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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민국기녀자)

완령옥(阮玲玉) 자살의 진상

by 중은우시 2014. 1. 29.

글: 해새장(解璽璋) 

 

사람은 왜 자살을 선택할까? 그것도 꽃같은 나이에. 우리가 완령옥의 이야기를 하려면 이런 질문을 회피할 수 없다. 화극 <완령옥>은 왜 이 문제를 탐색하고 답안을 제시하려 하지 않았는가?  전통적인 견해는 완령옥이 소문때문에 죽었다는 것이다. 그녀의 유서가 그 증거이다. 거기에는 여러번 "인언가외(人言可畏. 사람 말이 무섭다)"는 언급이 있다. 노신(魯迅) 선생은 이것을 주제로 하여 글을 쓴 바도 있다.

 

소문은 사람을 사지에 몰아넣기도 한다. 이것은 완령옥이 아니어도 충분히 증명할 수 있다. 소문이 살상력을 지닌 그 배후를 보면 사람의 자애(自愛)와 자중(自重)이 있다. 장사달(張四達)은 완령옥의 이 "약점"을 잘 알았다. 다른 말로 하여 이것을 "연륵(軟肋)"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래서 그는 반드시 사정을 신문에까지 시끄럽게 떠들러야 했다. 그리하여 후안무치한 3류신문 기자를 돈으로 매수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의 이 수법은 통했다. 완령옥은 즉시 붕괴한다. 실제로 그녀와 같이 거의 아무런 자체방어능력을 갖추지 못한 약한 여자에게 필요한 것은 세심한 보살핌이다. 그래야 아마도 부서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곁에 있던 3명의 남자는 장사달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당문산(唐文山)과 목천배(穆天培)도 앞에 나서서 그녀에게 쏟아지는 총탄을 막아주려 하지 않았다. 남자로서, 그들은 책임을 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어쨌든 약간은 막아주었어야 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소문은 완령옥을 죽일 수는 있었지만, 노신을 죽이지는 못했다고. 그 말에 숨은 뜻은 완령옥이 연약하고 강인하지 못했다는 것을 질책하는 것이다. 이런 비유는 실로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노신에게는 붓이 있었다. 그것은 그의 비수이고 투창이었다. 소문에 대하여, 그는 대응할 방법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대응했다. 그의 글의 살상력은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었다. 완령옥은 달랐다. 노신은 그녀를 "무권무용(無拳無勇)"이라고 말했다. 그녀의 손에는 붓도 없었고, 칼도 없었다. 물론 창도 없었다. 소문이 밀려올 때, 마치 스모그와 같이 온 천지에 가득 찰 때, 원무두(寃無頭), 채무주(債無主)의 상태였다. 우리는 그녀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봐도 좋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뜻과 다르게 얼굴에 꽃이 그려졌는제. 이를 지워버릴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그리고 이 얼굴을 사랑한다. 어떡하면 좋을 것인가? 그녀가 유일하게 자신의 명예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은 생명밖에 없다!

 

그러나, 나는 생각한다. 우리는 간단하게 완령옥을 약자라고 취급해서는 안된다. 그녀에게 유약한 일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녀도 강자이다. 용자이다. 그저 그녀의 강함과 그녀의 용기는 모두 내재적이었다는 것이고, 뼛속까지 스며든 강함과 용기였다는 것이다. 바로 노신선생이 말한 것처럼, "자살은 기실 쉬운 것이 아니다. 절대로 우리처럼 자살을 준비하지 않는 사람들이 무시하는 것처럼 그렇게 가볍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누구든 쉽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한번 해봐라!" 서범(徐帆)은 아주 날카롭게 정곡을 찔러 완령옥의 이런 정신적 특질에 대하여 말했다. 그녀의 행동은 그녀의 유약, 무조(無助), 절망을 보여줄 뿐아니라, 그녀의 절결(絶決)과 의무반고(義無反顧)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렇다. 생명과 결백은 모두 그녀에게 가장 고귀한 것이다. 다만, 결백이 위협을 받으면 그것이 더렵혀지게 되면, 양자는 모두 지킬 수 없다. 그녀는 차라리 결백을 위하여 생명을 희생한 것이다

 

