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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초기)

엄수(嚴修): 단포원세개(斷袍袁世凱)

by 중은우시 2014. 4. 29.

글: 유강(劉剛), 이동군(李冬君)

 

어린황제 부의가 즉위하자, 그의 부친 재풍이 감국이 된다. 재풍은 광서제의 동생이다. 일단 취임하자 원세개를 향하여 칼을 휘두른다. 그러나, 그 칼은 머리를 향하여 휘두르지는 않았다. 그저 발 위를 내리쳤다. 원세개에게 족질(足疾)이 있다는 이유로 고향으로 돌아가서 요양하도록 조서를 내린다.

 

그리하여, 원세개는 황급히 북경을 벗어난다.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들은 모두 입을 다물고 있는데, 오로지 엄수만이 재풍에게 상소를 올린다. 원세개의 공과 죄를 분명히 밝혀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엄수는 여전히 원세개를 배웅하러 갔고, 서로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읍을 하며 이별한다.

 

구조정과 결별하다.

 

<시보>는 원세개를 모욕했다. 엄수는 원세개의 아들 원운대(袁雲臺)에게 의견을 얘기하는데 신중하라고 극력 말린다. 조그마한 것을 참지 못하면 큰 일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큰 일이란 무엇인가? 헌정(憲政)인가?

 

엄수는 군자무당(君子無黨)의 입장을 견지했지만, 헌정을 위하여 당쟁에 휘말린다. 엄수는 원운대를 통하여 편지를 보내면서, 표피좌욕(豹皮坐褥) 1쌍, 향이() 2갑, 관연, 보이차, 밀전(蜜餞)등의 물건을 보내어 원세개를 위문한다.

 

그러나, 재풍은 그만두지 않았다. 엄수에게 원한을 품고 엄수를 부른다. 엄수가 입궁하여 먼저 병부의 보방(報房)에 잠시 앉아 있었다. 그후, 청문으로 들어가, 월화문을 나와서, 준의문으로 들어간다. 문안에는 북방3칸이 있었다. 동문에 군기대신이 먼저 와 있었고, 서문에서 잠깐 기다렸다. 군기대신이 명을 내리자 엄수는 들어간다. 먼저 어좌를 향하여 무릎을 꿇고 다시 동난각으로 들어가서 조용히 서 있는다.

 

만나자마자 재풍은 말한다: 학문을 하는 자들은 대부분 윗사람의 뜻에 영합하는데, 본왕은 그런 것에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 그리고는 이런저런 말을 덧붙인다.

 

이틀 후, 장지동(張之洞)이 엄수에게 말한다. 그가 소학교 교과서는 입헌과 부합해야 한다고 제안하여 재풍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것이다. 엄수는 탄식한다: 조정에서는 입헌하겠다고 말하면서, 정부는 하지 않으려 하니, 장래 어떻게 끝나겠는가?

 

얼마후, 재풍은 다시 장지동에게 명하여 엄수에게 말을 전하게 한다. 그가 "예의생소(禮儀生疏)"하다고 질책하는 것이다. 섭정왕은 연이어 "엄수는 예의에 생소하다"고 하면서 '생소'라는 두 글자를 계속 반복했다.

 

원래, 엄수가 유학생을 데리고 알현하였는데, 마치고 나자 상유를 받는다: "오늘 학부에서 학생들을 데리고 인견(引見)하였는데, 시랑 엄수, 보희(寶熙)는 주청을 하면서 잘못이 있었다. 체제에 위배된다(殊乘體制). 모두 이부에 넘겨 감찰하라."

 

원세개가 북경을 떠날 때, 보희도 배웅을 했다. 그래서 연루될 수밖에 없었다. 1주일후, 이부에서는 감찰을 마치고, 반년간의 녹봉을 벌한다. "공죄인데 공제하는 것이 가능할 것인가? 성지를 받들어, 공제는 허용하지 않는다."

 

인심이 황황해진다. 장지동, 보희는 모두 휴가를 신청하고, 엄수도 물러날 뜻을 가진다. 그가 경성에서 관직에 나아간 것은 관직에 뜻이 있어서도 아니고, 돈에 뜻이 있어서도 아니다. 비용을 쓰는 것은 모두 집안의 돈으로 했다. 그는 자신의 염업을 담보로 해서 대출을 받아 경성에서 관직에 있는데 드는 비용을 감당했다. 이는 그의 가정경제에 큰 부담이 되었다.

