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왕목명(王沐明)
1. 마음대로 오고 가고, 일처리는 설렁설렁하다가 그만두곤 했다.
마오안잉은 1946년초에 귀국해서, 1950년 조선으로 가기까지 근 5년여의 시간동안 비교적 안정적으로 어떤 업무에 종사한 적이 없었던 것같다. 정식으로 공개된 업무경력은 모두 짧은 몇 달 혹은 몇십일이다. 그리고 행동이 자유로웠고, 무슨 '단위'의 구속은 받지 않았다.
조선으로 가기 전에 마오안잉에게 비교적 유명한 경력은 '농업대학'에 입학한 것이다. 마오안잉이 막 연안으로 돌아온 후, 마오쩌둥은 그에게 농민노동모범 우만여우(吳滿有)에게 농촌생활을 배우라고 요구했다. 이 시기는 기실 오십여일이다. 기껏해야 농촌여름캠프 수준이다. 다만 나중에 마오안잉을 언급할 때면 모두 이 경력을 크게 얘기하곤 한다.
베이징에 들어온 후 그의 직장은 중앙사회부(정보기관) 부장 리커농(李克農)의 비서 겸 통역이었다. 이 직위에서 그는 아주 산만했던 것같다. 원래 비서업무는 무척 바쁜 일이다. 통상적으로 자신의 시간을 낼 수 없다. 그러나 마오안잉은 1950년 5월초에 한가하게 창사(長沙)의 친척을 방문한다. "이번 남하는 공사를 겸비한 것이었다. 그는 소련대표단을 따라 우한(武漢)으로 가서, 리커통의 통역을 며칠간 한 후 창사로 가서 친척을 만났다."
샤오산(韶山)에 갔을 때, 고향친척 마오이췐(毛貽泉)은 그에게 빚을 달라고 찾아온다. 30년전에 마오쩌둥이 100대양을 빌려가서는 지금까지 갚지 않았다는 것이다. 마오안잉은 돈이 없었다. 그래서 성서기 왕셔우다오(王首道)에게 '돈을 빌려' 갚았다. 고향친척을 찾아가서 성묘를 하는데 그는 1개월여를 머문다.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리커농은 비밀리에 소련을 방문하여야 했다. 전보를 보내어 독촉하고서야 베이징으로 돌아간다. 베이징으로 돌아갈 때, 이 28세의 청년간부는 연와(軟臥) 침대차를 탄다. "마오안인은 창사의 물로 탄 군산모첨차(君山毛尖茶)를 한 입 맛보고는 쇼파에 기대고 누워서 그날의 신문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이것은 아마도 후난(湖南)성위가 특수하게 안배한 교통편일 것이다. 성위서기에게 돈을 빌린다든지, 성위초대소에 머문다든지, 침대차의 쇼파에 누워간다든지 하는 것을 보면 마오안잉이 공개적으로 '부황'의 기치를 내걸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당정고관들도 이 황태자를 함부도 대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으로 가기 전에, 마오안잉은 북경기기총창에서 당총지부 부서기를 지낸다. 이것은 마오안잉이 가진 경력중 비교적 정상적인 것이다. 마오안잉이 공장에 가겠다고 난리를 치자, 주은래가 마련해준 자리이다. 이때는 한국전쟁이 이미 발발했고, 사회부는 정부업무이건 소련과의 연락업무이건 아주 바빴을 때이다. 그는 왜 부장비서의 자리를 떠나서 자신의 러시아어 장점을 전혀 살릴 수 없는 북경기기총창으로 가려고 했을까? 여기에서는 이 수수께끼는 밝히지 못한다. 1950년 8월중순에서 10월 8일까지 그는 북경기기총창에서 2개월도 안된 기간동안 일을 한다. 10월 8일 그는 펑더화이(彭德懷)를 따라 동북으로 가고, 공장에는 아무런 보고도 하지 않는다. 10월 14일 펑더화이를 따라 베이징으로 되돌아오고, 다음날 다시 동북, 조선으로 간다. 그는 그제서야 급히 공장으로 가서 사회부에서 임무가 부여되어 한동안 그 일을 하러 가야한다고 말한다.
