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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민국기녀자)

양내매(楊耐梅): 영화스타에서 거지까지....

by 중은우시 2017. 8. 11.

작자: 미상


중국 초기의 영화스타 양내매(楊耐梅)가 있다. 원래 이름은 양려주(楊麗珠)이다. 1904년 상해에서 태어났고, 그녀의 부친은 크게 부유한 상인이었다. 양내매는 어려서부터 사랑을 받고 자라, 성격이 제맘대로였다. 상해에서 가장 좋은 학교인 무본여중(務本女中)에서 공부할 때, 그녀는 무대극에 흥미를 느끼고, 자주 가서 공연을 보다가 희극계의 거두인 정정추(鄭正秋)를 알게 된다. 


그녀의 마음 속에 가장 시대를 앞서가는 것은 영화였다. 그녀는 영화스타가 되고 싶었고, 마를렌 디트리히는 그녀의 우상이었다. 1923년, 명성영화공사는 원앙호접파 문인 서침아(徐枕亞)의 소설을 개편한 <옥리혼(玉犁魂)>을 찍으려 하는데 적합한 여주인공을 구할 수 없었다. 양내매의 외모와 기질은 역할과 매우 비슷해서, 정정추가 그녀를 여주인공으로 명성회사의 장석천(張石川)에게 추천한다. <옥리혼>에서 미친듯이 소고(小姑) 균천(筠倩)을 연기하여 일거에 유명해진다. 그녀의 영화에서의 역할인 방탕하고 풍류적인 사교계의 꽃 역할을 아주 잘 해낸다. 전혀 일부러 꾸며서 연기하는 것같지 않았다. 얼마후 그녀는 다시 <차화녀(茶花女, 라 트라비아타, 우리나라에서는 춘희)>에서 주연을 맡는다. 곧이어, 21살때 <유혼(誘婚)>을 찍는데, 거기서 속세에서 부침하는 모던 소녀를 연기하여 상해탄의 유명한 여자스타가 된다. 그리하여 그녀는 "낭만여자스타"라는 칭호를 덛고, 이와 동시에 "길거리 골목 차루, 술집의 어디에서도 양내매의 견식이 넓고 많다고 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 3개의 영화는 그녀의 역할을 방탕한 여성이라는 것으로 고정시킨다. 그리하여 가족의 반대에 부닥친다. 그녀는 영화스타의 길을 걷기 위해 가족과도 결별한다. 


그러나 양내매는 그녀의 길을 계속 가고, 그녀의 연예사업은 중천에 뜬 해와 같았다. <신인의 가정>, <공곡란(空谷蘭)>, <사월의 장미는 곳곳에 핀다>, <미인관(美人關)>, <호가가<好哥哥)>, <마전거(馬前車)>등 여러 영화를 찍는다. 영화에서 그녀는 낭만적이거나 방탕한 여인을 연기하고, 당시에는 보기 드문 '섹시미'를 기치로 내건 여성스타가 된다. 


더 이상 부정적인 이미지의 역할만이 아니라 긍정적인 이미지의 역할도 맡는다. 그녀의 명성이 최고조에 이르게 한 것은 포소천(包笑天)이 톨스토이의 <부활>을 개편한 영화 <양심의 부활(良心的復活)>에서는 그녀가 이전에 연기했던 것에서 벗어나 짜르의 통치에 반대하는 현명한 모친을 연기한다. 당시는 아직 무성영화시대였다. 그러나 감독 복만창(卜萬蒼)은 아주 재미있는 조치를 하나 마련한다. 영화가 상영될 때, 클라이막스에 도달할 때 은막이 올라가고, 영화에서와 똑같이 차려입은 양내매가 등장하여 이 영화를 위하여 만든 노래 <유낭곡(乳娘曲)>을 부른다. 영화는 20일간 상영되었고, 매번 관객이 꽉 들어찼다.


1926년, 상해 <신세계> 잡지는 영화황후(影后) 선발행사를 한다. 당시에 4명의 여자 영화스타가 뽑히는데, 그 중의 한 명이 바로 "양내매"이다. 


