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송)

송나라때의 도굴사건기록

중은우시 2017. 6. 30. 12:41

글: 노채적채원자(老蔡的菜園子)


송나라때의 문인필기 <동헌필록(東軒筆錄)>과 <곡유구문(曲洧舊聞)>에는 모두 한 가지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즉 원풍원년(1078년, 송신종연간) 도굴범이 하남 양적(陽翟, 지금의 禹州)에서 동시에 두 개의 묘를 발굴한 건이다. 도굴된 묘의 주인은 각각 장기(張耆)와 안원헌(晏元獻)이다. 이번 도굴사건은 후인들에게 많은 정보를 제공해준다. 거기에서 우리는 송나라때의 도굴수단, 매장문화, 그리고 도굴방지장치등등을 알 수 있다. 유일하게 유감스러운 점이라면 도굴범들의 미친듯한 보복으로 명신이 부관훼시(剖棺毁屍)를 당하고 죽어서도 편안하게 지내지 못해 읽는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는 점이다.


묘주인인 장기와 안원헌은 각각 누구인가? 장기는 아마도 사람들이 잘 모를 것이다. 그는 송진종(宋眞宗)의 친구이다. 어려서부터 송진종의 저택에서 같이 생활하였는데, 신분으로 따지면 송진종의 호위나 심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활을 잘 쏘았다. 어른이 되어 군대에 들어간 후에는 전공을 여러번 세운다. 거란인들과 칼과 창을 들고 맞써싸우던 욕혈분전의 용사이다. 일찌기 만군진에서 거란의 장수를 잡아죽인 적도 있다. 그는 병략도 알고, 지모도 있고, 관직이 송인종때는 추밀사에 이른다. 빈곤할 때 장헌왕후 유아(劉娥)를 도와준 적도 있어, 황제로부터 후한 대우를 받아 일생동안 부귀하게 지낸다. 경력8년 즉 1048년에 사망한다.


안원헌은 바로 안수(晏殊)이다. 원헌은 그가 죽은 후의 시호이다. "무가내하화락거(無可奈何花落去), 사증상식연귀래(似曾相識燕歸來)"와 같이 인구에 회자되는 송사의 작자이다. 송나라때 완약파(婉約派) 사종(詞宗)으로 북송의 저명한 정치가, 문학가이다. 그의 아들인 안기도(晏幾度)와 더불어 "대소안(大小晏)"으로 불린다. 안수는 소년신동으로, 14살에 경성으로 가서 과거시험을 본다. 재미있는 점은 과거시험을 치를 때, 시험지를 수중에 넣은 후 그는 시험관에게 문제를 바꿔달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 문제는 이미 그가 풀어본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대단한 인물 안수는 송진종의 호감을 얻어서 급제한 후에 관직이 재상에까지 이른다. 왕안석, 범중엄등의 명신들이 모두 그의 문하제자이다. 부필(富弼), 구양수,한기(韓琦)등도 그의 천거, 발탁을 받은 바 있다. 안수는 지화2년 즉 1055년에 사망한다.


이 도굴사건은 1078년에 발생한다. 즉, 안수가 죽은 후 겨우 23년이 지난 후이다. 이를 보면 송나라때 도굴범이 노린 것은 역대왕조의 고묘뿐아니라, 당대명인들의 묘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도굴장소는 하남 양적이다. 장기의 묘는 안수의 묘와 아주 가까이 있었다. 수리(數里)도 떨어져 있지 않았다. 두 사람은 왜 같이 양적에 묻힌 것일까? 장기는 원래 하남 사람이다. 그런데 안수는 강서(江西) 사람이다. 그런데 왜 하남 양적에 묻힌 것일까? 원래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아서 머리가 돌 지경이었지만 결국은 이유를 찾아냈다. 구양수가 편찬한 <안공신도비명>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안수는 확실히 "허주 양적현 맥수향의 북원(北原)"에 묻혔다. 그리고 <송사.안수>의 기록에 따르면, 그가 60세되던 해에 호부상서, 관문전대학사 지영흥군절도사(서안)를 지낸 후 하남부(河南府)로 전근임되고, 병으로 황제에 의하여 특별히 경성으로 돌아오게 허락받는다. 그러나 너무 시간을 오래 끌고 치료가 효과를 내지 못하여 임지에서 사망하고 만다. 이것이 아마도 하남 양적에 묻힌 이유일 것이다.


