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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삼국)

위진(魏晋) 사대대전(四大大戰)중 적벽지전이 가장 유명한 이유는...?

by 중은우시 2018. 7. 31.

글: 풍적도구(風的渡口)1986


위진시기에 4개의 유명한 전투가 있다: 관도지전(官渡之戰), 적벽대전(赤壁大戰), 이릉지전(夷陵之戰)과 비수지전(淝水之戰). 이 4번의 저명한 대전의 공통점은 바로 이소승다(以少勝多)라는 점이다. 즉 소수의 인원으로 다수의 적을 이긴 것이다. 관도지전으로 조조(曹操)는 북방을 통일했고, 적벽대전으로 남북대치가 일어났으며, 이릉지전으로 삼분천하의 국면이 형성되고, 비주지전으로 부견(苻堅)이 무너지고, 천하통일의 꿈은 물거품이 되었으며, 동진(東晋)왕조는 목숨을 겨우 이어갈 수 있었다. 이 4번의 대전중에서 의문의 여지없이 적벽대전이 가장 유명하다. 많은 사람들이 적벽대전은 알아도 비수지전은 거의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기실, 비수지전은 훨씬 더 유명해야 마땅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동진의 존망과 전도가 걸린 전투였기 때문이다. 당시 전진의 부견이 북방을 통일한 후, 천하통일의 큰 그림을 그린다. 그리고 '백만대군'을 이끌고 남하하여 동진을 취하고자 한다. 그는 '투편단류(投鞭斷流)'의 호언장담을 내뱉는다. "장강의 천험이 얼마나 대단하냐. 나의 백만대군이 모든 병사가 채찍으로 한번씩 내려치면, 강물을 끊을 수 있을 것이다." 대군이 다가오고, 동진은 위기일발이 된다. 동진의 사안(謝安)은 그의 동생 사석(謝石)과 조카 사현(謝玄)과 팔만대군을 이끌고, 침착하게 대응한다. 사안은 더더구나 부동성색하면서, 군대를 지휘한다. 팔만대 백만. 차이가 너무 크다. 설사 적벽대전에서도 조조가 팔십만대군이라고 했지만. 당연히 전진의 부견이 말한 '백만대군'의 숫자에는 의문이 있다.


먼저, 고대인들은 전투를 할 때, 기록한 군대숫자는 기본적으로 과장되었다. 다음으로, 설사 '백만대군'이라고 하더라고, 전선이 매우 길어서 전후로 수킬로미터에 달할 것이다. 하물며 백만대군은 전투부대와 물자운송부대를 포함한 것이다. 아마도 물자운송을 담당하는 인원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 전방에서 전투를 하는 인원은 그렇게까지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본다면, 백만대군중에서 진정으로 전투에 가담한 인원은 이십만정도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십만대 팔만이라고 하더라도 차이는 엄청나다. 그러나 결말은 다수를 보유한 부견의 참패이다. 그리고 풍성학려(風聲鶴唳)와 초목개병(草木皆兵)이라는 두 개의 성어를 만들어 낸다.


이것이 바로 비수지전이다. 원래 멋져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소승다로 이십만과 팔만이 대결한 것이 하나의 볼거리이다. 사안의 '담정(淡定)'도 하나의 볼거리이다. 비수지전때, 사안은 바둑을 두고 있었다. 전쟁의 승전보가 전해져 올 때, 사안은 한번 보고는 다시 바둑을 계속 두었다. 사안과 바둑을 두던 사람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러자 사안이 담당하게 말한다: "애들이 적군을 대파했다는군요." 제갈량의 공성계에 비견할 만하다. 그래서 비수지전은 볼거리가 있다. 그것은 적벽대전과 마찬가지로 남북대결이고, 모두 북방이 주도하여 남방으로 진격한 것이다. 모두 이소승다로 생사존망이 걸린 전투였다. 다만 지명도를 보자면 적벽지전보다 훨씬 낮다.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먼저, <삼국연의>가 너무 유명하다. 이 책은 너무 유명해서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리고, 중국고대사대명저의 하나이다. 적벽대전은 또한 <삼국연의>에서 가장 재미있는 장면이다. 42회에서 50회까지 모두 적벽대전을 묘사한다. 그리고 나중에 백화평서에서 더욱 상세히 기록한다. 왜냐하면 적벽대전은 <삼국연의> 이 책의 클라이막스이기 때문이다. 높은 지명도는 더 말하지 않아도 충분할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삼국연의>나 그것을 개편한 드라마, 영화, 희극을 본 사람이라면 적벽대전을 모를 수가 없다. '삼국'은 모르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적벽대전'도 모르는 사람이 없다. 다만 비수지전은 그렇게 운이 좋지 못했다. 비수지전과 관련한 지명도 높은 문학작품은 아마도 없는 득하다. 드라마나 영화도 없는 것같다.