근 5년의 기간동안 우리는 마오안잉의 직장이 계속 바뀌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가 어느 한 분야에서 착실하게 실적을 내는 것은 볼 수가 없다.
2. 조선으로 간 것은 정치적인 필요때문이고, 단지 3,5개월만에 돌아올 계획이었다.
마오안잉이 조선으로 간 것은 자신이 제안한 것인가, 아니면 마오쩌둥의 뜻인가? 책에서는 이렇게 기술한다. 10월 5일, 중공중앙은 조선에 파병하기로 결정한 후, 마오쩌둥과 위사 샤오리(小李)간의 대화를 기술한다: "나는 항미원조(抗美援朝)를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내 아들이 가지 않으면 누가 가겠는가? 나는 안잉을 펑더화이에게 맡기려고 한다. 함께 조선으로 가서 싸우도록. 네 생각에 괜찮으냐?" 마오쩌둥은 또한 이렇게 말한다. "펑더화이 동지와 같이 가면 군사지식을 좀 배워서, 장래 그에게 아주 유용할 것이다." 그날 저녁 혹은 다음 날 저녁에 마오쩌둥은 마오안잉을 부른다: "오늘 내가 너를 오게 한 것은 너와 군인이 되는 일을 상의하기 위한 것이다." 이를 보면, 마오안잉이 군에 들어가 조선으로 간 것은 마오쩌둥이 안배한 것이다. 그 출발점은 첫째는 모범을 보이려는 것이고, 둘째는 마오안잉의 '장래'를 위한 것이다.
마오안잉은 조선으로 가서 무엇을 하였는가? 이것도 마오쩌둥이 미리 안배해 두었다. 10월 7일, 네롱전(聶榮臻)은 마오쩌둥에게 전화를 걸어 보고한다: "펑노총이 내일 사람들을 데리고 선양(瀋陽)으로 가서 업무를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는 러시아어 통역을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마오쩌둥은 말한다. "그건 찾을 필요없다. 안잉을 가게 하자. 내가 그에게 통지하겠다." 이를 보면 마오쩌둥은 마오안잉이 전선에 나가게 하려 하지는 않았다. 세심하게 그를 위하여 안전을 고려하면서 핵심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직위를 찾았다.
마오안잉이 당시 얼마나 오래 있으려고 생각했는가? 그는 장모 장원츄(張文秋)와 작별인사를 할 때 이렇게 말한다:"길면 반년, 짧으면 3개월." 그의 의복, 이불, 서적은 아직 북경기기총창에 있었고, 정리하지도 않았다. 그는 말했다. "일단 여기에 놔두자. 내가 돌아와서 가져가겠다." 사정을 가장 잘 설명하는 에피소드는 1951년 1월 2일, 이때 마오쩌둥은 마오안잉이 희생된줄을 아직 모르고 있었는데, "자료를 보고 있던 마오쩌둥은 예쯔롱(葉子龍)이 왔다는 말을 듣고는 고개도 들지 않고 눈도 돌리지 않고 말한다.'쯔롱, 내가 너를 찾으려고 했었다. 안잉을 불러들이자. 봐라 그가 문서를 이렇게 쓰고 있다. 진보가 없을 뿐아니라, 오히려 퇴보했다.' 이때는 마오안잉이 군에 들어가 참전한지 3개월도 되지 않은 때이다. 조선으로 떠난지 2개월 10일이 되는 때이다. 만일 그가 희생되지 않았더라면, 베이징으로 개선했을 것이다. 그가 장모에게 말한 '짧으면 3개월'이라는 말이 그대로 들어맞는다."
3. 자랑하기를 좋아하고, 성격은 경박했다.
