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문사원지(文史園地)
당시(唐詩)는 중국의 진귀한 전통문화이다. 송나라의 전쟁때 당시는 심지어 군사정보의 전달매개체로 쓰였으니 실로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양송(兩宋)시기는 전쟁이 빈번했고, 첩보가 중시되었다. 당시는 첩보전이 빈번한 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송나라의 정치, 경제와 문화중심인 경성에는 전국의 중요정부기구가 모여있고, 수뇌부에 가장 근접한 지역이다. 그래서 각지 간첩이 모두 모이는 장소가 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이렇게 탄식한 바 있다. 천자의 발 아래 외국간첩이 없는 곳이 있겠는가? 관리인 왕존(王存)은 일찌기 이렇게 우려한 바 있다. 요(遼)나라사람들이 우리 조정의 소식을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알고 있다.
조정은 그리하여 여러번 조서를 내려 공개적으로 경성내외의 능력있는 자들을 모아서 간첩을 체포하도록 했다. 1명을 잡으면 상으로 3십만을 하사받고, 공명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간첩인 줄 알면서 신고하지 않거나 간첩을 비호한 자는 가장이 참수당할 뿐아니라, 처자식도 유배갔다. 이를 보면 당시 간첩은 조정의 골치거리였음을 알 수 있다.
당연히, 송나라는 방어만 한 것이 아니다. 송나라도 적극적으로 자신의 간첩망과 간첩방어망을 조직했으며 완전한 체계를 갖추었다.
먼저, 간첩의 "자질"은 높다. 충성스러워야 하고, 죽음을 겁내지 말아야 한다. 기민해야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외에 당시 전쟁은 자주 있었으므로 적군의 동정을 살피는 것은 간첩의 중요임무였다. 적에게 발견되지 않고, 순조롭게 임무를 완성하기 위하여, 그들은 자주 좁은 길, 숲복이나 절벽을 다녔다. 그래서 간첩이 되려면 신체적인 자질도 남달라야 했다.
전쟁의 필요로, 송나라는 수영을 잘하는 "와인(蛙人)"을 간첩으로 모집한다. 남송초기에 전문적으로 수상정보전달기구인 "수탁후(水坼堠)"를 설립한다.
남송인이 쓴 <소충록(昭忠錄)>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한해는 원(元)나라군대가 양양(襄陽)을 포위공격하였고, 양양을 물샐틈없이 포위하였다. 그리고 수로에도 장책을 설치하여 물고기나 새우조차 빠져나가기 힘들게 하였다. 양양의 송나라수군은 두 명의 "와인"을 보내어 물속으로 수십리를 잠행하여 구원병을 불어오게 한다.
이외에 조정은 일부 전문가를 모집한다. 예를 들어, 외국어에 능통한 자, 지리지식과 회화능력을 갖춘 자. 일정한 수학지식을 갖춘 자. 이들은 여러 방면에서 적의 정보를 얻어올 수 있었다.
다음으로, 비교적 계통적인 간첩망을 건설한다. 송나라때 간첩의 신분은 아주 복잡했다. 여러 업종에 걸쳐 있었다. 외국에 사신으로 나가는 사람, 변방무역을 하는 상인, 적장의 심복, 애첩, 토착민, 외국인, 보통백성, 포로, 승려등등이 모두 간첩으로 될 수 있었다.
송나라사람인 위태(魏泰)의 <동헌필록(東軒筆錄)>에는 이런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한 승려가 반간계 임무를 뛰어나게 완수한 내용이다. 송인종때, 서하의 원호(元昊)가 유륵차(裕勒且)를 송과 서하의 변경을 지키도록 임명한다. 유륵차는 용맹하며 전투를 잘했다. 송나라의 변경에 심각한 위협이 되어서 송나라장수는 그를 제거하고 싶어했다.
하루는 송나라장수인 종세형(種世衡)이 항상 그를 위하여 간첩임무를 수행하던 광신화상(光信和尙)을 시켜 유륵차에게 서신을 보낸다. 그런데, 그는 변경에 도착하자마자 체포되고 만다. 그런데, 그의 몸에서 찾아낸 것은 그저 일반적인 안부를 묻는 내용밖에 없었다.
원호는 일이 그렇게 간단하다고 생각지 않았다. 그래서 광신을 엄히 고문한다. 그러나 아무 것도 얻어내지 못한다. 이때 광신이 입은 새 솜옷이 원호의 눈길을 끈다. 그는 사람을 시켜 자세히 조사하게 한다. 과연 안에서 또 다른 서신을 한통 발견한다. 이는 종세형과 유륵차가 서로 안팎에서 호응하기로 하는 밀약이었다.
원호는 대노하여, 유륵차의 병권을 회수하고, 얼마후 그를 죽여버린다. 송나라는 아주 멋진 반간계에 성공한 것이다.
그리고, 송나라때의 암호기술은 아주 선진적이었다. 송나라사람들은 암호를 "자험(字驗)"이라고 불렀다. 소위 "자험"은 각종 정보를 40자짜리 1수의 시에서 어떤 글자를 표시한다. <무경총요(武經總要)>의 기록에 따르면 군중의 일은 40가지라고 한다. 예를 들어, "활을 보내달라" "화살을 보내달라" "말을 보내달라" "사료를 보내달라" "병력을 추가해달라" "진지를 고수하라" "적이 많다" "적이 적다" "병사들이 병들었다"등등 이를 순서대로 배열한 후 40개의 항목중 한개 혹은 수개의 상황이 발생하면 1수의 오언율시를 사십항의 순서대로 쓰고, 하나의 기호를 시의 몇번째 글자 아래에 남긴다.
<적득고원초송별(賊得古原草送別)>을 예로 들면, 시는 전부 40자이다. "리리원상초(離離原上草), 일세일고영(一歲一枯榮), 야화소부진(野火燒不盡), 춘풍취우생(春風吹又生), 원방침고도(遠芳侵古道), 청취접황성(晴翠接荒城), 우소왕손거(又送王孫去), 처처만별정(萋萋滿別情)" 만일 "적에게 포위되었다(被賊圍)"는 상황일 때 40항의 순서는 제31항이 된다. 그렇다면 바로 시의 제31번째 글자인 "우송왕손거"의 "우(又)"가 되는 것이다. 우자의 위에 표시를 해서 보내면 바로 "적에게 포위되었다"는 것이 되는 것이다. 장수는 가지고 있는 암호책을 열어서 대조해보면 상황을 알 수 있게 된다. 정보의 안전성이 아주 높아지는 것이다.
당연히 그때는 다른 첩보전기술도 있었다. 예를 들어 납서(蠟書), 옹청(甕聽), 공표(空飄), 전서(箭書) 등등. 각양각색이었는데 바로 당시가 첩보전이 무르익었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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