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냉열군사사(冷熱軍事史)
12세기초, 완안아골타(完顔阿骨打)는 2500명을 이끌고 거병하여, 동북지구의 여진족 부락을 통일하고 대금왕조(大金王朝)를 건립한다. 대다수의 (반)유목민족과 마찬가지로, 여진인들은 용맹하고 무를 숭상하며 기마와 궁술에 능했다. 12년의 짧은 기간만에 그들은 요(遼)와 북송(北宋) 두 제국을 정복한다.
13세기 상반기, 일찌기 신화처럼 신속히 굴기했던 여진인들은 신속히 쇠락한다. 몽골과 남송의 연합공격에 이십여년을 넘기지 못하고 금왕조는 멸망한다. 여진인들은 왜 신속히 쇠망하였을까? 이는 그들이 생존을 의존했던 맹안모극제(猛安謀克制)와 큰 관계가 있다.
맹안모극은 처음에 여진족 부락의 연맹조직이다. 이 조직은 평상시에는 농사짓고 사냥하고 고기를 잡다가, 전쟁시에는 동원되어 전쟁에 참가한다. 여진의 굴기과정에서 일종의 군사와 행정이 합일된 조직이 된다.
맹안모극호는 군호(軍戶)로 병역의 의무가 있다. "맹안(猛安)"의 원래 뜻은 "천(千)"이고, 군대의 천부장(千夫長)을 가리키기도 하고, 천부장이 지휘하는 부대단위를 가리키기도 한다. 모극(謀克)은 백부장(百夫長) 및 백부장이 지휘하는 부대단위를 가리킨다. 모극의 아래에는 오십부장(五十夫長), 십부장(十夫長), 오부장(五夫長)이 있고, 맹안의 위에는 만부장(萬夫長)이 있다. 모두 6급의 편제를 가지고 있다. 이론적으로 맹안은 10개의 모극 즉 1천명을 지휘하고, 1모극은 100명이다. 실제상황은 정원을 채우는 경우가 드물었다. 특히 금왕조 후기에는 더욱 그러했다.
맹안모극의 편제하에서 하급사병은 갑군(甲軍, 정규군)과 아리희(阿里喜)로 나뉜다. 갑군은 몸에 갑옷을 입은 정규군이다. 아리희는 갑군의 조수(助手)이다. 일반적으로 갑군은 체격이 건장하고 아리희는 비교적 약하다. 그러나, 일본학자 삼상차남(三上次男)은 갑군과 아리희는 신체가 강한지 약한지 여부로 구분한 것이 아니라, 신분관계였다고 한다. 예를 들어, 부자 혹은 형제였다는 것이다.
파죽지세로 요, 북송군을 무찌른 여진 정예기병은 바로 맹안모극호에서 나왔다. 사실상 금왕조의 중앙에 직속하거나 지방에 주둔하는 정규군은 모두 각지에서 둔전하는 맹안모극호중에서 뽑아서 선발한 것이다.
부락시기와 금왕조 초기에는 여진인들의 천성이 순박하고 강건했다. 상무전통으로 사냥하면서 포위공격하는 것을 전쟁의 진법으로 하였고, 말을 타고 활을 쏘며 공을 치는 것으로 훈련하는 전통이 있었다. 금왕조의 군사확장과 더불어 맹안모극호는 요왕조의 영지내로 이주하고, 거란인, 해인(奚人), 발해인(渤海人)과 요동지구의 한인(漢人)도 망안모극군에 편입되었다. 그런나, 간단화되고, 군정합일인 맹안모극제는 경제문화수준이 비교적 높았던 한족과 발해인사회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나중에 이 두 민족의 맹안모극제는 모두 폐지된다. 금태종 전기에 여진인의 맹안모극군은 개략 15만명 정도였다.
북송을 멸망시킨 후, 금왕조가 세운 허수아비왕조인 초(楚), 제(齊)의 두 한인괴뢰정권은 근본적으로 남송과 싸울 능력이 없었다. 여진인들은 전략을 바꾸어, 중원의 한족지구에 대하여 직접통치하기로 한다. 금태종 말기, 금희종 시기부터 시작하여, 많은 맹안모극호는 중원 한족지구로 이주하여, 중요지점에 주둔하여 방어한다. 금왕조는 맹안모극호에 토지를 내리고, 군사둔전을 실시하고, 한인을 통제한다. 이렇게 하여 원래의 사회구조에서, 일종의 특권을 향유하는 지주와 노예주계층이 증가한 것이다. 1183년의 한 기록을 보면, 매 맹안모극호는 전지9田地) 275무(畝), 노예 2.2명을 보유하는데, 세금부담은 한인농민의 1/44에 불과했다.
