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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송)

애산해전(崖山海戰): 송나라의 비장한 최후

by 중은우시 2017. 10. 1.

글: 강생연(姜生淵)


1279년, 애산(崖山), 바다에서 파도는 거칠었고, 바닷바람소리는 드높았다.


좌승상 육수부(陸秀夫)는 처자식이 울고불고 하는데도, 그들은 바다로 밀어넣었다. 그 후에 몸을 돌려 나이 겨우 7살 된 송회종(宋懷宗)에게 말한다: 나라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폐하는 마땅히 나라를 위하여 죽어야 합니다. 덕우황제가 이미 큰 치욕을 겪었는데, 폐하께서도 다시 그런 치욕을 겪을 수는 없습니다. 송회종이 무슨 대답을 하기도 전에 육수부는 황제를 등에 업고, 몸을 던져 차가운 바닷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어린 황제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애산의 십만 백성은 바다에 몸을 던져 순국한다. 일시에 애산의 해역에는 십만의 시체가 떠올랐다. 





조광윤이 진교병변으로 황포가신한 때로부터(960년) 이때까지(1279년) 320년간 존속하던 대송왕조는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된다.그중 정강지변을 경계로 하여, 북송 168년, 남송 152년이다. 옛날 대송황제들이 개국할 때 산하를 삼킬 것같은 기세는 잊 남송 망명정부가 계속 패퇴하여 애산에서 이렇게 끝나다니 처량하기 그지없다. 후인들은 이때의 역사를 읽을 때면 가슴이 아프고 눈물이 나오게 된다. 그러나, 대송황제가 대송왕조가 망하기 직전에, 국가를 위하여 천하를 위하여 싸웠던 애국지사들의 정신은 애산 상공의 번개처럼, 짙은 먹구름을 걷어내고, 광풍노후, 대우표발의 애산상공에서 콰콰쾅 하는 소리를 내며 울린다.


1274년, 송함종 10년, 원세조 쿠빌라이는 백안(伯顔)을 남정군 총사령관에 임명하고 20만대군을 이끌고 송나라를 토벌하게 한다. 병력이 남송의 도성인 임안으로 진격했다.


멍청한 남송정부는 간신 가사도(賈似道)를 보내어 13만대군을 이끌고 장강의 양안에 군사를 배치시키게 한다. 결사전을 벌일 태세였다. 원나라군대의 진공앞에 가사도는 맞이하여 싸울 생각은 전혀 없었고, 아예 싸우지도 않고 도망친다. 원나라군은 승기를 틈타 150이를 추격하여, 송군의 전선 2천여척과 군수물자와 기계를 수도없이 획득한다. 송군이 보유한 정예부대는 이 전투에서 거의 몰살당한다. 이어진 1년여의 기간동안, 남송정부는 마치 썩은 고목과도 같이 백안의 대군앞에 파죽지세로 밀렸다.


1276년 2월, 나이 겨우 10살된 송공종(宋恭宗)은 임안에서 나와 원나라에 투항한다. 정강지변때 포로로 잡혔던 송휘종, 송흠종과 마찬가지로, 송공종, 후궁, 종실은 모조리 원나라의 대도로 압송된다. 이는 남송의 '멸망'을 의미한다. 그러나 천하의 지사들은 여전히 남아 있었고, 원나라에 저항하는 세력도 여전히 존재했다.


원나라군대가 송공종과 후궁을 데리고 과주(瓜州)에 이르렀을 때, 양주의 수비장수 이정지(李庭芝)는 송공종을 다시 빼앗아오려고 한다. 4만의 무리로 과주의 원군을 야밤에 기습한다. 원군은 버티지 못하고, 송공종을 데리고 도망친다. 송군은 승기를 틈타 추격하나 송공종을 빼앗아오지는 못한다. 원곤은 송공종을 핍박하여 조서를 내리게 한다. 이정지에게 투항을 명하는 것이다. 이정지는 셩벅에 올라서 정기늠름하게 소리진다. 목소리는 큰 종이 울리는 것같았다. "명을 받아 성을 지키는데, 투항하라는 조서는 들어본 적이 없다 그리고는 끝까지 투항하지 않는다. 원세조 쿠빌라이는 재능있는 인물을 아껴서 친히 조서를 내린다. 이정지로 하여금 투항을 권유하는 것이다. 이정지는 조서를 불태후고 사자로 온 자를 참살한다.