다음으로, <삼국연의> 및 일부 설서인(說書人)들이 살을 붙여서 적벽대전은 아주 재미있어 보인다. 예를 들어, 제갈량의 설전군유(舌戰群儒), 격장법(激將法), 군영회(群英會) 장간중계(蔣干中計), 반간계(反間計), 황개(黃蓋)의 고육계(苦肉計), 초선차전(草船借箭), 제갈량의 차동풍(借東風), 마지막으로 화소팔백리연영(火燒八百里連營), 조조의 패주화용도(敗走華容道)등등 이 일련이 연환계는 아주 재미있다. 구체적인 것은 <삼국연의>를 읽어보라.


비수지전의 이야기는 훨씬 간단하다. 개략 얘기하자면 이렇다. 부견이 선행부대가 비수에 도착한 후, 강가에 병력을 배치한다. 이것은 원래 잘못된 것이 아니다. 배수전이다. 동진의 군대는 사자를 보내어 교섭하며 말한다. "귀국의 군대가 이렇게 먼 길을 왔는데, 강가에 진을 배치하다니 우리나라의 군대는 아직 오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싸운단 말입니까. 여러분이 약간만 물러나 주셔서 공간을 열어주십시오. 그러면 우리 군대가 들어와서 쌍방이 큰 전투를 벌입시다." 재미있다. 어느 정도 춘추시기의 전쟁같다. 춘추시기의 전쟁은 바로 쌍방의 국경선 부근에서, 쌍방의 군대가 진을 다 배치한 후에 전쟁을 시작했다. 한쪽이 아직 진을 다 펴지 못했으면, 공격할 수 없다. 그때는 예의와 규칙을 중시했다. 다만 전국이후 전쟁은 바로 "병자(兵者), 궤도야(詭道也)" 전쟁은 속이는 것이 되었다. 너죽고 나살기이다. 누구든 이기면 그만이다. 무슨 예의나 규칙은 모두 헛소리가 되었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상대방의 이런 요구를 부견이 들어주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전진의 군대가 후방으로 이동하기 시작한다. 이동하지 않으면 몰라도, 이동하다보니 문제가 발생한다. 전방의 군대를 뒤로 이동시키다보니, 후방의 군대는 무슨 상황인지를 몰랐다. 그래서 패전한 것으로 알았다. 동시에 군대에 누군가 소리친다. "부견이 패했다." 부견의 군대는 일거에 놀란 새처럼 흩어진다. 완전히 모래알이 되어 흩어져 버린다. 부견의 동생인 부융(苻融)이 친히 나서서 막았지만, 그가 낙마하여 죽는다. 부견의 군대가 엉망진창이 되었는데, 이미 강을 건넌 동진군대가 어찌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것인가. 바로 출격하니, 부견은 화살을 맞고 급히 도망친다. 풍성학려, 초목개병이었다.


이야기는 이렇게 간단하다. 싸워보기도 전에 스스로 혼란에 빠졌다. 주요 이유는 부견의 대군이 기율이 부족했고, 동시에 군대의 성분이 복잡했기 때문이다. 선비족, 저족, 한족이 섞여 있으니, '오호잡교'의 군대이다. 자연히 병사들 사이에 서로 다른 마음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전쟁전에, 전진의 많은 사람들은 이 전쟁에 반대했다. 그중에는 왕맹(王猛)과 부견의 동생 부융이 포함되어 있다. 즉, 전진은 출정하기도 전에, 군심이 이미 흩어져 버렸던 것이다. 아예 싸우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런 희극적인 일막이 벌어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비수지전이다. <삼국연의>에 상세히 묘사되어 있는 적벽대전과 비교하면 확실히 간단하기 그지없다. 확실히 나관중이 쓴 적벽대전이 재미있다.


그래서 비수지전의 지명도는 적벽대전보다 낮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