황제를 죽이고 그 자리를 빼앗은 해릉왕(海陵王) 완안량(完顔亮)은 남송을 토벌하기 위하여 대거 병력을 모은다. 여진, 거란과 해인중에서 맹안모극군 27만을 동원한다. 이는 아마도 금왕조의 맹안모극군의 수량에서 최고점이라고 할 것이다. 해릉왕이후의 금세종시기에 맹안모극군의 총병력은 20만명가량을 유지한다.
[참조: 재위기간]
금태조 1115-1123
금태종 1123-1135
금희종 1135-1149
해릉왕 1149-1161
금세종 1161-1189
금장종 1190-1208
위소왕 1208-1213
금선종 1213-1223
금애종 1223-1234
거란인은 순수한 유목민족이다. 요나라가 건립된 후, 비록 한인이 비교적 많은 지역을 많이 통치하였지만(예를 들어 연운십육주와 요동지구), 목축업이 여전히 주도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고, 정치적으로는 초원본위를 유지했으며, 기껏해야 거란인과 한인을 분리하여 통치하는 이원제를 실시했다.
동북지구에서 나고 자란 여진인은 농경에 적합한 비옥한 흑토(黑土)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초원, 하류, 삼림이 많았다. 유목, 농경과 수렵이 혼합된 반유목민족이다. 완안씨부족연맹후기와 건국초기, 여진의 농업경제는 비중이 이미 목축업을 초과했다. 그들은 농업문명의 한인과 생활방식의 차이가 그다지 크지 않았다. 상대적으로 말해서 한인문화를 받아들이기 용이했었다. 금희종에서 해릉왕시기에 금왕조는 한지본위(漢地本位)를 확립한다. 이는 수도가 중원한지로 이주한데서 가장 잘 드러나 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긐태종시기, 상경회녕부(지금의 하르빈)에서 연경(지금의 북경)으로 천도할 생각이 있었다. 금희종은 일찌기 연경에 8,9개월간 주둔한다. 금희종때 많은 한제(漢制)개혁조치는 바로 연경에서 만든 것이다. 해릉왕이 즉위한 후, 의연히 연경으로 천도한다. 천도는 일부 여진귀족의 반대에 부닥치나, 해릉왕은 아주 결연한 조치를 취한다. 회녕부의 옛 궁전과 귀족의 저택을 부숴버린 다음 밭으로 만든다.
해릉왕은 남송을 멸망시킨 후에는 개봉(開封)을 수도로 삼을 생각까지 한다. 비록 그가 표면적으로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송왕조의 문헌을 보면, 당시 남송의 조야여론은 보편적으로 금왕조가 개봉으로 천도한다는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금희종시기에 맹안모극제이외에 금왕조의 중앙관제, 지방행정제도, 법률제도, 예의, 종묘제도등은 모두 한제(漢制)로 바뀐다. 여진이 전통적인 구제도는 대부분 폐기된다. 해랑왕은 연경을 수도로 정하는데, 이는 금왕조의 한지본위(漢地本位)가 완전히 확립되었음을 의미한다. 금왕조의 한화(漢化)는 황제가 추진했다. 한족문화를 가장 빠르게, 받아들이고, 한화정도가 가장 심화된 사람은 바로 황제와 귀족이었다.
금왕조의 황제중에서 금희종부터는 모두 상당히 높은 한문화소양을 지니고 있었다. 송희종은 '어려서부터 문사(文辭)를 좋아하고....그가 놀러가는 곳은 모두 문묵지사(文墨之士)들이었다" 이런 성장환경은 금방 그의 문화적 선택을 결정한다. 금희종은 나중에 한제개혁을 적극 추진하였는데, 그게 이상할 것도 없다. 해릉왕의 한화정도는 금희종과 비슷하다. 그도 어려서부터 '경사(經史)를 읽기를 좋아하고, 한번 읽으면 평생 잊지 않았다. 강남의 의관 문물 조의가 좋은 것을 보고 부러워했다." 해릉왕이 대거 송을 토벌하려 한 것도 강렬한 '통일왕조'이 한족 정치관념때문일 것이다.
긍희종과 해릉왕이후의 금왕조 황제 중에서, 금장종의 한화정도가 가장 뛰어나다. 그의 한학 기초는 아주 튼튼했고, 문예와 음율에 정통했으며, 한족 천자와 비교하더라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원나라때 이런 말이 있다. "제왕중 음율을 아는 사람은 5명이다: 당현종, 후당장종, 남당후주, 송휘종, 금장종."