가천하(家天下)의 봉건왕조에서 황제가 있으면 신하는 황제를 위하여 성을 지킨다. 이제 황제가 없는데, 이정지는 누구를 위하여 성을 지키는가? 답은 단지 한 가지이다: 백성들을 위하여 성을 지키는 것이고, 천하를 위하여 성을 지키는 것이고, 민족기개를 위하여 성을 지키는 것이다!


송공종이 포로로 잡힌 후, 장세걸(張世傑), 육수부등은 송공종의 형인 조하(趙昰)를 천하병마도원수로 모시고, 송공종의 동생인 조병(趙昺)을 부원수로 모시며, 여러 의군(義軍)을 모집한다. 그리고 조하를 황제로 세우니 역사에서는 송단종(宋端宗)이라 한다. 남송망명정부가 건립된 것이다. 


남송망명정부가 성립된 후, 우승상의 자리는 이정지를 위하여 남겨놓는다. 동시에 이정지로 하여금 입조하라고 조서를 내린다. 이정지는 입소하는 도중에 불행히도 원군에 포로로 잡히고, 굴하지 않다가 죽음을 맞이한다.


1276년, 재상 겸 추밀사인 문천상(文天祥)은 남송조정의 대표로 원나라 남정대장군 백안과 의화(議和)한다. 문천상은 원군이 먼저 평강 혹은 가흥까지 물러날 것을 요구했다. 그 후에 세폐(歲幣)를 논의하자는 것이다. 약한 나라에는 외교가 없다. 백안은 아예 그의 말을 무시했고, 문천상을 압송해서 북방으로 보낸다. 도중에, 문천상은 다행히 도망칠 수 있었다. 그리고 나중에 강회(江淮) 및 온주(溫州) 일대에서 병력과 말을 모아 계속 원나라에 항거한다.


1277년초, 문천상은 매주(梅州)를 수복하고 강서(江西)로 공격해 들어가서 회창(會昌)을 수복한다. 육월, 문천상은 강서에서 원군을 겨퇴하고 길주(吉州), 감주(赣州)의 속현을 수복하고, 감주를 포위한다. 일시에 반원군은 기세가 오르게 된다.


그러나 어쨌든 전투는 문천상이 잘하는 분야가 아니다. 원나라의 강서선무사 이항(李恒)이 문천상을 패배시킨다. 이 전투에서 문천상의 처자식은 모두 원군에 포로로 잡힌다.


전투실력으로 보거나, 구국존망으로 보거나 문천상은 종택(宗澤), 악비(岳飛)와는 비교할 수도 없고, 심지어 오계(吳階), 맹공(孟珙)에도 비치지 못한다. 다만 문천상은 일종의 정신적 상징이다. 특히 이 국가가 존망의 위기에 처하고, 산하가 무너질 위기에 처하고, 사직이 무너지려는 난세에, 문천상의 정신은 더더욱 진귀하다. 천백년이 흐른 후, "인생자고수무사(人生自古誰無死), 유취단심조한청(留取丹心照汗靑)"의 싯구는 중화민족 정신시계에서 가장 찬란한 등탑과도 같이 천년의 세월을 넘어 중화민족이 전진해야할 방향을 비춰주고 있다.


문천상이 전투에서 패배한 후, 원나라군대는 계속하여 남하한다. 장세걸은 송단종을 데리고 바다를 건너 도망친다. 육개월후, 나이 겨우 10살인 송단종은 망명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치는 도중에 사망한다.


이때의 황제는 그저 깃발이다. 그저 황제가 있으면 남송이 있는 것이고 천하는 아직 망하지 않은 것이다! 장세걸, 육수부는 다시 송단종의 동생인 조병을 황제로 모신다. 그가 바로 역사에서 말하는 송회종이고 나이 겨우 7살이었다. 


원군이 계속하여 압박해오자, 그들은 송회종을 조주(潮州) 천만(淺灣)으로 옮겨간다. 거기서 해상으로 도망칠 준비를 했다. 몇개월후, 장세걸, 육수부는 어린 황제를 데리고 잔여 수군을 이끌고 애산에 주둔한다. 거기서 행궁 20칸을 세우고, 군옥 3천칸을 세운다. 


