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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송)

송(宋)나라는 왜 장안(長安)이나 낙양(洛陽)을 수도로 삼지 않았을까?

by 중은우시 2017. 10. 20.

글: 목도도(木圖圖)


송나라의 건국은 후주(後周)의 정치유산을 승계하여 변량(汴梁)을 수도로 삼는다.다만 송태조 조광윤은 마음 속으로 변량을 도읍으로 하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개봉은 "사전지지(四戰之地)"로 방어할 천험의 험지도 없고, 공격을 쉬우나 방어는 어렵기 때문이다. 군사적으로 고려하면 확실히 수도로 삼을만한 좋은 후보지는 아니다. 도성을 수비하기 위하여 반드시 경사에 많은 병력을 배치해야 했다. 그리하여 비용이 많이 들었다. 개보9년(976년), 송나라의 개국으로부터 16년이 지난 다음에, 조광윤은 서경 낙양으로 조상에게 제사지내려 간다. 그리고 거기에서 근신들과 천도에 관한 논쟁을 벌인다.


원래 조광윤은 낙양 협마영(夾馬營)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낙양으로 천도할 생각이 있었다. 제사를 마치고서도 낙양행궁에 머물며 동쪽의 수도인 변량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수행한 신하들은 어떻게 해야할지름 몰랐다.


철기좌우상도지휘사(鐵旗左右廂都指揮使)인 이회충(李懷忠)이 진언한다: "동경은 변거(汴渠)라는 운하가 있고, 한해에 강회에서 쌀이 수백만곡이 옵니다. 도성에는 수십만의 병력이 지켜주고 있습니다. 폐하가 이 곳에 머물면, 어찌 안정되게 취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실로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이회충의 뜻은 동경이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고 수도로 적당하지 않더라도, 어쨌든 운하의 편리함이 있고, 매년 강회에서 양식 수백만석이 올라오며 경사에는 수십만의 병력이 모두 그것에 의지해서 먹고 산다. 폐하가 이렇게 낙양에 머문다면 어디에서 그렇게 많은 양식을 가져올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천도는 안될 말이다라는 것이다.


그러나 조광윤은 듣지 않는다: "황상은 그 말을 듣지 않았다." 황상의 생각을 바꾸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이때 송태조의 동생인 진왕 조광의가 담담하게 말한다: "천도는 안됩니다."


조광윤이 말한다: "낙양천도는 장기적인 계책이 아니다. 가장 좋은 것은 장안으로 천도하는 것이다."


조광의는 "머리를 조아리며 간했다." 송태조의 천도하려는 생각을 없애려고 결심한 듯했다.


조광윤이 다시 말한다: "내가 서쪽으로 천도하려는 것은, 다른 뜻이 아니다; 그저 산과 강으로 수도를 방어하려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쓸데없이 많은 병력을 줄일 수 있고, 주나라 한나라의 이야기를 따라 천하를 안정시킬 수 있다."


조광의가 말한다: "나라를 지키는 것은 덕에 있지 험준한데 있지 않습니다."


조광윤은 한참동안 말을 하지 않는다. 조광의가 떠난 후에 조광윤은 좌우의 근시(近侍)들에게 말한다: "진왕이 하는 말은 그 나름대로 이치가 있다. 그의 말을 한번 들어보자. 다만..." 송태조는 탄식을 하며 천천히 말을 잇는다. "걱정되는 건 백년이 지나지 않아 천하의 민력이 다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송태조는 동생 진왕의 권고를 받아들였지만, 실제로는 시기를 기다린 것이다. 조광윤은 고집이 센 국왕이 아니다. 그는 전통을 존중했고, 현실을 인정했다. 시세에 맞게 일처리를 했다. 남송때, 주희가 친구와 송태조가 개국하여 제도를 만들 때의 일을 회상하면서, 친구가 주희에게 이렇게 물었다: "태조가 명을 받아, 오대의 폐햬가 있던 법을 없애고, 난세를 치세로 바꾸었다." 주희가 말한다: "그렇지 않다. 그저 심한 것을 없앴을 뿐이다. 나머지 법령의 조목은 여전히 옛것을 따랐다. 무릇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먼저 그 대강을 만들고 나머지 절목은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맞추면 된다. 이것이야말로 영웅의 수단이다." 현재의 용어로 말하자면, 이것은 바로 보수주의의 개혁노선이다.


천도의 건으로 돌아오자면, 조광윤은 애심으로 "주,한의 이야기를 따르겠다"는 생각이 있어, 장안을 수도로 삼으려는 생각이 있었지만, 그도 현실을 존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처한 10세기는 이미 주,한과는 시대가 달라졌다. 오랫동안의 전란으로 장안등 북방도성은 이미 옛날의 번화함을 잃었다. 동진시기에 의관남도하면서 남방이 크게 개발되고, 중국의 경제,문화의 중심은 점점 강남으로 이전된다. 군사,정치중심은 여전히 북방에 있었다. 남방과 북방의 두 개 중심이 분리된 것이다. 만일 발달한 교통망이 남북을 이어주지 않는다면, 남방의 경제는 북방으로 수송될 수가 없다. 북방의 군사력도 유지될 수가 없다. 나아가 전체 왕조의 안전도 보장받기 어렵다.


철로와 기차가 발명되기 전에, 수운라인은 가장 경제적이고 가장 빠른 운수네트워크이다. 다만 중국의 황하, 장강은 대체로 동서방향으로 흐른다. 남북간에는 관통하는 수운라인이 없다. 수양제는 대운하를 팠고, 당연히 이는 양주로 가서 미녀를 만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남북의 보급선을 열기 위함이다. 


대운하를 파서 남북을 관통시키는 것으로 중화제국은 긴밀한 공동체가 형성된다. 부유한 남방은 비로소 계속 북방에 물자를 운송해주는 대후방이 된 것이다. 운하선에 놓여 있는 변량은 근수루대선득월(近水樓臺先得月)로 지위가 날로 중요해졌다. 오대의 후량, 후진, 후한과 후주정권이 모두 변량을 도읍으로 정한다. 송나라는 오대의 엣제도를 승계했고, 개봉부를 수도로 삼는다. 이는 역사의 추세에 순응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