실제로 금세종과 금장종 시대에, 황제이건 귀족이건, 보통 여진족이건 모두 한문화의 영향을 깊이 받고 있었다. 금왕조 건국초기에 여진인들은 일반적으로 한어를 몰랐고,한문을 읽지 못했다. 그래서 한인을 통역으로 세웠다. 그런데 금세종 대정연간에 이르러서는 여진인들이 이미 보편적으로 한어를 말할 수 있었다. 오히려 여진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은 계속 감소했다. 특히 상층사회에서 더욱 그러했다.
비록 금세종과 금장종(비록 한학의 조예가 깊었지만)이 여진문화부흥운동을 일으켰고, 여러가지 조치를 취하여 여진인들의 질박하고 상무적인 민족전통을 되살리려 했지만, 당시에 한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은 이미 보편화된 사회기풍이 되어 있었다. 한무화는 막을 수 없는 역사조류가 된다.
한문화조류의 충격하에, 여진인의 맹안모극제만 잘 굴러갈 수는 없었다. 그러나, 보통의 맹안모극호는 황제나 귀족처럼 한인의 학술문화와 예술을 그다지 부러워하지 않았다. 그들이 바꾼 것은 모생수단과 생활방식이었다. 전답과 노예를 보유한 맹안모극호는 많은 경우 토지를 한인들에게 빌려주고, 그들은 가만히 앉아서 지조(地租)를 받았다. "농사지을 줄 모르고, 모여서 술마시고 도막했으며 게으르게 지내는 것이 사회적인 분위기로 된다" 장기적으로 이렇게 하다보니, 여진인들의 체질은 하락, 사냥전통도 사라지며, 군대의 전투력은 자연히 몰락하게 된다.
해릉왕 말기, 여진인들이 가장 잘하는 말타기, 활쏘기가 현저히 퇴화한다. 점점 남송의 사병만도 못하게 된다. 1168년(금세종시기) 금나라조정은 맹안모극중에서 시위친위군을 뽑는다. 그런데 그들중 많은 사람은 활을 쏠 줄 몰랐다. 금, 송 양국의 사절이 상호 왕래할 때, 관례에 따라 사궁연(射弓宴)을 연다. 쌍방은 연회에서 활을 쏘아 승부를 결정짓는 것이다. 금왕조 전기에 여진인들이 이기는 경우가 많았고, 지는 경우는 적었다. 금세종이후 승부는 역전된다. 위소왕 조정에서 거행된 사궁연에서 금왕조의 전전우위장군 완안수영(完顔守榮)은 연속 여러발을 쏘았으나 여러번 적중하지 못하기도 했다.
금세종때는 여진진사(進士)를 둔다. 원래는 여진문자를 보급하고 여진문화를 부흥시키려는 것이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금장종 시대에 이르러, 많은 세습무직인 맹안, 모극은 무(武)를 버리고 문(文)으로 돌아서서 진사시험을 치게 된다. 그리고 군대내에서 문학을 잘하는 맹안, 모극이 많았으니, 한화정도가 얼마나 심했는지 알 수 있는 현상이다.
금세종때 섬서군대에 신병을 보충하는데, 관례에 따라 맹안모극호의 임무를 맡을만한 갑군(금군의 전투주력)의 자제들 중에서 뽑는데, 그들은 사람이 많으나 쓸 만하지 못했다. 그래서 군대내에서 비교적 체력이 약한 아리희 중에서 보충한다. 금세종 대정10년, 송나라의 사신이 돌아가는 길에 여진인이 사적으로 자신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옛날에는 전투가 있다고 하면 모두 흥분했는데, 지금은 모두 군대에 가는 것을 겁낸다." 여진인의 정신상태가 전쟁을 좋아하는 것에서 전쟁을 싫어하는 것으로 바뀐 것이다.
금선종 시대에 이르러, 여진인들은 "말타고 활쏘는 것을 배우지 않고, 군대에 가지 않는다"는 것이 보편적인 상황이 된다. 맹안모극제는 붕괴의 길에 접어든 것이다.
