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정(丁丁)
삼국시대를 만일 208년 적벽대전으로 삼국의 서막이 열렸다고 계산한다면, 280년 삼국이 진(晋)으로 통일될 때까지 합계 72년의 기간이다. 당연히 진정한 삼국역사는 마땅히 220년 한헌제가 조비에게 선양한 때로부터 계산하여 280년 삼국귀진(三國歸晋)한 때까지 딱 60년으로 보아야 한다. 최종적으로 웃은 사람은 사마염이다. 삼국후주는 모두 자신의 손에 포로로 잡힌다. 천하를 통일하고 중국분열의 역사는 끝이 난 것이다.
그러나, 삼국귀진후, 삼국후주 즉 조위의 조환(曹奐), 촉한의 유선(劉禪), 동오의 손호(孫皓)는 모두 선종(善終)했다. 예를 들어, 조환은 선양을 강제당한 후, 사마염에 의하여 진류왕(陳留王)에 봉해지고 받은 대우도 아주 높았다. 구석(九錫)을 받은 사람보다 높았고, 천자의 정기(旌旗)를 쓸 수 있었고, 조위(曹魏)를 정삭(正朔)할 수 있었다. 교외에서 천지에 제사를 지냈고, 예악제도는 모두 조위의 옛것과 같았다. 사마염에 글을 올릴 때도 칭신하지 않았고, 조서를 받고도 절을 하지 않을 수 있는 특권이 있었다. 그리고, 조위의 후속인 진류국은 양진(兩晋), 유송(劉宋)을 거쳐 남제(南齊)까지 214년간 존속했다. 만일 여기에 조위가 나라로 존속한 60년을 합친다면, 그것은 수명이 짧지 않은 왕조가 된다.
그리고, "낙불사촉(樂不思蜀)"의 촉한후주 유선은 포로로 잡힌 후 안락공(安樂公)이 되어 편안하고 즐겁게 여생을 살다가 271년에 사망한다. 향년 64세이다. 동오의 후주 손호는 비록 포로로 된 후에도 자기만 잘난 줄 알았지만, 그래도 사마염에 의해 귀명후(歸命侯)로 봉해진다. 그도 여생을 편안히 지내다가 284년에 사망한다. 사마소에 의하여 폐위된 황제 조방(曹芳)도 사마소에 의하여 제왕(齊王)에 봉해지고 편안하게 여생을 산다. 이를 보면 유선이 '낙불사촉'했다고 하여 유선이 총명한 사람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정말 가소롭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삼국후주는 모두 선종했고, 한 명도 목숨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대우는 모두 상당히 괜찮았다.
사마염은 왜 삼국후주들을 후대했을까? 이는 중국역사상 확실히 보기 드문 장면이다. 이렇게 한 황제가 많지는 않다. 그러나, 사마염은 어떻게 삼국후주를 후대할 수 있었을까? 주로 다음과 같은 3가지 원인때문일 것이다.
첫째, 조비(曹丕)가 좋은 선례를 남겼다. 사마염이 삼국후주를 잘 대우해줄 수 있었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당연히 조비가 좋은 선례를 남겼기 때문일 것이다. 모두 알다시피, 220년, 조비가 조조의 왕위를 승계한 후 한헌제를 핍박하여 선양받아 스스로 황제에 오른다. 그러나 조비가 황제에 등극한 후, 마찬가지로 한헌제를 후대한다. 산양공에 봉하고, 그가 봉지내에서 한나라의 정삭과 복색을 유지하도록 허용했으며, 한나라의 종묘를 짓고 한나라의 제사를 지내도록 허용했다. 조비는 동시에 유협에게 이런 말도 남긴다: "천하의 좋은 물건은 내가 너와 함께 누리겠다." 그리고 글을 올릴 때 칭신하지 않아도 되도록 해주고, 조서를 받고도 절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한헌제도 최종적으로 수종정침한다. 234년에 이르러 제갈량의 최후 북벌때, 그리고 위명제 조예의 시대에 사망한다. 또한 그에게 효헌황제라는 시호가 내려진다. 최종적으로 체면을 지키면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사마염은 사마의의 손자로서, 기본적으로 조조가족의 방법을 따라한다. 현재 조비의 선례가 있으니, 사마염은 당연히 본받아야 한다. 이는 기실 역사에 꼬투리를 잡히지 않으려는 것이고, 사람들이 사마정권이 조위정권만큼 덕이 없었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래서, 삼국후주는 선종할 수 있었으니, 진정으로 감사해야할 사람은 바로 멋진 선례를 남겨준 조비이다.