 

학부에 임직한 것은 입헌을 위하여인데, 입헌은 가망이 없게 되었다. 그러면 차라리 돌아가는 것이 낫다. 그는 사직하기로 결정한다. 사직하기 전에, 그는 한 가지 일을 처리한다. 외무부와 "부미유학판법절(赴美留學辦法折)"을 올려, 유미학무처를 설치하여, 북경 서부교외의 청화원 옛부지에 건물을 짓는데, 바로 청화학당이다.

 

제1차 미국유학생을 모집한다. 630명이 응시하여 2틀간 시험을 치러서 합격자를 발표하는데 47명이었다. 그중 2사람은 김방정(金邦正), 매이기(梅貽琦)로 남개중학 졸업생이다. 그는 마음을 놓는다.

 

그후에 그는 영경(榮慶) 상서에게 고향으로 돌아가서 묘소를 수리하겠다고 신청한다. 영경은 그의 고충을 잘 알았다. "청가수묘절(請假修墓折)"은 즉시 허락된다. 엄수는 이때부터 구조정과 결별하고, 마음의 병 하나를 제거한다.

 

남북화담(南北和談)을 위하여 뛰어다니다.

 

엄수는 구조정과 결별한 때는, 마침 무창의거가 폭발할 때였다. 북양신군은 오로지 원세개의 뜻만 살폈다. 청나라조정도 할 수 없이 원세개를 내각총리대신에 임명하고, "황족내각"은 해체된다. 원세개에게 속히 북경으로 오라는 성지를 내리고, 군주입헌주의를 추진하기로 하고, <헌법신조십구조>를 반포한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현재 입헌당인들 조차도 입헌이라는 낡은 배에 타는 것에 콧방귀를 뀌었다. 당시 최대의 정치는 청나라조정의 퇴위였다. 여기에는 천하가 컨센서스를 이루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원세개에게 청왕조를 대체하라고 권했다. 그러나 원세개는 심시도세(審時度勢)하여, 5가지 불가(不可)한 이유를 밝힌다.

 

첫째, 원세개 본인은 고아과부의 수중에서 정권을 빼앗고 싶지 않다. 둘째, 구신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고 그 세력도 건재하다; 셋째, 북양군 장수들은 이에 대하여 사상적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넷째, 청나라조정의 선양이 있더라도 원세개는 겨우 천하의 절반만을 얻는다. 장강이남은 확보하기 어렵다. 다섯째, 남방의 민의가 아직 불분명하다. 의화(議和)를 통하여 투석문로(投石問路)해야 한다.

 

그러므로, 원세개가 정한 발걸음은 먼저 청나라황실을 유지하고, 다음으로 군주입헌을 하고 다시 민주공화를 논하는 것이다. 민주공화와 청황제퇴위가 되면 스스로 대총통이 되어, 마침내 온건하게 민국의 길을 갈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왕정위, 이석증(李石曾)은 엄수를 찾아간다. 세 사람은 그날 밤에 북경으로 들어와서 양도(楊度)와 만난다. 양도는 원세개에게 이들을 데려간다. 나영공(羅癭公)은 양계초에게 보낸 서신에서 이렇게 말한다: "왕조명(汪兆銘, 즉 왕정위)은 공제회 이후, 북경과 천진의 사이를 오갔고, 먼저 엄수가 원세개를 소개하여 만난다."

 

원세개는 왕정위에게 말했다. 국민회의는 내가 적극 찬성한다. 다만 내가 처한 자리때문에 민주를 주장하기는 불편하고 여전히 군주입헌이다. 만일 의결후, 여전히 군주입헌이 다수이면 그대는 어찌할 것인가. 왕정위가 대답한다: 의결후 나는 반드시 다수에 복종하겠다. 내가 시론을 관찰한 추세를 보면 분명 민주가 다수이다. 만일 민주로 의결되는 그대는 어찌할 것인가?

 

원세개가 말한다: 의결이 된다면, 왕실쪽은 내가 알지 못하지만, 나는 분명히 다수에 따를 것이다. 그리하여 '국사공제회'가 나타난다. 남북간의 정전의화를 주장하는 단체이다.