마오안잉은 조선지원군사령부에서 모두 34일간 있었다. 다만 그가 마오쩌둥의 아들이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원래 그의 신분은 비밀이지만, 그는 사람을 만나면, "맞다. 나의 부친이 마오쩌둥이다."라고 말하는데,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그는 평상시에 허리에 작은 권총을 차고 다니면서, 사람들이 물어보면, 뽑아들면서 말했다: "이 권총은 내력이 있다. 스탈린이 선물한 것이다." 모두 놀라고 부러워하며 말한다. "너는 소련에 가보았는가? 스탈린을 만나보았는가?" 그는 소련에서 10년간 머물면서, 소련홍군이 베를린을 점령하는데 참가했고, 스탈린을 직접 만나보았으며, 스탈린이 그에게 권총을 주면서 그에게 왜 소련아가씨를 처로 삼지 않느냐고 물었다는 등등을 얘기했다. 생각해보라. 이런 경력은 일반간부나 전사는 물론이고, 펑노총이라고 하더라도 망진막급(望塵莫及)이다. 농민 노동자출신의 전우들에게 이런 것을 얘기한다는 것은 자랑하기 좋아하는 성격을 전형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라 할 것이다.
기실, 그가 말하는 소련홍군경력은 그의 농민대학, 공장서기와 마찬가지로, 제대로된 경력이 아니었다. "1943년, 마오안잉은 모스크바 레닌군정대학에 공부하러 간다. 그가 마오쩌둥의 아들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소련은 파격적으로 그에게 중위 계급을 부여한다. 1년후, 그는 다시 소련군에 들어가 고급참모인원을 교육시키는 최고학부 프룬제군사아카데미에서 교육을 받게 해준다. 졸업후, 마오안잉은 탱크연대 지도원으로 임명되어 소련군의 대반격에 참전한다." 손가락으로 꼽아보면, 이때는 이미 1944년말 혹은 1945년초이다. 베를린을 함락시킨 것은 1945년 4월 30일이다. 그래서 마오안잉의 이 전투경력은 기껏헤야 반년정도이다. 그리고 "중소양당은 한가지 합의를 했는데, 중공지도자의 아들은 참전시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탱크연대지도원'은 안전이 보장되는 자리였다.
4. '지원군사령부'의 지휘관에게도 마음대로 지시했다.
제1차전투이후, 마오안잉과 38군 군장(軍長) 량싱추(梁興初)간의 대화를 보도록 하자:
"량군장. 당신이 있는데 사람이 필요없는가. 내가 당신의 군으로 가면 안되겠는가?"
"너는 뭘 하고 싶은가? 너를 작전과에 배치하면 되겠는가?"
"여전히 기관에서 일할 것라면 당신이 있는 곳에는 왜 가겠는가? 지원군사령부 작전실과 같지 않겠는가?" 마오안잉은 그건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그럼...네 생각에는...." 량싱추는 이해를 하지 못하여 말했다.
"나는 기층으로 가고 싶다." 마오안잉은 그의 부친처럼 손을 휘저었다. "영장(營長)부터 시작하자. 당신은 나에게 영장 자리를 주면 어떤가?"
량싱추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그는 마오안잉의 이런 기세에 완전히 눌려버린다....펑노총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도 알 수가 없다. 그래서 그는 할 수 없이 "그것도 좋다. 그것도 좋다..."라고 말할 뿐이었다.
"약속한 것이다. 군자일언 중천금이다. 언제 가면 되겠는가?" 마오안잉은 아주 진지하게 물었다.
"나도 원하는 바이지만, 펑노총이 당신을 보내주지 않을까봐 걱정이다. 아래는 너무 위험하다." 량싱추가 말한다.
"당신이 펑노총에게 말해줘라. 나에게는 전투 경험이 있다고 말하면 된다. 나는 소련에서 싸워보았다. 호국전쟁에 참전했었다."
"펑노총과 얘기하는 것은 내가 감히 말을 꺼낼 수가 없다.....량싱추, 네가 어찌 내 담장밑을 빼가느냐고 말하면 내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
"하. 너희는 어찌 그렇게 펑노두(彭老頭)를 모두 무서워하는가?" 마오안잉은 소매를 만지면서, "좋다. 내가 그를 찾아가서 얘기해보겠다."