장세걸과 육수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애산이라는 좁은 곳에서 원군에 대항하는 것은 말도 안된다는 것을. 남송의 방대한 토지로도 원군의 철기를 막아낼 수 없었는데, 하물며 자그마한 애산이야 더 말할 것도 없다. 다만 이때, 승패는 이미 중요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패배는 이미 정해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실패의 앞에 어떤 선택을 할 것이냐였다. 민족기개를 위해 전쟁터에서 죽을 것인가. 아니면 구차하지만 연명하기 위해 무릎을 꿇고 투항할 것인가? 소위 기개는 바로 안된다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하는 것이다. 결국 머리가 깨지고 피를 흘리고 분신쇄골하는 것도 각오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애산해전은 실패가 정해진 전투였다. 다만 이번 전투의 의의는 결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쟁 자체에 있는 것이다.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애산해전은 충분히 전쟁사상에 농후한 일막을 남길 수 있게 된다.


장세걸은 천여척의 전선을 바닷가에 닻을 걸고, 배와 배를 끈으로 묶어서 연결시키낟. 그리고 어린 황제는 큰 배에 살았다. 이런 배치는 비록 견고하지만, 전선의 기동에는 불리하다. 만일 배 한척이 전복되면, 반드시 몇 척이 같이 침몰하게 된다. 장세걸은 수군을 여러 해동안 경영해왔는데 어찌 이를 모르겠는가? 다만 이때, 그는 다른 선택이 없었다. 혹은 그는 이미 패전하고 순국할 결심을 굳힌 것이다.


원군은 화공전술을 선택한다. 먼저 작은 배에 불에 타는 물질을 싣고 보낸다. 그리고 그 후에 그 배에 불을 붙인다. 이것이 바로 삼국시대 주유가 적벽대전에서 조조를 이길 때의 방식이다. 장세걸은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 송군은 모조리 축축한 진흙을 발라둔다. 그래서 원군의 화공은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


원군은 밀물이 들어왔을 때, 장세걸의 배후에서 상륙하여, 앞뒤에서 협공한다. 여기에 송나라의 장병은 이미 바다 위에서 며칠을 떠 있다보니, 보급이 곤란했고, 여러날동안 물을 제대로 마시지 못했다. 그래서 사병들의 체력이 아주 허약해져 있었다. 장세걸은 앞뒤에서 적을 맞이하게 되니 이미 대세가 기울었다는 것을 알았다. 황제를 잘 보호해야겠다고 중군으로 가서, 황상을 데리고 포위망을 돌파하고자 했다. 다만 육수부는 동의하지 않았다. 장세걸은 그저 16척의 전선을 이끌고 포위망을 돌파했다.


원군의 계속된 압박으로 남송의 마지막 전선이 계속하여 패배하는 것을 보고, 육수부는 대세가 기울었다고 여긴다. 마음 속으로 포기하고 이 글의 제일 앞부분에 언급한 장면을 상연한다.


책을 읽으면, 대송왕조가 애산에서 보낸 비장한 최후를 알 수 있다. 바다에서 파도는 거칠었고, 바닷바람소리는 드높았다. 애산의 십만 백성은 바다에 몸을 던져 순국한다. 일시에 애산의 해역에는 십만의 시체가 떠올랐다. 


그들의 생각에 천하의 흥망은 필부도 책임이 있다. 천하가 이미 존재하지 않는데 필부가 무슨 면목으로 살아갈 것인가?


장세걸은 포위망을 돌파한 후, 소황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마음 속을 비통해하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조씨를 위하여, 할 수 있는 힘을 다했다. 황제가 한 명 죽으면, 다시 한 명을 세우면 된다. 어찌 망했다고 할 것인가. 내가 구차하게 살아남은 것은 그저 적군이 물러난 후, 다시 조씨를 세워서 사직을 유지하려고 한 것이다. 이제 바람과 파도가 이러하니,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랴. 그리고는 바다에 몸을 던저 자결한다.


인인지사, 충심의담으로도 상황을 되돌릴 수 없었다.


봉건왕조로서 자신의 역사무대에서의 사명을 완성하면, 반드시 최후가 있기 마련이다. 대송왕조로 보자면, 마지막 장면은 문천상, 육수부, 장세걸, 이정지같은 민족영웅이 있기 때문에 멋질 수 있는 것이다. 천하존망의 순간에, 그들이 보여준 정신은 번개처럼 순간적으로 눈부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