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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공통)

중국고대에 여성의 이름은 어떻게 지어줬을까?

by 중은우시 2017. 6. 14.

글: 황효양(黃曉陽)

 

어제는 사람들과 문화에 대하여 얘기했는데, 나는 약간 걱정이 앞섰다. 어떤 친구들은 매일 주식과 우표, 화폐의 가격만 연구하는데 습관이 되어 문화에 대하여 흥미가 크지 않을까봐. 그런데 내가 생각지도 못하게, 많은 친구들이 글을 남기고 관심을 가져주었다. 심지어 어떤 친구는 필자에게 문화에 대하여 얘기하는 블로그를 열라고 말하기도 했다. 기실 나는 정말 문화를 얘기하는 블로그를 열고 싶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내가 하는 일이 너무많아서, 이런 글을 쓰는데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해서 시간적 손실이 크다. 그래서 잠지 여기에 글 하나만 남기고, 상황을 보아가면서 계속 쓸 것인지 아니면 다른 방법을 찾을 것인지 생각해보려고 한다.

 

우리는 알고 있다 성(姓)은 처음에 여(女)에서 나왔다는 것을 즉, 최초의 성은 여자의 것이다. 부계사회로 들어선 후,성은 비로소 남성의 전유물이 되었다. 이건 이상할 것도 없다. 왜냐하면 성은 원래 부족의 표지였고, 인류사회는 모계사회였으며 부족은 여성이 위주였다. 일단 부계사회로 들어서면, 자연히 남성위주로 바뀌게 된다.

 

또 한 가지. 성(姓)과 씨(氏)는 기실 전환될 수 있는 것이다. 씨가 성으로 전환되기도 하지만, 성은 씨로 전환될 수 업사. 나중에는 '성'과 '씨'를 구분하지 않게 되었고,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성'만 있고 '씨'는 없어지게 된다.

 

그외에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표지를 필요로 한 것은 부족이다. 즉 큰 부족집단이지, 보통백성이 아니다 보통백성은 개별적으로 유랑하고 조직이 없다. 그래서 표지도 필요없다. 그래서 성은 귀족의 전유물이고, 일반백성과는 관계가 없었다. 나중에 춘추시대에 들어서면서 사족(士族)이 굴기하고 점점 사족들도 성씨를 얻게 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전(田), 조(趙), 위(魏), 한(韓)같은 성은 모두 사족이 얻은 성의 대표적인 것들이다.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백성들은 입종(立宗)이나 입성(立姓)의 권리가 없다. 신분이 낮기 때문이다. 백성이외에 또 한 종류의 사람들의 지위도 마찬가지로 낮았다. 그것은 바로 여자들이다. 부계사회에서 여자의 지위는 180도 바뀐다. 이전에 여인의 성이었는데, 나중에는 모두 씨가 붙는다. 특별히 강조되는 것은 씨였지 성이 아니었다. 당연히 어떤 것은 원래 씨였고 마찬가지로 강조된다. 그것은 성과의 지위차이를 나타내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봉건시대에 여성들도 성이 있었는가? 이름이 있었는가?

 

만일 봉건시대에 여인들은 성도 없고, 이름도 없었다고 말한다면, 분명히 욕을 엄청나게 얻어먹을 것이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은 아주 유명한 여인의 성과 이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상주왕(商紂王)의 비인 달기(妲己), 주유왕(周幽王)의 비인 포사(褒姒), 진시황의 모친인 조희(趙姬), 항우의 부인 우희(虞姬)등등.

 

봉건시대의 여성의 성과 이름에 대하여 필자는 관련된 문자나 기록을 본 적이 없다. 다만 이들 성과 이름을 연구할 때, 한 가지 인상을 받았다. 이들은 성이건 이름이건 모두 고대제왕 혹은 귀족의 성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런 대담한 가설을 내놓고자 한다. 기실 고대귀족이상의 공주(公主)는 부친의 씨를 성으로 하고, 장공주(長公主)는 부친의 성을 이름으로 했다.

 

이게 무슨 뜻인가? 예를 들어, 제나라의 장공주는 태어나자마자 이름이 확정된다. 왜냐하면 제나라의 족원은 강(姜)을 성으로 하고 제(齊)를 씨로 한다. 그래서 장공주의 이름은 바로 제강(齊姜)이 되는 것이다. 신(申)나라도 강이 국성이다.그래서 신나라의 장공주는 분명히 신강(申姜)이라고 불릴 것이다.

 

역사적으로, 우리는 제강, 신강, 허강(許姜)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제희(齊姬) 신희(申姬) 허희(許姬)라고는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노희(魯姬), 위희(衛姬), 정희(鄭姬)는 있다. 노강, 위강, 정강이라는 말도 들어본 적이 없을 것이다. 송(宋)이라는 이성국(異姓國)에서는 여자의 이름 가운데 분명히 무슨 강이니 무슨 희니 하는 것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하나의 증거이다.

