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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삼국)

혈묘(血墓): 삼국시대 방통(龐統)의 묘

by 중은우시 2017. 10. 29.

글: 문사원지(文史園地)




사천성(四川省) 덕양시(德陽市)에서 북쪽으로 약 15킬로미터 떨어진 녹두관(鹿頭關)에는 하나의 묘가 있다. 이는 바로 삼국시대 제갈량과 나란히 명성을 떨친 모사 방통의 묘이다. 현지 이곳은 이미 사천의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고, 방통사당도 건설되어 있다. 그것은 하나의 의관총(衣冠塚)이다. 방통이 죽었을 때 입었던 피묻은 옷(血衣)를 이 곳에 묻었기 때문에 이 묘는 "혈묘"라고 불리는 것이다. 의관총이기 때문에 1700여년동안 도굴꾼이 도굴을 시도하지 않았다. 전해지는 바로는 이 의관총은 바로 유비가 만들어준 것이라고 한다.


방통(179-214), 자는 사원(士元), 호는 봉추(鳳雛). 한나라때 형주 양양(지금의 호북 양양) 사람. 동한말기 유비의 중요모사. 제갈량과 같이 군사 중랑장으로 있었다. 그는 절세의 기책으로 유비가 사천으로 들어가는 것을 도왔고, 최종적으로 사천을 차지하게 한다. 모두 알고 있다시피, 와룡 제갈량의 재능은 뛰어나다. 그러나 그와 이름을 나란히 할 수 있는 사람은 단지 방통 뿐이다. 수경선생 사마휘는 유비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와룡,봉추중 한 사람을 얻으면, 천하를 안정시킬 수 있다."


비록 사마휘가 보기에 방통은 제갈량과 이름을 나란히 할 만하지만, 다만 한가지 점에서 방통은 제갈량만 못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능력을 프로모션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방통은 스스로를 광고하는 것을 잘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그 외에 방통은 얼굴이 비교적 못생겼다고 한다. "짙은 눈썹에 들창코이고, 얼굴은 검고, 수염은 짧았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했다. 당시 제갈량은 유비를 도와 형주를 취득하게 한 후, 지세가 험준하고 민풍이 사나운 서천에 대하여는 도저히 계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이 중임은 방통에게 맡겨진다. 


방통은 유비의 휘하로 온 후, 여러번 유비에 진언한다. 형주는 황량하고, 동쪽에 오손이 있고, 북쪽에 조씨가 있다. 형주를 점령한 후, 만일 손,조와 삼족정립을 하고자 한다면, 아마 아려울 것이다. 그러나 익주는 지리적 위치가 우월하고 인구도 많으며 자원도 풍부하다. 경제가 비교적 부유하다. 그러므로 서천을 차지하면 대사를 이룰 수 있다.


소설 <삼국연의> 제63회에는 이렇게 쓰고 있다. 유비가 군사방통의 보좌하에, 부성(涪城)을 점령한 후, 유장 수하의 냉포(冷苞)을 참하고, 방통과 병력을 나누어 낙성(雒城, 지금의 사천성 광한시)으로 진격한다. 두 사람이 병력을 나누어 출발하기 전에, 방통의 말이 말굽을 잃어버려서, 유비가 자신의 백마를 방통에게 주어 타게 한다. 그러나 방통이 군사를 이끌고 좁은 길로 행군하다가 그 지명이 "낙봉파(落鳳坡)"라는 말을 듣고 크게 놀라 급히 퇴각을 명한다. 그러나 이곳에 매복해 있던 장임(張任)의 군대는 그가 유비인줄 알고 화살을 마구 쏘아 죽여버린다.


모두 알고 있다시피, 소설 <삼국연의>의 많은 부분은 허구의 이야기이다. 다만, 진수는 <삼국지.촉서.방통전>에 이렇게 기록했다: "낙현으로 진격하여 포위하고, 방통이 병력을 이끌고 공성하다가, 날아온 화살에 맞아서 죽었다. 당시 나이 서른 여섯이다." 방통이 최후에 어떻게 죽었든,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는 화살을 맞고 죽은 것이다.


방통의 사후, 유비는 방통의 의관을 수습하여 묘를 만들어 준다. 그것은 덕양시 북쪽 15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혈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