둘째, 삼국후주는 포로로 잡힌 후에 더 이상 위험한 존재가 아니었다. 삼국후기, 사마염이 조환을 핍박하여 선양을 받은 것이건, 등애가 촉한을 평정한 것이건, 혹은 두예, 왕준이 육로대군을 이끌고 동오를 평정한 것이건, 기실 그다지 격렬하지 않았다. 조환의 선양은 평안한 선양이었고, 충돌은 없었다. 조환은 마음 속으로 기꺼이 한 것은 아니지만, 역사의 조류에 순응하였고, 선양이후에는 더 이상 야심을 품지 않았다. 등애가 촉한을 평정할 때도 그저 음평으로 몰래 건너간 전술을 썼고, 촉한이 패배한 후, 유선은 군신을 이끌고 투항한다. 어떤 반항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투항한 이후, 천하의 일에 신경쓰지 않고, 그저 자신의 삶을 편안히 즐겼다. 서진의 사마염 정권에 어떤 위협도 되지 못했다. 낙불사촉은 유선의 심정을 대표한다. 그리고 동오의 손호는 당시 사마염이 비록 육로대군으로 동시에 동오에 진군하였지만, 전쟁은 격렬하지 않았다. 손호는 대세가 이미 기울었다는 것을 보고, 마찬가지로 촉한의 유선의 방식을 본떠 투항한다. 비록 투항한 이후, 사마염에 대하여 말은 강경하게 했고, 나잘난듯이 행동하기는 했지만, 마찬가지로 편안하게 그의 여생을 보낸다. 서진정관에 아무런 위해가 되지 않았다. 위해가 없으니, 그냥 인정을 베풀어 그들을 잘 대해주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셋째, 정국의 안정과 인재의 흡수에 유리했다. 사마염은 비록 무력으로 삼국을 정복했지만, 정국을 안정시키고 국가를 발전시키고 싶었다. 그러려면 인재가 필요했다. 당시 등애가 촉한을 평정한 후 이 점을 의식한다. 등애는 사마소의 동의를 받기도 전에 안무(按撫)정책을 쓴다. 이렇게 하여 촉한정권이 소멸되고 난 후에 신속히 안정될 수 있었다. 이는 기실 주로 후주 유선을 잘 대우해준 덕분이다. 왜냐하면 유선은 서진의 적의 수령으로 투항한 것이다. 유선의 수하들도 마찬가지로 서진의 적이다. 현재 비록 패배했지만, 개인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가는 기실 모두 유선을 보고 있는 것이다. 최대의 적인 유선을 잘 대해준다면, 유선의 부하들도 당연히 안전하다고 여길 것이다. 그렇게 되면 마음 속으로 서진에 투항하여 편안하게 서진에서 일을 하는 것이다. 이는 동오에도 영향을 미친다. 동오를 심리적으로 와해시키려는 것이다. 사실도 그렇게 되었다. 동오가 멸망한 후, 선례가 있으므로 마찬가지로 평온하게 편입된다. 그래서 삼국귀진이후, 천하에 불안정요소는 나타나지 않는다. 국가가 다시 혼란에 빠지지 않은 것이다. 특히, 비록 천하가 진의 것이 되었지만, 북방에는 많은 소수민족정권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비록 이들 정권은 표면적으로 서진에 신복했고, 안무정책을 쓰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북방정권을 신복시키는데도 유리했다. 특히 진나라는 무력으로 천하를 통일했지만, 국가건설에는 인재가 필요했고, 만일 삼국의 엘리트들을 모조리 진나라에서 쓸 수 있다면, 당연히 기뻐해야할 일이었다. 현재 삼국후주를 잘 대해주는 것은 일찌기 사마염에 반대하였던 삼국의 각급 엘리트인재들에게 좋은 모범이 되었다. 그래서 신속히 생각응ㄹ 바꾸고 사마염정권에서 일을 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사마염의 서진정권은 더욱 공고히 된다. 그래서, 사마염은 삼국후주를 잘 대해주었을 뿐아니라, 과거의 삼국정권에서 많은 각방면의 인재를 뽑아서 각 부서와 각 지방에 직위를 준다. 이렇게 하여, 서진정권은 과도기의 경제후퇴도 나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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