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남북조)

왕희지(王羲之)의 두 아들 혼인으로 본 "행복"

중은우시 2018. 6. 22. 11:48

글: 임염청추(林炎淸秋)


왕희지에게는 7명이 아들이 있었다. 비록 성격이 서로 달랐지만, 서법(書法)은 모두 부친의 진전(眞傳)을 이었다. 모두 재능이 뛰어나고 실력이 좋았다.


그 중에서도 일곱째 아들 왕헌지(王獻之)의 조예가 가장 뛰어났다. "아버지의 영화(靈和), 아들의 신준(神駿)은 모두 고금독절(古今獨絶)이다" 사람들은 왕희지를 서성(書聖)으로 부르고 왕헌지를 소성(小聖)으로 부른다. 서화사에서는 두 사람을 "이왕(二王)"으로 같이 부른다. 왕헌지는 재주가 뛰어났을 뿐아니라, 미남자였다. <진서>에는 그가 재능과 기도가 출중하기로 어려서부터 명성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고매하고 구속받지 않았으며, 비록 집안에 머물며 바깥을 많이 나가지는 않았지만, 행동거지는 전혀 흐트러짐이 없었고, 풍류로 당시의 최고였다라고 한다. 왕헌지는 청매죽마(靑梅竹馬)인 사촌누나 치도무(郗道茂)와 결혼한다. 치도무는 동진의 명신 치감(郗鑒)의 손녀이다. 낭재여모(郎才女貌)에 친상가친(親上加親)으로 부부 두 사람은 정이 깊었다.


왕헌지는 성격이 침정(沉靜)하고 관직에 뜻이 없었다. 그저 서법을 연구하는데 힘쓰고 천륜지락을 즐겼다. 그러나, 명인의 생활이 영원히 평정할 수는 없었다. 혼인한 후 1년도 되지 않아, 왕헌지의 행복은 한 여자가 끼어들면서 파괴된다. 그 여자는 바로 신안공주(新安公州)이다. 이름은 사마도복(司馬道福)으로 동진(東晉) 간문제(簡文帝)의 딸이고, 효무제(孝武帝)의 누나이다.  일찌기 정치적인 이유로 사마도복은 부득이 동진의 권신인 환온(桓溫)의 아들 환제(桓濟)에게 시집을 가야 했다. 나중에 환제가 병권을 찬탈하려다 실패하여 시골로 쫓겨가자 신안공주는 환제와 이혼한다. 기실 사마도복은 남몰래 왕헌지를 사모해왔다. 이제 자유로운 몸이 되자, 황제에게 사정을 해서 자신이 왕헌지에게 시집갈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한다.


황제는 기꺼이 동의해서, 조서를 내려, 왕헌지로 하여금 이혼하고 신안공주를 처로 삼으라고 한다. 이 소식은 청천벽력이었다. 치도무는 하루종일 눈물로 지내고, 어찌해야할 지를 몰랐다. 왕헌지도 그 결혼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 냈는데, 애초(艾草)로 자신의 두 다리를 태워서 상처를 입히고, 매일 침대에 드러누워 장애가 있는 척 했다. 그러나 이 신안공주는 그래도 좋다고 하면서, 왕헌지가 아니면 시집을 가지 않겠다고 우긴다.


치도무는 어쩔 수 없이 왕씨집안을 떠난다. 친정에는 아무도 없으므로 할 수 없이 숙부에게 의탁한다. 남의 집에서 사는 생활이 어떨지는 상상이 갈 것이다. 가련한 치도무는 평생 재혼하지 않고 우울하게 생을 마친다. 아름다운 한 여인이 무고하게 이혼당했다.