 

이 방식으로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일부 고대여인들의 이름을 고찰해보자. 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주려왕(周厲王)의 왕후는 신강(申姜)이다. 그녀는 주선왕(周宣王) 희정(姬靜)을 낳았다. 주선왕의 아들은 희궁열(姬宮涅)이다. 수신기(搜神記)의 기록에 따르면, 모친인 강후(姜后)는 제나라 국군의 딸이다. 즉 제강이다. 희궁열 즉 나중의 주유왕은 비인 신후(申后)를 왕후로 삼는다. 즉 신나라의 공주이다. 사기에는 이름을 신강이라고 했다. 그녀는 바로 주평왕의 모친이다.

 

이제 문제 하나가 생겼다. 주려왕은 주유왕은 조손관계이다. 그런데 할아버지와 손자의 처가 모두 신강이다. 이름도 같고 성도 같다. 그렇지만 당연히 한 사람은 아니다. 그저 신나라의 서로 다른 대의 공주일 것이다.

 

제강을 보면, 역사상 여러 명이 나온다. 주선왕의 처가 베강이다. 그리고 진문공(晋文公)의 처도 제강이다. 그외에 노환공(魯桓公)의 처도 제강이다. 단지 나중에 진문공의 처와 구별하기 위하여 다시 이름을 지어서 문강(文姜)으로 개명한다. 바로 이러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이런 결론을 내린다. 신강이던 제강이던 모두 이들 여자들의 이름이 아니라 그저 제후국 공주의 신분이라는 것을 표시할 뿐이고, 그녀들에게 따로 이름은 없었다.

 

제후국 공주의 신분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에는 필자도 동의한다. 그녀들에게 다른 이름이 있었는지 여부에 대하여도 필자는 가능성이 크지 않다고 본다. 이름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아마 아명 수준일  것이다. 통상적으로 말해서 이들 제후국 공주는 나중에 모두 제후에게 시집가서 왕후가 되고, 모두 일국의 군주의 처가 된다. 그래서 그녀들의 신분특징으로 부족의 원천을 나타낼 수 있으면 되었다.

 

어떤 제후가 공주를 대부(大夫)에게 시집보내는 것은 춘추이후의 일이다. 대부는 사족이 되어 이미 역사무대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 제후국의 공주들이 한단계 몸을 낮추어 시집을 가는 일은 봉건시대에 전혀 없던 일이다. 나중에 나타난 화친같은 일은 더더욱 불가능했다.

 

만일 부친의 씨를 성으로 하고, 부친의 성을 이름으로 명명하는 방식이 정확하다면, 우리는 많은 역사명인들의 신문을 대체로 연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포사'이다. 포사는 달기와 마찬가지로, 역사기록에는 요녀(妖女)로 기록되어 있다. 포사의 출신은 더더욱 특이하다. 사기에 기록된 바는 더더욱 황당하다. 만일 우리가 말하는 명명규칙으로 추리해보면 포사은 씨가 포이고 성이 사인 공주이다.

 

사료의 기록에 따르면, 사는 치수영웅인 우(禹)의 성이다. 그리고 포(褒)는 우의 아들중 하나가 받은 봉지(封地)이다. 즉 씨(氏)이다. 이것은 바로 증명한다. 포는 부친의 씨고 사는 조상의 성이다. 이는 포사가 역사에 기록된 것처럼 민간여인이거나 요녀가 아니라 사씨성의 포나라 제후의 장공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신분이래야 비로소 주나라 천자의 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주유왕이 포사를 비로 삼은 것은 봉건제도에 부합했다. 마찬가지로 역사기록에 따르면 주유왕은 신강을 폐위시키고 포사를 왕후로 삼으려 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분명 역사적 사실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강(姜)과 희(姬)는 서로 혼인하는 부족이다. 강의 성을 가져야만 비로소 왕후로 세워질 수 있다. 포는 그런 자격이 없다. 주유왕이 신후를 폐한다고 하더라도, 새로 왕후를 세우려면 반드시 강(姜)성의 부족여인을 찾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포사에 관한 역사기록은 고쳐진 것이 많다고...

 

다시 조희를 보자, 조희가 살아있을 때는 춘추와 전국의 교체기였다. 야사에는 조희가 기녀라고 되어 있다. 나중에는 상인 여불위의 소첩이라고 한다. 여불위의 아이를 임신한 후, 여불위가 진나라에서 조나라에 인질로 와 이썬 이인(異人)에게 시집보내고, 나중에 이인이 진나라고 귀국하여 왕위에 오르니 그가 진나라 장양왕 즉 진시황의 부친이라는 것이다. 조희는 진시황의 모친이다. 역사에서는 이렇게 마한다. 진시황은 기실 여불위의 아들이라고.