1956년, 홍콩의 길거리에 한 여자걸인이 나타난다. 비록 구걸을 하기는 하지만, 기질이 비범하고, 스타일은 살아있었다. 사람들은 조용히 그녀의 내력을 알아보는데, 그러고 나서 그녀가 예전의 영화스타 양내매라는 것을 알게 된다.


상해에서 가장 많은 인기를 얻던 여자 배우가 홍콩의 길거리에서 구걸을 하다니, 얼음과 불꽃같이 천지차이나는 신분이 한 사람에게 모였다. 그녀를 떠올리면 떨쳐버릴 수 없는 것이 '운명'이라는 글자이다.


양내매가 미친 듯이 꿈꾸던 장면이 점점 실현되고 있었다. 에두아르드7세로(愛多亞路)이 2청 양옥집에 거주하면서 기발한 옷을 입고, 집안에서 파티를 열며, 젊은 배우 주비(朱飛)와 연애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천만명이 앙모하는 대상이 된 것이다. 그녀는 중국 최초로 자가용ㅇ르 가진 여자가 되고, 최초로 공공장소에서 다리를 드러내고 양말을 신은 여자가 된다. 그녀의 나쁜 성격과 나쁜 기호는 바람을 맞아 자라는 것처럼 커지기 시작한다. 그녀는 도박, 마약을 하고, 영화를 찍을 때도 지각을 하며, "스타'의 굴레를 벗어나서 따로 영화사를 차릴 생각도 한다.


별도의 영화사를 차리려는 생각은 이렇게 나왔다. 1927년, 그녀는 신문으 머릿기사로 뉴스 하나를 보게 된다. 뉴스의 주인공은 여미안이라는 여자였다. 이 여자는 집안끼리 맺어준 결혼에 반대하여 상해로 도망쳐오고, 하루는 베란다에서 길거리를 다니는 행인들을 보고 돌연 지례를 창밖으로 뿌렸다. 그리하여 길가던 사람들이 앞다투어 주웠다. 그녀는 고개를 숙여 내려다보면서 큰 소리로 웃고 있었다. 양내매는 이 이야기에 감동받는다. 그래서 여미안의 이야기로 영화를 만들고자 한다. 그러나 그녀가 자신의 생각을 장석천에게 얘기했으나, 장석천은 단칼에 거절한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결정한다. 따로 영화사를 만들겠다고. 최초의 작품은 바로 여미안의 이야기이다. 그녀는 당시에 저축해놓은 돈이 없었다. 그리고 부친의 도움을 받는 것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바로 이때 산동군벌 장종창(張宗昌)이 상해로 사람을 보내온다. 양내매에게 그녀의 방명을 연모한지 오래되었다면서 그녀에게 산동으로 와서 만나자고 하였다. 그 보답으로 그녀가 영화를 찍을 돈을 대주겠다는 것이다.


장종창의 비열한 행적은 그의 별호에서도 알아볼 수 있다. "구육장군", "혼세마왕", "삼부지장군", "오독대장군" 특별히 "삼부지(三不知)"는 세 가지를 모른다는 것인데, 첫째는 자신이 거느린 병력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고, 둘째는 자신이 가진 돈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고, 셋째는 자신이 거둔 첩이 얼마나 되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가 양내매를 산동으로 부른 목적은 분명하다. 모든 사람은 그녀가 산동으로 가는데 반대한다. 그러나 양내매는 가기로 결정하고, 반달 후 거금을 가지고 상해로 돌아온다.


