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후기)

러일전쟁: 사람들이 잘 모르는 내막

중은우시 2017. 6. 15. 11:25

글: 대게비(大揭秘), 후난TV


1900년 중국의 북방에서는 폭력적인 배외운동이 벌어진다. 역사에서 '의화단의 난'이라고 부르는 사건이다. 이 운동이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에 대한 평가는 잠시 유보하도록 한다.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의화단의 난때 흑룡강에 주둔하던 청나라군대는 러시아군대에 대하여 강경한 태도를 보였고, 러시아군대는 "중동철로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군대를 동원해서 중국의 동북삼성(요녕, 길림, 흑룡강)을 모두 점령한다. 주의: 바로 러시아군대가 '중국의 동북삼성 전체지역'을 침략한 것이다. 1900년부터 1905년까지 5년간이나 점령했다. 주의: 바로 중국동북 전지역을 '5년'이나 계속 점령했다.


1904년, 일본은 청나라정부의 동의를 얻은 후, 동북에 군대를 파견하여, '러일전쟁'을 일으킨다. 주의: '청나라정부의 동의를 얻었다'는 것이다. 이 점은 요즘 젊은이들이 생각하는 역사와 배치되는 부분이다. 다만, 그것이 사실이다. 그것만 사실인 것이 아니라, 청나라는 군대를 파견하여 일본군을 도왔고, 함께 러시아군과 싸웠다.


금시초문인가? 모두 사실이다. 1년반의 전투를 거쳐 10만여명의 일본군이 전사한 후, 일본은 러시아에 승리를 거둔다. 일분곤대는 러시아군대를 동북에서 몰아낸 후, 일본은 동북의 99%토지를 청나라에 돌려준다. 주의: 여기에서 일본은 그들이 수복한 99%의 토지를 대청국에 돌려주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많은 젊은이들이 알고 있는 것과 배치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다. 확실한 사실이다. 일본은 왜 이렇게 했을까? 일본은 자선사업가인가? 일본은 당연히 자선사업을 한 것이 아니다. 러시아군을 패퇴시킨 후, 1905년 일본은 청나라정부와 조약을 맺는다. 북경에서 1개월여의 협상을 거친 후, 청,일 양국은 <회의동삼성사의정약(會議東三省事宜正約)> 및 부속협약을 체결한다. 이 부속협약에는 청나라정부가 일본에 다음의 몇 가지 주요한 주권을 할양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이것은 일본이 동북에서 철군하는 조건이었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출병하여 러시아를 몰아내준 것에 대한 정치적 댓가인 셈이다: 1. 여순, 대련의 두 곳의 조차지, 2. 남만철도의 경영권 및 연안선의 임산, 광산, 3. 일본의 남만철도 양측에 군대를 주둔시킬 권리.


이 조약에 따라, 일본은 사람을 보내어 남만철도를 접수하고, 여순, 대련에 이민을 보내고, 군대를 파견하여 남만철도의 양측에 배치한다. 이 군대를 바로 "관동군"이라고 부른다. 주둔의 근거는 <회의동복삼성사의정약>및 부속협약이고, 이류는 "일본교포를 보호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일본관동군은 9.18사변 이전에 이미 동북에 주둔해 있었다. 이미 26년간이나. 그리고 이 26년동안 관동군은 장작림, 장학량 부자들과도 그렇고 동북의 중국주민들과도 그렇고 평화롭게 지냈다. 이 사실은 아마도 요즘 젊은이들이 생각하는 것과 많이 다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여순, 대련, 남만철도, 임산광산주권을 유실하게 된 주요 경위이다. 그리고 '관동군'의 내력이기도 하다. 나중에 절대다수의 중국인들은 청나라정부를 '매국'했다고 욕한다.


그러나, 사실상 당시 동북전지역을 러시아에 점령당한 상황하에서 청나라정부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다음의 몇 가지뿐이었다:


첫째 선택, 러시아가 계속 절명하게 놔두고, 분발해서 어느 날인가 러시아와 결전을 벌여 동북을 수복하는 것(평: 이런 선택을 하지 못할 이유는 없지만,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게 된다)


둘째 선택, 일본군이 러시아군을 몰아내는데 동의해준다. 다만 일본에 보수를 주지 않는다(평: 일본은 10며만명의 목숨을 잃어가면서 싸웠는데, 아무런 보수도 받지 않겠다고 한다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셋째 선택, 일본군이 러시아군을 몰아내는데 동의하고, 다만 사후에 일본과 협상을 하지 않으면서 일본이 러시아를 대체하여 동북 전지역을 점령하도록 한다(평: 이 선택은 의미가 없다. 침략자만 바꾸는 것이다)


넷째 선택, 일본군이 러시아군을 몰아내는데 동의하고, 사후에 동북 진지역을 수복한다. 그 후에 적은 면적의 토지와 주권을 할양하여 일본에 보수로 준다(평: 이것이 바로 실제 발생한 역사이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사실상 이미 발생한 역사는 당시 청나라정부로서 선택가능한 최선의 방안이었다. 그리고 이미 나무를 베어서 배를 만들었고(木已成舟), 쌀이 익어 밥이 되어버렸다(米已成炊). 이런 역사적 조건하에서, 당시 대청국의 국익을 최대화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나머지 3가지 선택은 모두 이 선택보다 나쁜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왜 청나라정부가 <회의동삼성사의정약> 및 부속협약을 체결하여, 일본에 약간의 주권을 할양했는지에 대한 이유이다. 왜냐하면 당시로서는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그외에 더 좋은 방법은 없었다. 중일 양국이 20세기에 크게 싸우게 된 것도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바로 이 조약에서 유래한다. 일본은 이 조약에 근거하여 여순, 대련 남만철도의 양측에 이민을 보내고, '만주경영'을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일본의 이러한 '만주경영'의 식민행위는 중국에서 그 후에 돌연 발생한 민족주의와 격렬한 충돌을 일으키게 된다. 많은 역사적 사료가 보여주고 있다: 국민당정부가 북벌을 일으킨 때로부터 '동북의 일체 주권을 회수하자', '일체의 불평등조약을 폐지하자'는 민족주의의 급진적 구호가 나타난다. 특히 한구(漢口)의 영국조계를 강제로 회수하는데 성공하면서 국민당정부의 투지는 더욱 기세등등해진다. 그리고 급진적인 모험의 길로 광분하게 된다. 생각지도 못하게 국민당정부는 동북에서 일본이라는 암초를 만난다. 그 결과 일이 터진다. 국민당정부는 그것들이 모두 불평등조약이라고 생각해서 반드시 폐지해야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일본은 26년전의 러일전쟁때의 일부터 언급하며 중국이 배은망덕하고 신용을 지키지 않는다고 질책한다.


중일 양국의 관계악화는 바로 이 '계동압강(鷄同鴨講)"의 논쟁가운데 계속 격화된다. 국민당정부의 '철완구국'은 민족도의상으로 분명히 맞는 일이다. 다만 당시의 구체적인 역사조건하에서 이렇게 하는 것이 국가이익의 최대화에 부합했을까? 그것은 반드시 그렇다고 볼 수가 없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평소에 말하는 "인자견인(仁者見仁), 지자견지(智者見智)" 즉 보기 나름이다. 서방에는 이런 말이 있다: "it is never wrong to tell the truth" 그 의미는 사실을 얘기하면 영원히 옳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