생을 모두 전투로 보냈다고 할 수 있다.


<운별전>에는 장판파에서 유비가 조조군에게 패배한 후, 누군가 조운이 조조에게 투항했다고 말하자, 유비가 즉시 몸에 지니고 있던 수극을 뽑아서 던졌다고 되어 있다. 그것은 절대로 못믿겠다는 의사표시이다. 이 일은 조운을 감동하게 한다. 당연히 유비는 그 유언비어를 전해준 자를 맞히지는 못했다. 아마도 극을 던지는 것은 그저 자신의 태도를 표명하기 위한 것이었을 수도 있고, 그의 무예가 전위처럼 뛰어나지 않아서일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