이게 무슨 사령부의 일개 비서와 주력군 군장의 대화인가? "그건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그의 부친처럼 손을 휘저었다", "소매를 만졌다" 이 몇 가지 동작은 아주 생생하게 마오안잉의 심리상태를 반영한다. 고위장성을 앞에 두고 전군총사령관을 '펑노두'라고 부른다. 이것은 무지가 아니라 무외(無畏)이다. '자신이 최고위층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 일이 있다. "마오안잉과 펑더화이가 바둑을 두면서, 자주 한 수를 물리는 것때문에 얼굴을 붉히면서 언쟁을 했다." 나중에 다른 장군이 완곡하게 그에게 그러지 말라고 했다. 펑노총이 바둑을 둔 후에 마음이 편안해야 작전을 더 잘 지휘할 수 있을 거라고. 과거에 한 회고록에서 본 바에 따르면, 마오안잉은 이렇게 말한다: '타마더(욕임) 펑노총 그가 또 한 수를 물리잖아요." 펑더화이는 그저 웃고 넘겼다. 홍쉐즈(洪學智)는 뒤에서 다리로 마오안잉을 치면서, 펑노총을 존중하라고 눈치를 주었다. 이것을 보면, 마오안잉은 펑더화이의 앞에서 기본적으로 '못하는 말이 없었고,' 펑노총을 사령관으로 대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장 전형적인 사건은 제1차전투가 끝난 후, 펑더화이는 제1차지원군당위확대회의를 주재하는데 실질적으로는 최고작전회의였다. 회의에서 펑더화이는 38군 군장 량싱추를 크게 질책한다. "군령에 위반했고, 군율에 따르면 즉결처분해야 한다"는 심한 말까지 했다. 전군고위장군들이 모두 금약한선(噤若寒蟬)하여 입을 꽉 다물고 있었다. 이어서 펑더화이는 제2차전투의 전투방법을 얘기했다: "나의 의견은 먼저 물러나는 것이다. 우리의 주력은 현재의 진지에서 30 내지 50킬로미터 물러난 후, 맥아더에게 우리가 그들을 무서워한다고 여기게 만든다. 이렇게 하면 그는 더욱 창궐할 것이고, 전방의 군대가 앞으로 진격할 것이다. 우리는 헛점을 찾아서 차단하고, 분할포위하여...." 이 때, 모든 사람들이 생각지 못했던 이링 벌어진다. 마오안잉이 회의탁자를 벗어나 펑더화이의 반대편으로 걸어간다. 그리고 작전지도를 가리키며 말을 시작한다: '내가 보기에는 남쪽으로 진공해야 합니다. 병법에서 말하기를 전투를 잘하는 자는 이익을 보고 잃지 ㅇ낳고, 시기를 만나면 의심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적군이 도망치지 않았습니까? 패배한 것 아닙니까? 왜 우리는 승기를 잡아 추격하지 않습니까. 오히려 후퇴합니까?" 모든 회의참석자들은 크게 기이하게 생각하고 서로 귓속말을 한다. "이 통역은 담이 적지 않다. 감히 펑노총이 화를 내고 있는데 말이 틀렸니 마니 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중요한 회의에 그가 끼어들 자격이 있단 말인가?" 이때의 마오안잉은 확실히 자신이 단지 비서 겸 통역이라는 것을 잊었던 것같다. 아마도 자신을 감국태자(監國太子)나 흠차대신(欽差大臣)이라고 생각했던 것같다.
5. 생활이 산만하고, 방공규율을 위반하여 목숨을 잃다.
마오안잉은 늦잠을 잘 자고 게으른 편이었다. 책에서도 여러번 그런 내용이 나온다. "깨어보니 하늘이 이미 다 밝았다...마오안잉은 마음 속으로 자책했다. '일상삼간아독면(日上三竿我獨眠)'하다니 해서는 안될 일이다." 작전실 주임 장양우(張養吾)가 귀국전에 마오안잉에게 남긴 마지막 말은 "시간에 맞추어 기상하고, 시간에 맞추어 식사를 하고, 시간에 맞추어 방공하라"는 것이었다. 지부회의에서, 작전처 부처장 청푸(成普)는 이렇게 말했다. "한번은 마오안잉이 늦게 일어났다. 우리는 그가 일어나기를 기다려 아침식사를 하려 했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식사를 막 하려는데 비행기가 왔다. 우리 4명은 방안에 갇혀 있게 되었다. 할 수 없이 한 사람이 한쪽 구석으로 가서 쪼그리고 앉았다. 마치 전기석(奠基石)처럼."