당연히, 자살이 떳떳한 일은 아니다. 최소한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생명을 아껴라고. 중국문화에서 비록 하느님은 없지만, 에덴동산은 없지만, 신성한 사람과 적나라한 생명, 자연은 없지만, 그리고 까뮈처럼 자살을 엄숙한 철학문제로 다룬 사람도 없지만, 중국인도 절대로 생사문제를 논의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비록 공자는 "삶도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라는 명언을 남기기는 했지만. 기효람의 <열미초당필기>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는데, 아주 재미있고, 의미심장하다: 한 사람이 산길을 가는데 하늘이 이미 어두워지고 있었다. 부득이 한 늙은 묘(廟)에서 잠을 잘 수밖에 없었다. 거기서 노승을 만나서 얘기하다보니 알게 되었다. 노승은 실제는 액귀(縊鬼)인데, 여기서 자신을 대체(待替)할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노승은 그를 해칠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그와 생사에 관한 이치를 얘기한다: '상제는 삶을 좋아해서, 사람들이 스스로 그 목숨을 해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만일 충신이 절개를 지켜 죽고, 열부가 정절을 지켜 죽으면, 비록 횡요(橫夭)이지만, 정명(正命)과 다를 바가 없으므로 대체가 필요없다. 그 상황이 몰려 더이상 삶을 구할 수 없는자가 그 일을 안타깝게 여겨서 부득이하게 죽은 경우에도 윤회를 하게 된다. 그 평생을 계산해보면 선악의 보답을 받은 것이니 대체가 역시 필요없다; 살아갈 희망이 있는데도 작은 화를 참지 못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친다는 핑계를 대거나 급한 성격을 드러내어 죽은 경우에는 천지생물의 마음을 버린 것이니, 반드시 대체하게 해야 한다. 이를 통해서 징벌을 한다. 그래서 어두운 곳에 가두어 백년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그는 이어서 스스로 목을 맨 자(自縊者)를 구별하여 말한다: 노승이 이렇게 말한다. "사람이 목을 매는데에는 절의를 위하여 죽은 자는 혼이 하늘로 올라가니 그 죽음이 빠르다; 분노나 질투로 죽은 자는 혼이 아래로 내려가니 그 죽음이 느리다." 노승이 어떻게 죽었는지는 그가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불인지심(不忍之心), 그리고 사람을 해치지 않으려는 마음을 보면 여기 하늘을 감동시킨 것이다. 그래서 그를 다시 해탈환생하게 한 것이다.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이야기해주는 것은 죽음은 가치있다. 어떤 때는 태산보다 중하다. 어떤 때는 새털보다 가볍다. 그리고 경중을 형량하는 기준은 도덕이다. 중국문화에서 지고지선의 하느님은 없다. 그러나 지선의 도덕이념을 추구하는 것은 있다. 이것이 바로 사람으로서의 경지이다. 그래서 성인은 "살신성인" "사신취의"를 한다. 왜냐하면, "인"과 "의"는 모두 인간이 그 도덕감을 제고시키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부득이할 때, 목숨을 버려서 그의 순결하고 존엄있는 생활을 이룬다면, 자연히 욕을 참고 구차하게 생명을 연장하는 것보다 가치가 있다. 이학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굶어죽는 일은 작은 일이고, 절개를 잃는 일은 큰 일이다." 이전에 이것은 이학살인(理學殺人)의 증거로 인용되었지만 지금은 이럿을 이렇게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때는 정절을 지키고 인격존엄을 지키는 가치가 생명 자체보다도 크다. 혹은 생명의 가치는 바로 정절을 치키고 인격의 존엄을 유지함으로써 부여되는 것이다. 한 사람에게 만일 지키는 정절이 없고, 인경존엄이 없다면, 생명은 그저 썩은 고기일 뿐이다. 남겨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완령옥의 죽음에 관하여, 우리는 그녀가 높은 덕행과 절조를 지녔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녀는 그저 한 여인으로서 한 여배우로서의 결백을 지키고자 했을 뿐이다. 다만 그거에는 분명 그녀의 존엄과 인격이 포함된다. 그녀가 자신의 하나뿐인 목숨을 끊은 것에 대하여 사람들이 만족할만한 이유를 대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그녀는 자신의 골기(骨氣)를 보존했다. 이것이 화극 <완령옥>이 나를 감동시킨 점이다. 이제 그 3명의 남자의 마지막 독백은 전혀 가치와 의미가 없어 보인다.