 

이 일이 거짓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먼저 희는 오늘날 기본적으로 여자의 이름이고, 심지어 특별한 장소와 연결시켜 그다지 좋지 않은 이름이 되었다. 그러나 주나라때 혹은 춘추전국시대에 희는 국성(國姓)이다. 신성불가침이었다. 단지 희씨성의 공주만이 이 글자를 붙일 수 있었다. 보통 사람들은 절대로 이 글자를 사용하지 못한다. 만일 사용하면 바로 대역무도한 사람이 될 것이다.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조희는 절대로 기녀의 이름이 아니라는 것이다. 당시 기녀는 신분이 극히 낮았고, 창기업이 합법화된 것은 제나라때부터 시작하지만, 아직 전국으로 퍼지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조희는 씨가 조이고 성이 희인 공주라고 하면 사실상 다시 문제가 나타난다. 역사에 기록된 조(趙)씨의 최대원천은 영(嬴)성이다. 그 시조는 바로 조보(造父)이다. 칠대손인 조숙대(趙叔帶)는 주유왕의 대부가 된다. 주유왕이 무도하여, 주유왕을 떠나 진(晋)으로 간다. 그리하여 진나라의 대부가 된다. 나중에 삼국분진(三國分晋)의 조나라 선조가 되는 것이다.

 

조와 희성은 실제로 관계가 없다.

 

그러나, 조의 이런 역사적 설명은 상당히 의문이 있다. 대부가 입종(立宗)하는 것은 춘추이후의 일이다. 주유왕은 서주말기이고 서주가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이다. 그런데 어디서 조숙(趙叔)이 나온단 말인가. 조(趙)뿐아니라 숙(叔)까지 나왔다. 이 두 글자는 조숙대가 감히 쓸 수 없는 말이다. 이는 최소한 제후이상이 쓸 수 있는 글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추측해볼 수 있다. 소위 조숙대는 당시에 성과 이름을 가졌던 것이 아니라, 이후 조나라가 진나라에서 분리독립하고, 입종한 후에  조나라에서 자신들 부족의 역사를 그럴듯하게 꾸미기 위하여 이 역사를 만들어낸 것이라고. 조나라가 세워지기전에는 아마도 아주 자그마한 제후국이었을 것이고, 주왕실에서 봉지로 받았거나 아니면 진나라의 제후가 그 아들에게 봉지를 내렸을 것이다. 어떤 경우이든간에 희(姬)성이 되어야 한다.

 

만일 조(趙)씨중에서 한 작은 갈래가 희성에서 유래한다면 조희의 이름은 해석이 가능하다. 그러나 진이인은 인질로 잡혀 있는 공자인데, 자기나라로 돌아가서 국군의 자리에 오른다. 역사에서는 여불위가 돈으로 매수했다거나 역할을 했다고 하는데 그건 확실히 불가능하다. 반대로 이인이 조씨 희성의 장공주를 취했다는 것은 그의 개인적인 지위를 높여주는 것이고, 이를 통해서 국군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카드가 하나 더 생긴 것이다. 반대로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일단 조희라는 이름을 실제로 조씨 희성의 공주라고 본다면 다른 문제가 나타난다. 공주이면 분명히 기녀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소위 여불위의 첩이라든지 진시황이 여불위의 사생아라든지 하는 주장은 모두 거짓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또 하나 언급할 사람이 있는데 바로 우희이다.

 

위에서 말한 명명규칙에 따르면, 우희는 우씨 희성의 장공주이다. 우는 희성의 부족출신도 있고, 순(舜)의 부족출신도 있다. 순은 우순(虞舜)이라고도 불린다. 그러나 주왕조이후, 두번 우에 봉해진다. 심지어 어떤 주장에 따르면 오(吳)가 기실 우(虞)라는 것이다. 나중에 오로 바뀌었다고 본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ㅇ느 우희는 희성의 부족출신으로 공주신분이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항우의 초기역사에서 초나라대부의 후예로 사방으로 숨어다녔다는 이야기는 아마도 정확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우희를 처로 맞이할 수가 없었다.

 

춘추이후, 여인은 점점 이름과 성을 갖게 된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것도 귀족과 대부의 딸들에 국한되었다. 평민은 가질 수가 없었다. 평민의 딸은 부친의 집에서는 아명만 있고, 남편의 집에서는 남편의 성을 성으로 삼고, 부친의 성을 씨로 삼는다. 그리고 다시 씨(氏)자를 붙인다.

 

주(周)성의 딸이 왕(王)성의 남자의 처가 되면 왕주씨(王周氏)라고 불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