마오안잉이 희생당한 날은 11월 25일이다. 이전에 지원군사령부는 공습에 방비하기 위하여, "3가지 규정을 만든다: 하나는 날이 밝기 전에 반드시 식사를 다 한다. 둘은 날이 밝은 후에는 연기를 내지 않는다. 셋은 흩어져서 공습에 방비한다." 펑더화이도 강조했다. "너희 젊은이들은 방공에 주의하라. 여하한 요행심리도 가져서는 안된다. 동굴에 들어가야 할 때 들어가지 않는 것은 규율문제이다."
그날 아침 마오안잉은 침대에서 늦게 일어났고, 아침 식사도 하지 않았다. "방공동안에 숨어있던 마오안잉은 고개를 빼서 하늘을 보았는데 비행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이때는 이미 배가 고팠다." 10시가 지난 후, 마오안잉은 까오뤼신(高瑞欣)에게 작전실로 돌아가겠다고 말한다. 가오뤼신은 말했다. "기다려봐라. 경보가 아직 해제되지 않았지 않느냐." 마오안잉이 말한다. "겁낼 것없다. 내가 보기에 비행기는 한동안 오지 않을 것이다. 온다고 하더라도, 어디 꼭 이 곳을 명중시킬 것인가. 엣날에 국민당의 비행기가 자주 연안을 공습했지만, 부친는 일에 바빠서 방공동에 들어가지도 못했지만....아무 일도 없지 않았는가. 부친이 보인 모범을 아들이 배우지 않으면 누가 배우겠는가?"(공공연히 규율을 어기면서 '부친'의 기치를 내걸었다. 이런 도련님은 정말 지원군사령부 사령관의 골치거리였을 것이다) 말을 하면서, 마오안잉은 이미 방공동을 빠져나갔다. 까오뤼신등은 할 수 없이 그를 따라 작전실로 가서 밥을 했다(찬밥에 달걀을 넣어서 따뜻하게 볶음).
아쉽게도 아들은 부친처럼 운이 좋지 못했다. 11시가 지나서, 미군의 4대 B-26 폭격기가 대유동(大楡洞) 상공을 지나갔다가 바로 되돌아온다. 마오안잉이 요리하는 연기를 보았기 때문인지 아닌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번에 수십 개의 기유탄(汽油彈)을 떨어뜨리는데, 정확하게 작전실에 명중한다. 생존자인 청푸는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당시 마오안잉은 난로 옆에서 먹고 있었다. 우리는 문밖에서 비행기가 폭탄을 떨어뜨리는 것을 보고는 빨리 도망치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마오안잉과 까우뤼ㅎ신은 모두 탁자 아래로 숨어들어 포탄을 피했다....일찌감치 도망쳐 나왔더라면 아무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이를 보면, 이것은 완전히 피할 수 있는 사고였다. 마오안잉이 방공규율을 위반하여,지원군사령부가 폭격을 받게 했을 뿐아니라, 자신은 목숨을 잃는다. 그리고 우수한 기요참모(저우언라이의 말)인 까우뤼신도 희생된다.
마오안잉은 1922년 10월 24일생이다 5살때 부친을 떠나고, 8살때는 모친을 잃는다. 지식을 배우고 세계관을 형성할 가장 중요한 단계에 기본적으로 사방을 유랑하며 보낸다. 그증 최소한 5년은 상해에서 유랑했고, 14,5세가 되어서 비로소 소련에 보내진다. 후천적인 부족함은 그로 하여금 지식과 성격에서 몇 가지 결함을 지니게 만들었다. 공식적인 선전에서는 마오쩌둥을 신격화할 뿐아니라, 마오안잉도 신격화한다. 그리하여 나는 오랫동안 마오안잉이 완벽한 혁명청년이라고 여겼다. 심지어 만일 그가 희생되지 않았더라면, 장칭(江靑)을 견제할 수 있을 것이고, 문혁으로 발전하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여기기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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