 

왕정위와의 회담이후, 원세개의 신내각이 등장한다. 신내각에서, 원세개는 엄수를 탁지대신에 임명한다. 이는 재정총장에 해당하는 자리이다. 엄수는 극구 사양한다. 원세개는 다시 특별히 사람을 보내어 엄수에게 말한다. 조정은 그를 전권대신에 임명하니, 남방으로 가서 의화대국을 논의하라고. 엄수는 즉시 회신을 보내어, 자신은 그 임무를 맡을 수 없다고 한다. 그러니 당소의로 바꾸어 파견해달라는 것이다. 다음 날 새벽 4시, 원세개는 다시 전보를 보낸다. 그에게 양사기와 함께 화담참찬을 맡아달라는 것이다.

 

그때 원세개는 남방과의 담판을 원했다. 엄수는 중개인이고, 의화대신의 인선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다. 다만 엄수는 이미 관직에 마음이 없었다. 원세개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당시 "원세개가 아니면 안된다"는 주장이 유행했다. 입헌파와 북양군에서 그렇게 생각했을 뿐아니라, 혁명당인들 중에서도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황흥은 말했다. 만일 원세개가 공화에 찬성하면, 그를 중화민국 대총통으로 받들어야 한다고.

 

왕정위도 원세개는 천하를 웅시하므로 원수의 자리는 그가 맡아야 한다고 보았다. 손중산은 단언한다. 공로나 능력으로 보아, 원세개가 최적임자이다. 신해혁명이 성공한 요소는 세 가지이다: 동맹회가 그 하나이고, 입헌운동이 그 하나이고, 신군의거가 그 하나이다. 삼대요소중에서 원세개는 2개에 관련있다. 손중산은 그중 1개에 관련이 있을 뿐이다.

 

원세개가 대총통이 되는데 반대하다

 

기실, 진정 원세개를 이해한 사람은 엄수이다. 이석증은 공화를 주장했고, 원세개가 공화국의 총통에 되는 것이 안될 게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엄수는 입헌을 주장했고, 원세개는 총리에나 적합하지, 총통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보았다.

 

엄수는 말한다. 원세개가 공화국의 총통이 되면, 스스로에게 해롭고, 나라에도 해롭다. 나중에 발생한 원세개의 복벽칭제사실을 보면 엄수가 한 말이 탁견이었음을 알 수 있다. 원세개는 원래 공화사상이 없었다. 그럼에도 공화국 총통이 되고자 한 것은 실로 공화라는 명복으로 실제는 선양을 받고자 함이었다.

 

원세개는 먼저 입헌이 기치를 내건다. 책임내각제로 섭정왕 재풍을 퇴위시킨다. 그리고 다시 공화의 기치를 내걸고, 남북화담으로 청황제퇴위를 이뤄낸다. 원세개가 총통이 되자 다시 엄수에게 교육총장을 맡아달라고 한다.

 

원세개는 이번에는 재삼 계속하여 요청한다. 엄수는 핑계를 대어 원세개의 여러 아들을 데리고 유럽으로 유학업무를 처리하러 떠난다. 원세개에 대하여 그는 국사에 참여하지 않고, 집안일만 열심히 했다.

 

유럽에서 엄수는 잠시 원세개를 피한다. 그러나 시정(인프라건설)문제는 주의를 한다. 그리고 시정은 교육과 함께 중시해야 한다고 보았다. 중국은 외국의 시정을 본받아야 한다고 하며, '천진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국내에서 시사를 논하는 사람들이 프랑스혁명과 중국을 나란히 언급하면서, 프랑스의 시정에 대하여는 본체만체하며, 그저 혁명만 논하고, 시정은 논하지 않고, 그저 당쟁만 하며 도시건설은 논하지 않는데 대하여 비판했다.

 

원세개는 여러번 엄수에게 귀국하여 그의 대정을 도와달라고 한다. 그러나 엄수는 원칙을 지키는데 있어서는 거의 인정머리가 없는 수준이었다. 그는 확실히 거절한다. 이로 인하여, 그는 원세개의 '공화'와는 선을 긋게 된다.

 

원세개의 '공화'는 득촌진척(得寸進尺)했다. 먼저 내각제를 총통제로 바꾸더니, 그 후에는 자신이 종신총통에 오른다. 그걸로도 부족해서, 그는 국체를 바꾸어 민주국을 군주국으로 바꾸어 버린다.