그렇다면, 도굴범은 왜 이 두 명의 당대명인의 묘를 노렸을까? 역사기록에 따르면 장기는 당대에 유명한 부호이면서, 무역에 능하고 장사에 능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도굴범의 눈에 땅속에 분명히 황금만냥은 묻혀 있을 것으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안수는 그러나 억울하다. 안수는 원래 검박한데, 도굴범의 눈길을 끈 것은 그의 묘앞에 황제가 친히 내려준 비문 "구학지비(舊學之碑)" 네 글자때문이다. 이것은 원래 안수의 일생을 개괄하는 영광스러운 문구인데, 도굴범의 눈에는 표지가 되어 버린 것이다. 실로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도굴범은 어떻게 이 두 명인의 묘를 도굴했을까? 도굴범들은 아주 총명했다. 구체적으로 장기와 안수의 묘소를 확인하는데, 안수의 묘는 확인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황제의 묘비가 바로 표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묘는 거리가 얼마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도굴범은 달이 뜨지 않는  밤에 두 묘의 중간지대에 직도(直道)를 판다. 이렇게 하여 사람의 눈을 속일 수 있었고, 또한 일거양득으로 두 묘에 그저 1곳의 도굴구멍을 파면 되었기 때문이다. 직도가 완성된 후, 다시 각각 양쪽으로 파들어간다. 지하에서 굴을 뚫고 들어가는 방식으로 두 곳의 묘에 손을 쓴다. 이는 아주 고명한 방향판단을 필요로 하는 일이고, 아주 뛰어난 지하작업을 요했다. 그렇지 않으면 방향이 틀어지게 되어 도로아미타불이 될 것이다. 이들 도굴범은 한편으로 굴을 파면서 한편으로 무너지지 않도록 단단하게 굳히는 작업도 했다. 이는 확실히 전문적인 도굴범이고, 수단이 아주 숙련되고 기술이 뛰어났다.


그렇다면 도굴범은 성공했는가? 결론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장기는 생전에 부호였으므로, 도굴범들이 먼저 발굴한 것은 장기의 묘이다. 겉으로 보기에 장기의 묘에는 아무런 도굴방지장치가 없는 것같았다. 도굴범들이 너무나 편하게, 장기의 묘를 열고나니 눈앞에 금은보화가 펼쳐졌다. 그렇게 장기의 묘는 깨끗하게 비워진다. 장기는 아마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생전의 부귀를 죽은 후에도 유지하고 싶었는데, 이렇게 알거지가 될 줄은. 죽어서 하나도 가져갈 수 없게 될 줄은. 장기의 묘에서 수확이 컸으므로 도굴범들은 기분이 좋아져서 열었던 관을 천청히 닫아주고, 나올 때도 다시 진흙으로 분묘를 막아주었다. 그렇게 해서 흔적을 전혀 남기지 않는다. 밖에서 볼 때는 원래의 모습 그대로인 것같았다.


이어서 도굴범들은 안수의 묘를 파기 시작한다. 안수는 생전에 아마도 도굴범들이 들어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같다. 그래서 방비를 해두었다. 도굴범들이 지하통로를 파다가 혼비백산할 도굴방지장치를 발견하게 된다. 그렇다면 어떤 도굴방지장치가 있었을까? 첫째는 연무(煙霧)이다. 묘도까지 파들어가자 황색의 짙은 연기가 일어난다. 아마도 독연(毒煙)일 것이다. 도굴범은 안에 오래 있지를 못했다. 산 닭과 산 오리를 가지고 여러번 시험을 해본 후에야 짙은 연기가 흩어진 묘도로 진입할 수 있었다. 둘째는 호묘수(護墓獸)의 부르짖음이다. 마치 병기가 부닥치는 소리같았다. 이는 도굴범들에게 들어오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같았다. 설마 송나라때 사람들이 이미 교묘하게 성학이론을 이용했단 말인가. 아니면 교묘하게 기관을 설치한 것일까? 도굴범들은 그리고 어떻게 이를 깰 수 있었을까? 처음에 도굴범들은 크게 놀라서, 누구도 감히 안으로 들어갈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나중에 제자를 불러서 안으로 들어가게 했더니 소리가 나지 않았다. 아마도 기관이 열리고나서 시간이 얼마 지나면 효과가 없어지는 것이었떤 듯하다. 셋째는 교묘하게 활인(活人)을 두었다. 도굴범이 횃불을 들고 묘혈로 들어간 후에 고개를 들어보니 의관을 제대로 입은 사람이 한쪽 귀퉁이에 단정하게 앉아 있었고, 계속 소리를 냈다. 도굴범들은 처음에 깜찍 놀랐는데, 나중에 한꺼번에 몰려가서 호미와 철추로 내려치니, 좌상은 쓰러진다. 그것은 아마도 나무나 돌로 만든 조각상이었을 것이다. 놀라운 점은 소리를 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슨 이치일까? 이들 도굴방지장치를 파괴한 후에 여러 도굴범들은 희희덕대며 웃었다. "안재상의 신기묘산도 이 정도뿐이구나!"