부마가 된 후에도 왕헌지는 즐겁지 않았다. 그는 시종 전처 치도무를 그리워했다. 가끔 서신을 보내어 안부를 묻기도 하고, 그리운 정을 나타내기도 했다. 지금 남아 있는 <봉대첩(奉對帖)>의 내용은 이러하다: 나는 누나와 여러 해동안 살았지만 하루같이 즐거웠다고 할 수 있다. 서로 머리와 머리를 맞대고 한없이 즐거웠고, 누나와 평생을 배필로 살면서 백년해로하고자 했었다. 그런데 어찌 지금은 이렇게 서로 헤어져 사는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 실로 가슴아프고 슬픈 일이다. 어느 날이 되어서야 누나를 다시 볼 수 있을까. 나는 그저 하늘을 올려보고 땅을 내려보며 오열하지만 방법이 없다. 그저 죽는 날까지 기다릴 수밖에는...(虽奉对积年,可以为尽日之欢。常苦不尽触额之畅。方欲与姊极当年之匹,以之偕老,岂谓乖别至此!诸怀怅塞实深,当复何由日夕见姊耶?俯仰悲咽,实无已已,惟当绝气耳!)


치도무와 마찬가지로 왕헌지도 일생동안 우울하게 지냈고, 42살에 죽는다. 임종때 그는 이렇게 말한다: "평생 후회되는 일이 없는데, 오직 한가지 치도무와 이혼한 일 뿐이다."


고대에 상류사회의 결혼은 대부분 정략결혼이거나 권력에 빌붙는 수단이었다. 동한의 대신 송홍(宋弘)도 왕헌지와 비슷한 경우를 당했는데, 그는 예지로 자신의 혼인을 유지했고, 자신의 행복을 지켜냈다. 광무제 유수의 누나인 호양장공주(湖陽長公主)의 남편이 죽자, 유수는 누나를 위하여 부마를 골라주고자 한다. 누나는 마음에 둔 사람이 있다고 말하는데, 그가 바로 송홍이었다. 그러나 송홍에게는 이미 본처가 있었다. 공주가 첩이 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유수는 친히 송홍을 만나서 넌즈시 떠보기로 한다. 유수는 "귀역교(貴易交), 부역처(富易妻)"라는 말을 꺼낸다. 사람이 귀해지면 사귀는 사람을 바꾸고, 사람이 돈이 많아지면 처를 바꾼다는 말이다. 송홍은 유수의 말 속에 숨은 뜻을 알아차리고 이렇게 대답한다: 신이 듣기로 빈천지교불가망(貧賤之交不可忘), 조강지처불하당(糟糠之妻不下堂)이라고 했습니다." 유수는 그의 말을 듣고 더 이상 송홍을 핍박하지 않았다고 한다.


왕헌지의 재능과 비교하자면 그의 둘째형인 왕응지(王凝之)는 조금 손색이 있었다. 그러나 왕응지는 재녀(才女) 사도온(謝道韞)을 처로 맞는다. 당시의 진군사씨가족은 강좌의 명문이었다. 유명한 "미약유서인풍기(未若柳絮因風起)"는 바로 사도온의 싯구이다. 그녀는 반소(班昭), 채염(蔡琰, 채문희)과 더불어 중국고대재녀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사도온은 재상 사안(謝安)의 조카딸이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사안이 조카딸의 사위를 고를 때, 처음에 마음에 둔 사람은 왕응지가 아니었다고 한다. 왕희지의 다섯째 아들인 왕휘지(王徽之)였다고 한다. 왕휘지는 재능이 출중했고, 학식과 풍도가 모두 둘째인 왕응지보다 나았다. 그러나 무엇때문인지는 몰라도, 최종적으로 사안이 선택한 것은 천하에 이름을 떨치고 있던 왕휘지가 아니라 평범한 왕응지였다


그래서 이 왕응지는 천하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가 된다. 왕응지와 사도온은 4남1녀를 둔다. 사도온은 재능이 남자에 못지 않을 뿐아니라, 담량이나 기백도 남자에 못지 않았다. 손은(孫恩)의 반란때 왕응지는 멍청함으로 자신과 몇 자녀의 목숨을 잃는다. 그러나 반군에 맞서서 사도온은 칼을 쥐고 담담하게 그러나 극력 반항한다. 손은은 그녀에게 존경의 마음이 들어 그녀와 외손자를 풀어준다. 그리고 사람을 보내어 그녀를 회계(지금의 소흥)까지 안전하게 모셔준다. 그후 사도온은 집안에 조용히 지내면서 평생을 과부로 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