 

양계초는 엄수를 만나서 그에게 얘기한다. 얼마전에 원세개 부자가 그를 경교의 탕산에서 만나자고 하고, 양도가 배석하였는데, 그때 공화제는 중국의 국정에 맞지 않는다고 했다.원극정은 양계초에게 국체를 변경하는데 관한 의견을 구했다. 양계초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평생 정체(政體)를 연구했지, 국체(國體)에 관해서는 건드리지 않았다."

 

다음 날, 양계초는 일가족을 데리고 천진 조계로 간다. 원극정은 양계초를 보낸 후, 여전히 탕산에서 양사이(梁士詒)를 만난다. 그는 양사이에게 직접적으로 물었다. 그가 황제제를 추진하는데 도와주겠느냐고. 양사이는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고, 즉시 교통부문의 회의를 개최하고 성명을 발표한다: "황제제에 찬성하는 것은 체면이 없어지고, 반대하면 목이 없어진다. 어떻게 할 것인가? 전체 표결을 거친 후 원극정의 편에 선다. 그는 머리가 중요했지, 얼굴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원세개의 '국사'에 대하여 관여하지 않던 엄수는 이번에는 머리를 내놓았다. 그는 진언한다: 대통총을 위하여 생각해보건데 국체를 바꾸지 않으면 망하지만 위인의 풍모는 잃지 않는다. 국체를 고쳐서 망하면 안으로는 스스로의 마음에 할 말이 없고, 밖으로는 국민에게 없으며, 위로는 청나라의 여려 조종에 할 말이 없고, 아래로는 천추만대에 할 말이 없다.

 

진언을 마친 후에도 원세개는 답을 하지 않는다. 엄수는 직접 만나서 간언하기로 결정한다. 집안 사람들은 깜짝 놀라서, 불측의 사태가 날지 모른다고 두려워했다. 그는 담담하게 말한다: 대국을 위하여 난국의 근원을 막고자 함이고, 옛 친구를 위해서 충고하자는 것이다. 삶과 죽음은 두려울 게 없다. 엄수는 원세개를 만난다. 그러나 서로 생각이 달라 말이 통하지 않는다.

 

엄수는 선명한 기치를 내건다; 만일 황제제를 시행하면, 명예는 망언이고, 절의는 허언이다. 만일 추진하게 되면 각파의 인사들이 서로 흩어져 버릴 것이다. 그러나 원세개는 아예 듣지를 않는다. 그리고 엄수에게 조용히 물러나라고 암시한다. 엄수는 절대로 타협하지 않았고, 절교를 선언하고, 떠나버린다. 원세개와는 더 이상 교류하지 않는다. 그는 전통선비의 절개로 자유, 민주의 존엄을 보위했다.

 

양계초도 말을 한다. <이재소위국체문제자>라는 글이 각 신문에 실리고, 세상사람들이 앞다투어 읽어본다. 엄수는 크게 감동을 받는다. 그리하여 양계초에게 서신을 보내어 그 글을 칭찬한다: '중국제일인문학이다."

 

원세개는 83일간 황제로 지낸다. 엄수는 신문을 읽어보고 원씨가 이미 황제제를 취소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기차를 타고 북경으로 간다. 중남해에서 원세개를 만나고, 원세개에게 국가를 위하여, 그리고 개인을 위하여 총통직을 사임하라고 말한다. 그는 원세개가 총통을 하는 것을 적절하지 않다고 보았었다. 아예 이번 기회에 총통 직무를 내놓는게 낫다고 생각했다.

 

원세개는 여전히 환상을 품고 있었다. 스스로 황제제를 취소했으니, 게속 총통으로 지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책임내각제를 회복시킨다고 선언하고, 대통통을 할 수 없다면 소총통이라고 하고자 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그는 이미 거래할 자격이 없었다. 자리를 탐하면 할수록 사람들은 그를 더욱 멸시했다. 그의 옛 부하들조차도 그는 체면이 땅바닥에 떨어졌다고 여겼다. 풍국장도 그에게 물러날 것을 권한다. 그제서야 원세개는 절망한다.

 

원세개는 자신에게 최후가 다가왔다고 여기고 유언을 구술한다: 총통은 여원홍이 되어야 한다. 나는 병이 나으면 창덕(彰德)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겠다. 그러나 창덕으로 돌아간 것은 그의 영구였다.

 

엄수는 북경에서 하남 창덕으로 영구를 호송하고 매장까지 따라가며, 삼국궁례를 행한다. 일대효웅은 이렇게 흙에 묻혔다. 겨우 두 세명의 지기들만이 그의 마지막을 배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