도굴범들을 그케 실망시킨 것은 이렇게 힘들게 온갖 어려움을 겪으면서 묘실로 들어섰는데, 안수의 묘에는 값나가는 것이 전혀 없었고, 모조리 평소에 쓰는 일상적인 도구들 뿐이었다. 그리고 모두 도자기같은 것들이었다. 도굴범들은 아무런 수확도 얻지 못하자 안수의 관을 열었다. 그러나 입고 있는 옷에서는 그저 나비가 나르는 것같았고, 겨우 나무로 만든 묘금지물(描金之物)만이 옥대를 대신하여 몸에 장식되어 있었다. 금은부장물은 모두 거두어보아야 몇냥이 되지 않았다. 이들 도굴범들은 실망한 나머지 본노를 안수의 시신에 풀었다. 뼈를 부수고, 시신을 불태워버린 것이다. 가련하게도 일대의 명신은 시신이 드러내져서 뼈가 부서져 버린 것이다. 그 광경은 참혹하기 이를데 없었다.


그렇다면 이 두 건의 귀신도 모르는 천인공노할 도굴사건이 어떻게 드러나게 된 것일까? 설마 송나라때의 문인 위야(魏野), 주변도(朱弁道)가 길거리에서 들은 이야기를 적은 것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사람의 계획이라는 것이 하늘의 계산만 못하다. 도굴범들이 장기의 묘에서 금은보화를 가득 얻어서 돌아와 한동안 숨어지내지만, 이익에 눈이 어두워 장기의 묘에서 얻은 금은보화를 팔아서 큰돈을 만지고자 한다. 이날 장기의 묘에서 나온 금우(金盂)를 얻은 자가 시장에 나가서 팔려고 하는데, 마침 매복하고 있던 사법관리에게 체포된다. 범인과 장물을 모조리 확보한 것이다. 그렇게 되자 도굴범도 더 이상 변명하지 못하고 모조리 자백하고 만다. 그리하여 이 놀라운 도굴사건이 결국 들통나게 된 것이다.


송나라때의 이 도굴사건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말해준다. 송나라때에 도굴이 이미 횡행했었다는 것이다. 당대명인의 묘까지도 거의 내놓고 도굴했다. 그리고 이들은 전문적으로 도굴을 했다. 불행하게도, 하남인들이 근현대에서와 마찬가지로 도굴의 조사야이다(하남인들을 폄하하려는 의도는 아니고 사실이 그렇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송나라때 이미 도굴방지장치가 있었다는 것이다. 다만 아직 완비되지 않았을 뿐이다. 일반적인 도굴범을 놀라게 할 수는 있지만, 전문적인 도굴범에게는 그다지 큰 작용을 못한다. 필자는 이들 도굴수단을 현대인들이 복원해볼 수 있을지에 대한 호기심이 있다. 셋째, 도굴범들은 금은보화를 얻게 해준 장기와 금은보화를 얻지 못하게된 안기에 대하여 서로 다르게 처리했다는 것이다. 나중의 장례문화에서 도굴범에게 약간의 돈되는 물건을 남기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선택이 된 것은 간접적으로 도굴이 기승을 부리게된 원인중 하나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