전투력이 급격히 하락하는 것과 반비례하여 금나라군대의 장군은 많았다. 그래서 양이 10마리이면 양치기가 9명이고, 조직이 머리만 커졌다. 금나라초기 원수의 아래에 일반적으로 만부장이 있고 가끔 도통(都統)직을 두었다. 후기에 이르러서는 원수와 만부장의 사이에 편제된 직급이 갈수록 많아진다. 여기에는 부통(副統), 도통(都統), 부제공(副提控), 제공(提控)등의 직급이 그것이다. 심지어 병력을 지휘하지 않는 만부장과 도통까지 나타난다. 이를 보면 장군과잉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금나라군대의 편제는 갈수록 많아진다. 그런데, 각급 편제단위아래의 병력을 갈수록 적어진다. 이것은 부분적으로 군인이 될만한 조건을 갖춘 맹안모극호의 수량이 심각하게 부족하다는데서 기인하는 것이다. 금선종시대에 한 명의 모극은 25명을 지휘한다(마땅히 100명이어야 한다), 한 명의 맹안은 4명의 모극, 즉 100명을 지휘한다(당연히 1000명이어야 한다). 한 명의 만부장은 겨우 수백명을 지휘한다(원래는 1만명이어야 한다). 도통직급도 수천명을 지휘할 뿐이다. 고위직으로 가면갈수록 장군이 통솔하는 병력수는 유명무실해진다.
금나라 중후기에 맹안모극제는 날로 쇠락하여 붕괴지경까지 간다. 여진인들의 말타기 활쏘기 무예는 상실되고 군관의 편제는 비대해지고, 병력을 부족해진다. 금왕조 말기에 신속히 궤멸되고 멸망한 것도 당연한 일이다. 다만, 과정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여진의 기병이 만회가 불가능할 정도로 쇠퇴하고난 후, 금나라조정은 대규모로 여진인 이외의 군대를 모집한다. 그중 한 곳은 규인(乣人)이다. 금나라변방의 비여진인 유목부락이다. 또한 일부 해인(奚人)과 거란인도 포함된다. 금나라초기에 이미 규인으로 군대를 구성하고, 규군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중후기로 넘어가면서 금나라조정은 갈수록 규군에 의지하게 된다. 테무진은 일찌기 규군의 장교를 지낸 바 있다.
규군은 전투에 용맹하지만, 쉽게 반란을 일으켰다. 왜냐하면 금나라조정이 원래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수단으로 썼기 때문이다. 즉 규군을 이용하여 복종하지 않는 부족과 부락을 정복하였다. 시기만 도래하면 규군도 반란군이 될 수 있다. 금장종 태화말년, 금왕조는 3만의 규군기병을 주력으로 하여 남송과 전투를 벌인다. 전쟁이 끝난 후 규군은 하사받은 상에 불만을 품고 몽골로 도망간다.
몸골군의 맹렬한 공격하게 금선종은 1214년 어쩔 수 없이 개봉으로 천도한다. 도중에 수행하던 일부 규군이 반란을 일으키고, 진압하러온 금나라군대를 격패시키고 몽골에 투항한다. 그리고 몽골군대와 힘을 합쳐서 금왕조의 중도(즉 연경)을 공격한다. 중도가 함락되자 금왕조는 몽골군에게 허리가 잘린 형국이 되고, 동북과 관내는 서로를 돌봐줄 수 없게 된다. 금왕조는 북방영토를 회복할 수 없게 되고 그저 황하이남, 회하이북의 협소한 지역에서 연명해야했다.
규군에 의지할 수 없게 되자, 믕골과이 전쟁에서 여진기병은 손실이 심각했다. 금나라조정은 다시 "충효군"을 조직한다. 몽골은 황하이북에서 매우 잔혹하게 통치한다. 그래서 더 이상 참지 못한 회흘, 강, 혼 부락과 중원인은 속속 금나라로 도망친다. 충효군은 바로 이들로 구성된 군대이다. 충효군은 규군과 마찬가지로 정예기병이다. 다만 인원수가 비교적 적었고, 매번 참전하는 인원은 천명을 넘지 않았다.
금과 몽골의 전쟁 후기에 대창원, 위주, 도회곡, 귀덕등의 전투에서 충효군은 모두 참여하여 몽골기병을 격퇴시킨다. 그리고 적은 인원으로 많은 상대를 이기는 사례를 만든다. 그러나 충효군은 어쨌든 인원이 적었다. 이들로 국면을 바꿀 수는 없었다. 몽골군, 송군이 연합공격하는 채주성 포위전에서 충효군은 모두 물에 몸을 던져 자살하거나, 죽을 때까지 싸워서 비장한 일막을 보여준다.
여진인의 전면적인 한화, 맹안모극제의 붕괴, 강대한 몽골기병과 상대하는 것, 금나라군인의 삶을 탐하고 죽음을 검내는 것으로 인하여 형편없이 무너진다. 금나라군대가 의지하던 규군과 충효군은 국면만회를 꾀했으나 겨우 멸망을 지연시켰을 뿐이고, 결국 국면을 뒤집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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