그 반개월 동안의 생활은 영원한 수수께끼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결과를 알고 있다. 상해로 돌아온 양내매는 빌라를 임대하고, 기자재를 구매하여, "내매영화공사"를 설립한다. 그리고 포천소에게 극본을 쓰게 하고, 사동산, 채초생에게 공동감독을 맡게 하여 <기녀자>를 찍는다. 그녀는 여주인공역을 맡는다. 촬영장에는 당시에 가장 선진적인 장비가 있었을 뿐아니라, 도박장과 아편흡입소도 있었다. <기녀자>가 상영되자, 영화관은 꽉 들어찬다. 그리하여 그녀는 더욱 돈을 물쓰듯하게 된다. 그녀는 심지어 하룻밤만에 8만원을 잃은 적도 있다. "내매영화공사"도 문을 닫게 되고, 그녀는 부득이 다시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대중국극단을 따라 남경에서 <체소인연(啼笑姻緣)>을 공연한다. 그 후에 극단에서 퇴출되고, 다시 <천일영화공사)에 들어간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미 유성영화가 무성영화를 대체해 버렸다. 그녀는 광동사람으로 표준어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1933년, 대동공사의 <춘풍양류>에 출연한 후 영화에 더 이상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다. 호접(胡蝶), 완령옥(阮玲玉), 하패진(夏佩珍)등이 그녀의 뒤를 이어 은막의 스타가 된다.


시집을 가는 것도 하나의 출로였다. 이때 그녀는 명문가의 후손인 진군경(陳君景)을 만난다. 진군경의 부친은 바로 손중산 선생을 따르던 진소백(陳少白)이다. 진군경 본인도 경제학 박사였다. 그녀는 진군경에게 시집간다.


인생의 부침을 한바탕 겪고 양내매는 이제 정상적인 생활을 그리워했다. 그녀는 도박과 아편을 끊고, 마음을 잡고 집안일을 한다. 그리고 딸 하나를 낳는다. 그녀의 부모는 이런 모습을 보고 아주 안심하게 된다. 단지 행복한 생활이 오래 가지는 못했다. 항전이 발발하고, 그녀는 전후로 남편회사의 도산, 부모사망, 가산강탈, 홍콩이주, 남편의 실업을 차례로 겪는다. 홍콩에서 그들은 집안의 패물등을 팔아서 연명한다. 그녀는 이미 바닥까지 내려가서 힘든 생활을 하고 있었다. 딸은 커서 이미 작은 사업을 하는 사람에게 시집가 있었고, 남편을 따라 타이완으로 가 있었다. 


그 동안 생계를 위하여, 그녀는 다시 영화계로 돌아갈 생각도 한다. 그러나 홍콩에서는 적합한 기회를 찾을 수 없었다. 그녀는 다시 상해로 돌아온다. 그리고 영화계의 인사들과 만난다. 1942년 6월 27일, <대중영신>은 그녀의 회귀를 이렇게 조롱한다: "내매의 나이는 이미 늙었다. 그러나 서낭(徐娘)의 풍운은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아마도 상해의 인사들은 다시 한번 그녀의 하이힐 아래에서 숭배하게 될 것이다."


그녀는 부득이 다시 홍콩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녀의 생활은 하루하루 더 악화된다. 1956년, 그녀는 남편과 이혼한다. 얼마 후, 거지가 된다. 1957년, 그녀의 딸은 소식을 듣고 타이완에서 급히 와서 그녀를 찾는다. 그리고 그녀를 데리고 타이완으로 간다. 그녀는 1960년 2월 27일 타이완에서 사망한다.


그녀가 일생동안 겪은 일은 시대의 동탕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같은 시대의 여자영화스타들중에 잘 살다가 간 사람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중국인의 가장 소박한 철학이 그녀의 일생을 해석해줄 수 있을 것같다: 운이라는 것은 한도가 정해져 있고, 언젠가는 다 쓰기 마련이다. 그녀의 기이한 습관과 나대기 좋아하는 성격은 운이 따라줄 때는 자극적이었지만, 또한 운이 흘러가는 것을 가속화시키기도 했다.


양내매는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내가 지나간 일을 생각해보면, 봄날의 한바탕 꿈만 같다. 영화계의 후배들을 생각해보면, 나를 거울로 삼아서, 잘나갈 때 조심해야 하고, 늙었을 때를 준비해야 한다." 이것은 그녀가 깊이 생각한 후에 느낀 점일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일생이 이를 증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